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827
827화 마지막 자존심
그의 몸 안에서 돌연 강대한 기운이 폭발해, 사방을 마치 파도처럼 순식간에 뒤덮었다. 이에 그가 있던 성역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명경(命境)!
바로 이때, 엽현 앞에 진노인이 웃으며 나타났다.
“축하한다.”
그러자 엽현이 눈을 번쩍 뜨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몸을 돌아본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자, 전신에 흐르는 단단한 기운이 느껴졌다.
명경!
엽현은 그제야 명경이란 말에 숨겨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명경이란 단순히 운명을 느끼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이는 마치 수십 년에 불과한 인간의 수명이 수련을 통해 백 년,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까지 연장되는 것과 같다.
즉, 스스로 운명을 통제하지 않으면 그 인생은 운명에 통제돼 버리고 마는 것이다.
명경…….
엽현이 주먹에 들어간 힘을 풀자, 체내에서 요동치던 기운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축하한다.”
엽현은 연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앞에 와 있는 진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엽현, 네 현재 실력은 거의 파도경 강자에 필적하겠구나.”
파도경.
“희황의 경지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다만 파도경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
“그럼 양계천에 파도경 강자가 있습니까?”
“매우 드물지만 두 명 정도가 있긴 했다. 다만 매우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구나.”
파도경.
이는 사유계 전체를 통틀어도 극소수에게만 허락됐던 경지였다.
엽현이 무언가 더 질문하려던 이때, 갑자기 장벽 쪽에서 이상한 진동이 감지됐다.
이에 엽현 등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의 시선 속에 장벽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부문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이지?
장내 모든 무인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이때, 연천이 무거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좋지 않다. 누군가 금제를 벗겨내고 있다.”
“금제를 제거한다고? 선각자가 설치한 금제를 누가 없앨 수 있지?”
엽현의 말에 연천이 장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분명… 우리 쪽 사람이다.”
우리 쪽 사람?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연천, 알아듣게 좀 설명해줘!”
“만유학부를 말하는 것이다. 주인이 설치한 금제를 힘으로 파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휘하에 있던 만유학부에는 금제를 해제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그럼 지금 일을 벌이고 있는 게 만유학부인지 뭔지 하는 세력이란 말이야?”
“하…….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들 중 첩자가 있어 외부에 팔아넘긴 것일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좋은 일 아니오?”
가만히 듣고 있던 진노인이 말하자, 연천이 그를 흘겨보았다.
“멍청하긴! 오유계와 사유계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아느냐? 둘 사이에는 두 개의 차원이 겹칠 때 생기는 차원의 회오리가 존재한다. 만약 저 장벽이 무너지게 되면 이 힘은 곧장 사유계 전체로 쏟아지게 될 것이다. 물론 너희와 같은 자들은 버틸 수 있겠지만, 나머지 생령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단 말이다!”
연천의 호통에 진노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도 연민의 감정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유계의 다른 생명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터놓고 말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누군가는 이기적이라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처음부터 부모도 아닌 그들이 사유계를 위해 헌신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도 장벽의 부문들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와 함께 점점 많은 강자들이 장벽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희황과 산귀도인 역시 이 틈에 섞여 있었다.
이들은 부문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부문이 사라진다는 의미는 곧 그들이 오유계로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장벽에는 붉은 부문 하나만인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두 차원 사이를 막고 있던 장벽도 대부분 투명해진 상태.
“저것만 없어지면 드디어 오유계로 갈 수 있는 건가?”
“드디어 꿈에만 그리던 오유계로 간다니… 믿을 수가 없구만…….”
모두가 흥분해서 한 마디씩 던지던 이때였다.
“안 돼!”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연천이 모두의 앞에 섰다.
“저 부문을 파괴하면 물론 오유계로 갈 수 있긴 하다. 다만 그 순간 사유계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만다. 사유계 모든 생령이 전멸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무리 중에 한 중년인이 소리치자, 연천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유계로 가는 것이 전부인 이들에게 사유계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각자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살아갈 뿐, 누가 누구를 비난한단 말인가?
바로 이때, 웬 중년인 하나가 튀어 오르더니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붉은 부문에 일장을 날렸다.
쾅-!
마침내 부문이 박살 난 이때, 정면의 공간이 열리면서 중년 남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인을 본 순간 엽현 곁에 있던 연천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진천!”
상대는 다름 아닌 만유학부의 원장, 진천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몰려든 무인들을 바라보던 진천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대들이 오유계로 넘어오기 위해선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소.”
해야 할 일?
모두가 진천의 입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그가 돌연 손을 들어 엽현을 가리켰다.
“저자를 죽이고 목을 가져오시오. 그러면 오유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겠소!”
엽현을 죽여라!
그 말을 듣자 장내에 몰려든 무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엽현을 죽이면 길을 내주겠다고?
이는 흔히 말하는 차도 살인이 아닌가!
진천의 의도는 바로 엽현과 사유계 무인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겠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온 무인들은 하나같이 잔뼈가 굵은 자들이니만큼 진천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한 자는 없었다.
이때 엽현이 진천을 향해 소리쳤다.
“보아하니, 네 목적은 나인가 보군?”
이에 진천이 웃으며 엽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어쩔 텐가?”
“네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 물건이겠지?”
엽현이 손을 펼치자, 그의 손위에 계옥탑이 떠올랐다.
“원하는가?”
“…….”
이때 엽현이 가볍게 웃으며 계옥탑을 집어넣었다.
“너 같이 속이 시커먼 놈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다.”
“하하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진천이 사유계 강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그대들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기회일 것이오. 누구든 놈을 죽이기만 하면 오유계로 들여보내 주겠소!”
엽현을 죽여라!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엽현이 쉬운 상대였더라면 두말하지 않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엽현이 호락호락한 상대인가?
게다가 과연 저 처음 보는 자의 말은 믿을 만한 것인가?
혹시 엽현과 자신들이 양패구상하게 한 다음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건 아닐까?
바로 이때 산귀도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는 오유계로 가고 싶은 것뿐이오. 다른 생각은 없으니 비켜 주시오.”
“하하, 하지만 그대들은 사유계에서 태어나지 않았소?”
“사유계 사람은 오유계로 가지 못한다는 법이라도 있소?”
“물론 그렇진 않소. 다만 금제를 푼 것이 나이니만큼, 그대들을 들여보낼 권리는 내게 있다는 말을 하고 싶구려!”
“그러나…….”
“그만! 나는 시간이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니오. 후회하기 싫다면 그대들도 시간 낭비하지 마시오!”
그 말에 산귀도인을 포함한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이때 진천이 엽현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살다 보면 힘이 전부인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가진 패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지. 너는 무슨 패를 보여줄 테냐?”
“후후……. 지금이라도 계옥탑을 준다면 날 보내주겠는가?”
“하하하! 꿈도 야무지구나. 검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는 법. 내가 아는 검수는 결코 남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또한, 미리 경고하는데 쓸데없는 암수를 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절대적인 힘 앞에선 어떤 계략도 먹히지 않을 테니까.”
“암수라……. 그거 재밌군. 그나저나 왜 그녀를 먼저 찾아가지 않은 거지?”
엽현이 말한 그녀란 물론 천녀였다.
이에 진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네가 더 죽이기 쉬우니까.”
그 말을 듣자 엽현은 진천이 다른 자들처럼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진천이 산귀도인 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찌,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았소?”
이에 산귀도인이 대표로 소리쳤다.
“우리는 그대의 제안을 거절하겠소!”
첫째, 엽현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둘째, 설령 그를 죽이고 목을 벤다고 하더라도, 진천이 약속을 지킬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진천 등은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자 진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하시오.”
말을 마친 진천이 돌연 손을 펼치더니 아래를 향해 내리눌렀다. 그러자 그의 뒤편의 공간이 열리면서 강대한 기운이 밀물처럼 흘러들기 시작했다.
이는 연천이 말한 두 차원 사이에 갇혀 있다는 그 힘이었다.
순간 무인들의 표정이 크게 어두워졌다.
이 힘은 사유계의 공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대는 정녕 사유계를 멸절시킬 생각인가!”
“내가?”
산귀도인의 외침에 진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은 바로 하시오! 금제의 마지막 부문을 파괴한 것은 바로 그대들이 아니었소? 사유계를 멸망케 한 것은 바로 그대들이란 말이오!”
바로 이때, 진천의 뒤편에서 이번에는 기이한 검은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간 공간은 그대로 허무로 변해 완전히 사라졌다.
검은 기운의 힘을 느낀 순간 무인들의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만약 저것이 사유계로 흘러 들어간다면 사유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 아닌가!
“하하하! 표정들이 왜 그런가? 이것이 너희가 원했던 결말 아니었나?”
양계천 무인들을 비웃던 진천이 엽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엽현, 내 특별히 한 번의 기회를 주도록 하마. 만약 지금이라도 탑을 내놓는다면…….”
“탑은 개뿔! 이거나 먹어라!”
진천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 엽현이 그를 향해 빠르게 솟구쳤다.
이에 진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일권을 방출했다.
쾅-!
연천의 주먹이 날아오던 검광을 가볍게 튕겨낸 순간, 그의 미간 사이에 붉은 글씨로 ‘囚(수)’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이를 느낀 진천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천 장 밖에 모습을 드러낸 진천은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엽현을 노려보았다.
“놈! 결국 계옥탑을 굴복시킨 것이냐!”
엽현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산귀도인 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분! 우리가 오유계로 가야 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이를 위해 남에게 무릎까지 꿇을 순 없소!”
엽현의 말을 듣자 장내의 모든 무인들은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적으면 수천 년, 어떤 자들은 이미 수만 년을 강자로 살아왔는데 어찌 자존심이 없겠는가? 어찌 기개가 없겠는가?
오유계로 가서 무의 한계를 넘어서고 영생을 얻는 것은 모두가 바라마지 않을 일이다.
다만 그것을 위해 굴욕적인 자세를 취할 수는 없다.
아무리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도 그 대가로 존엄을 잃는다면 개와 다를 바가 무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