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536
536화 그자가 누구입니까?
남자가 눈을 뜨자 순식간에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붉은 하늘 아래로 눈에 보이지 않은 살의가 흘러 내려왔고, 이내 장내 모든 무인들의 눈이 천천히 붉게 변해갔다.
살념(殺念)!
모두의 마음속엔 순식간에 살념이 녹아들었다.
심지어 목풍진 정도 되는 무인일지라도 감히 밀어낼 수 없는 지독한 살념이었다.
장내 모든 이가 살념을 해소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검종 상공에 있던 남자가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돌연 붉게 물든 하늘이 원래 색깔을 되찾았고, 짙게 깔려있던 살념 또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에 정신이 돌아온 무인들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때 남자가 다시금 두 눈을 떴다.
하지만 이때 그의 눈은 보통의 사람처럼 정상으로 보였다.
청삼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무원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마침내 무원 조사에게로 가서 멈췄다.
무원 조사를 발견한 순간, 남자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이때 아래쪽에 있던 목풍진 등 검종의 무인들이 남자를 향해 황급히 예를 차렸다.
“조사를 뵈옵니다!”
그들을 한눈에 내려다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앞의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 여인이 먼저 운을 뗐다.
“보아하니, 너희 검종이 나의 무원을 멸하고자 한 모양이군.”
그녀의 말에 흠칫 놀란 남자가 다시 한번 장내를 돌아보았다. 무참히 부서져 있는 전각들과 산봉우리들을 확인한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게 무슨 일이더냐?”
그러자 목풍진이 황급히 청삼 남자 앞에 나타나 예를 차리며 대답했다.
“조사, 이는 검종이 무원을 멸하려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원이 외세와 결탁하여 검종을 치려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미 우리 검종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니겠지?”
남자의 말에 목풍진이 깜짝 놀라며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남자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와 동시에 가느다란 백광이 순식간에 목풍진의 미간 사이로 쑥 들어갔다.
그 순간 목풍진이 마치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이를 본 검종 제자들은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남자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이때 그는 이미 사건의 진상을 모두 파악한 후였다.
남자가 문득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엽현이 위치한 자리였다.
남자가 쳐다보는 것을 느낀 엽현이 다소 긴장하며 경계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동안 엽현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엽현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나오너라.”
그 말에 엽현이 잠시 주저하는 듯했지만, 이내 남자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엽현을 마주한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원망했느냐?”
“처음 보는 사이인데 무슨 원망을…….”
엽현이 어리둥절해 하며 묻는 순간, 남자가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엽현의 몸 안에서 한 자루 검이 빠져나오더니, 천천히 남자의 손안으로 떨어졌다.
탑의 검이었다.
순간 깜짝 놀란 엽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남자는 분명 탑의 검과 관련이 있던 것이다!
이때 남자가 손에 들어온 검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오랜만이로구나.”
그러자 검이 몸을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천지 가득 청명한 검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후, 그동안 고생 많았겠군.”
남자의 말에 검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짧게 몸을 떨었다.
바로 이때, 한 자루 붉은 검이 남자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검을 본 남자의 눈에서 순간 의아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너로구나…….”
그러자 검이 갑자기 몸을 떨더니, 놀랍게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군.”
“하하,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남자가 마치 오래된 벗을 대하듯 붉은 검을 향해 물었다.
“그리 잘 지내진 못했다. 한 계집 덕분에 의식이 꼼짝없이 봉인되었으니. 만약 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음? 도대체 누가 너를 봉인했단 말이냐?”
“그게… 그런 여자가 있다. 주제를 모르고 너무 오만했던 내 탓도 있었고, 뭐…….”
“정말 그랬다면, 축하해 줄 일이로군!”
“고맙군. 나 역시 봉인되어있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남자의 물음에 붉은 검이 침묵하다 대답했다.
“오랜만에 나왔으니 여기저기 좀 돌아 다녀보고 싶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도록 하지.”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붉은 검은 한 줄기 검광으로 변해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게 검이 떠나간 후, 남자는 다시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무원의 조사 역시 엽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총애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한편, 두 사람의 눈빛을 받고 있는 엽현은 다소 어리둥절했다.
장내의 분위기 역시 어딘가 묘하게 바뀐 상태였다.
예상대로라면 조사들이 등장한 이후, 큰 전쟁이 벌어져야 정상일 텐데.
어째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목풍진을 비롯한 검종의 무인들의 표정은 어딘가 대단히 불안해 보였다.
이때 남자가 엽현의 복부 쪽을 바라보더니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안에 한 자루 검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엽현이 뽑지 못했던 검집 안에 있던 그 검이었다.
손안의 검을 내려다보는 남자. 그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로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이때 격렬하게 몸을 떨기 시작하는 검.
이에 남자는 별말 없이 다시 검을 계옥탑 안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엽현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했다.
“방금 그 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대는 엽현을 보자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내 오랜 벗이다. 아직은 네가 다룰 수 없으니, 언젠가 합당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도전해 보도록 하거라.”
바로 이때, 목풍진 곁에 있던 흑의인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듣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
흑의인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 청삼의 남자가 흑의인을 향해 눈길을 준 그 순간, 흑의인의 목이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은 장내.
초살(秒殺)!
목풍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름을 느꼈다.
방금 죽은 흑의인은 자신과 엇비슷한 실력의 강자 아닌가!
그런 자를 단지 한 번 쳐다본 것만으로 죽일 수 있다니!
이때 남자가 목이 잘린 시체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제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겠구나.”
남자가 나머지 흑의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또 내 말이 듣기 싫은 자가 있느냐?”
흑의인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어떤 자들은 심지어 등을 돌려 도망치려고까지 했다.
“누가 가도 좋다고 했느냐?”
등 뒤에서 들린 청삼남의 중후한 음성에 흑의인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그중 한 흑의인이 용기 내어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저 저희는…….”
흑의인이 본론을 채 꺼내기도 전, 그의 곁에 있던 다른 흑의인들의 목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
장내 무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얼어붙어 있는 흑의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 하려 했느냐? 들어보자꾸나.”
그러자 흑의인이 어금니를 깨물며 소리쳤다.
“이, 이렇게 힘으로 약자를 찍어 눌러도 되는 것이오!?”
이에 웃으며 손가락으로 엽현을 가리키는 남자.
“너희도 이 아이에게 똑같이 하지 않았더냐?”
“그대는 정말 스스로가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가!?”
“후후,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으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남자가 여유 있는 모습으로 대답하자, 흑의인이 갑자기 흉흉한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의 뒤에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분이 있다! 너 따위보다 백 배, 천 배 강한 분이란 말이다!”
그 말과 동시에 흑의인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그의 목은 하늘 높이 솟구치고 말았다.
남겨진 몸에서 분수처럼 튀기는 피를 바라보며, 모든 이들은 할 말을 잃었다.
방금 검종 조사가 보여 준 무위는 현실과 큰 괴리가 있던 것이다!
한편, 청삼 남자는 이런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엽현을 돌아보았다.
“부러운 녀석.”
‘내가 부럽다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때는 참 지독히도 당했지.”
남자의 연이은 뚱딴지같은 말에 엽현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미 남자는 엽현 곁에 있던 엽령을 살피는 중이었다. 잠시 온화한 표정으로 엽령을 바라보던 남자가 가볍게 손을 펼치자, 한 줄기 검광이 엽령의 미간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엽령이 몸을 떨더니, 그녀의 몸 안에서 강대한 기운이 회오리쳐 오르기 시작했다.
“내 이미 이 아이에게 가해진 금제를 풀어 놓았다. 앞으로는 그녀의 체질을 막는 어떤 제한도 없을 것이니, 앞으로 잘 보살펴야 할 것이다.”
남자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자의 시선은 엽현의 복부로 향했다.
“그대가 갇힌 것은 결코 이 아이의 탓이 아니오. 그러니 만약 어떤 원한이 있거든 탑의 원래 주인을 찾아가시오. 물론 나를 찾아와도 상관없소.”
잠시 후, 탑의 육 층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녀석과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그 말에 청삼남이 엽현을 바라보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잘 보살펴 주고 계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안심이로구나.”
남자가 한편에 있던 무원의 조사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무원의 조사는 아래쪽에 있던 안란수를 향해 다가갔다.
안란수는 여전히 천겁을 견디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로 의외로군.”
“그러게 말이야.”
어느새 그녀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웃으며 대꾸했다.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하지.”
“좋아. 그동안 볼일을 좀 보도록 하지.”
말을 마친 청삼의 남자가 목풍진 등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검종의 무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당시 나는 검종과 무원이 계속해서 잘 지내리라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희도 알고 있겠지?”
그 말에 목풍진과 이현풍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자가 대답 없는 이현풍을 바라보았다.
“검종을 망친 것이 나라고 했던가? 네가 그 말을 할 때 나도 듣고 있었다.”
“그, 그것이…….”
이현풍이 안색이 창백해져 변명하려 하자,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 분신을 남겨둔 것은 훗날 검종이 오유계로 넘어갈 때 도움을 주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 했다니……. 너희들은 어찌 보면 참 대단한 녀석들이로구나.”
이에 목풍진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조사! 큰 죄를 지었으니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 너희 마음대로 하거라.”
청삼의 남자가 차갑게 대꾸하더니,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느냐?”
“있습니다. 탑이 왜 저를 선택한 것입니까?”
“많은 요인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너 자신 때문이다.”
당황해하는 엽현을 보며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상상했던 너의 모습은 조금 다른 것이었는데……. 어쨌거나 지금은 아무리 설명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라도 네가 구 층에 이를 수 있게 된다면 자연히 모든 것을 깨달을 것이니 서두르지 말거라.”
“…그럼 한 가지만 말해 주십시오. 탑을 통하면 오유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유계를 다녀온 적도 있습니까?”
남자는 그 질문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엽현의 계속된 물음에 이번에는 남자가 반문했다.
“너는 탑이 어째서 이 세계에 나타난 건지 알고 있느냐?”
가만히 고개를 젓는 엽현.
그러자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놈은 도망쳐 나온 것이다.”
“도망치다니, 그게 무슨…….”
“누군가 한 판의 거대한 바둑을 두는 중이다. 이 세상의 생명체는 모두 그의 바둑돌인 셈이지.”
이때 남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우리 세 사람 역시 그의 계산 안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자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남자가 엽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건 나도 모른다. 만약 알았더라면… 내 진작 놈의 몸뚱이를 토막 내 버렸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