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842
842화 인생은 도박이다
이게 무슨 의미지? 혹시 나를 받아들인다는 뜻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여진무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내 진정한 그는 고개를 숙여 탑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때 계옥탑이 무슨 의사를 표시하기라도 하듯 재차 몸을 떨어댔다.
“혹시,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인 게냐?”
계옥탑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이를 보자 여진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설마하니 탑이 자신을 주인으로 여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진무의 눈빛이 마구 흔들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탑의 주인이 된다면 그것은 곧 만유학부를 반역한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순식간에 오유계 전체의 공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탑을 원하는가?
그의 머리는 결단코 ‘아니오’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선각자의 보물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진무는 차마 한 쪽을 결정할 수 없어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꿀 만한 선택이 눈앞에 주어진 것이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이때였다. 계옥탑이 여진무의 손에 내려앉더니 마치 아양을 떨 듯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이는 명명백백 주인이 되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한참을 계옥탑을 응시하던 그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일각이 지난 후, 여진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래, 때때로 인생은 도박인 것이지!”
마침내 결심을 내린 그는 계옥탑을 낚아채듯 쥐고는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이는 만유학부와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한편, 어둠 속에 있던 엽현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수정 구슬을 품 안에 넣었다. 이 구슬 안에는 조금 전 여진무가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 전부 기록돼 있었다.
[교활한 녀석. 어쩌다 너 같은 놈이 검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연천의 말에 엽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쟤들도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아무리 그래도 실력보다 잔머리가 좋은 건 문제가 있지 않느냐?]“아, 알았어. 알았다고.”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젓던 엽현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연천, 오유계의 경지는 어떻게 구분 짓지? 사유계와 비슷한가?”
[물론 아니다. 이곳의 경지는 사유계보단 훨씬 더 복잡하다.]“그래? 자세히 알려줘.”
[이곳의 경지는 가장 먼저 원경(元境)으로 시작한다. 입건곤(立乾坤)하는 건곤경, 음양(陰陽)경, 생사(生死)경, 파천기(破天機), 인과(因果)경 그리고 윤회(輪迴)경으로 이어진다. 사유계에서 파명경에 속하는 너는 경지의 단계로 엄밀히 말해 건곤경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전투력만을 판단하게 되면 양음경 정도는 될 것이다.]“입건곤이란 뭘 뜻하는 거지?”
[건은 하늘, 곤은 땅, 즉 천지를 뜻한다. 입건곤이라 함은 네가 이 천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영기나 공간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알고, 만물의 본질을 깨달은 상태다. 즉, 건곤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지. 하지만 너의 검도 조예와 천주검, 진혼검 기타 혈맥 등을 고려해 본다면 너는 이곳의 음양경 강자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생사경 강자부터는 네가 함부로 할 수 없으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진천의 경지는 어디지?”
[최소 파천기.]“그럼… 천녀 누님은?”
천녀!
순간 연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
[그녀는… 스스로의 인과를 끊어버릴 정도이니 최소… 아니, 그녀의 경지를 가늠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법칙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를 어찌 경지로 판단한단 말이냐? 아무튼 한 번만 더 곤란한 질문을 했다간 걷어차 버릴 테니 조심하도록 하거라.]“…….”
연천이 말을 이어갔다.
[기억 하거라. 경지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는다. 너만 봐도 경지에 비해 전투력이 훨씬 높은 수준이지 않느냐. 물론 이는 혈맥과 각종 신물의 도움 때문이긴 하지만.]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차차 알게 되겠지만, 주사나 부사 등등을 만나면 절대 얕잡아 봐선 안 된다.]얕잡아 봐?
엽현은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적을 얕잡아 보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재촉하는 지름길이다. 엽현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게다가 그가 서 있는 곳은 오유계이니만큼 더더욱 상대를 얕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대화를 마친 엽현은 곧 자리를 떠났다.
오유계와의 전쟁은 이제 겨우 시작된 셈이었다. 엽현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 * *
오유계에는 학해애(學海崖)라는 만 장 높이의 봉우리가 있다. 이 깎아지를 듯한 봉우리 위에는 여러 채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만유학부다.
오유계 곳곳에 만유서원의 간판을 단 곳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총 본산 격인 만유학부는 단 하나뿐이다. 즉, 만유학부는 모든 만유서원 제자들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만유학부 내의 서전(書殿).
진천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손 안에 든 고서를 읽고 있었다.
이때 공간에 파문이 일더니 노인 하나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무가 사라졌습니다.”
“…탐심이 동한 건가?”
“그렇습니다. 애당초 진무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제 불찰이 큽니다.”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의 성격을 모르겠는가. 진무는 이런 유혹에 쉽게 흔들릴 녀석이 아니거늘.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엽현 그 교활한 놈이 탑을 순순히 바친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놈의 간계에 걸려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흠…….”
“그리고 제 생각대로라면 놈은 아마도 이 오유계 어딘가에 와 있을 것입니다.”
“후후, 제법 수를 읽을 줄 아는 녀석이야. 재밌군.”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우선 은밀하게 진무를 찾거라. 계옥탑이 만유학부에 없다는 것을 다른 이가 눈치채게 해선 안 된다.”
진천의 의도를 깨달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계옥탑이 진무에게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수한 자들이 진무를 찾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되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노인이 떠나고, 진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ㄴ의 정면에는 한 장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천녀의 화상이었다.
“후후, 그대는 바둑을 즐겨 둔다던데……. 어디 대국이 시작되었으니 재밌게 놀아 봅시다. 그대가 엽현이란 돌을 지킬 수 있는지 두고 보겠소.”
* * *
청산성.
이 작은 성은 어느 세력에게도 속하지 않은 오유계의 작은 성이었다.
이날 한 남자가 성을 방문했다. 다름 아닌 엽현이었다.
성 안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거점 도시가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성을 둘러본 엽현은 오유계의 풍경이 사유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덧 성 중앙에 이른 엽현.
성 초입보다 다소 번화한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인들이었다.
길 한복판에 우뚝 선 엽현은 돌연 수정 한 알을 꺼내 들었다.
이때, 수정이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더니 하늘 전체에 어떤 화면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이 화면 안에는 여진무가 계옥탑을 들고 고민하는 것부터 사라지는 장면까지 모든 상황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그의 음성도 포함이었다.
성을 오가던 사람들은 저마다 할 일을 놓고서 공중의 화면을 쳐다보기 바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엽현은 군중 사이를 뚫고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바로 이때, 엽현이 자리에 멈춰 섰다.
순간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오른편에서 날아들었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
엽현이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남장을 한 여인이었다.
여인의 검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잠시 상대방을 바라본 엽현은 아무 말 없이 장내를 빠져나갔다.
인파 사이로 모습을 숨긴 엽현을 바라보며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재미있군.”
* * *
한편, 성 밖을 나선 엽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는 더 이상 같은 자리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여진무에게 계옥탑이 있다는 소문은 빠르게 오유계 전체로 퍼져 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추적하기 시작하면 엽현의 목표는 성공인 셈이다.
성을 떠난 엽현은 근처의 작은 숲으로 들어왔다. 이때까지도 정체 모를 여인은 그를 쫓고 있었다.
미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주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깊은 산골에 이른 엽현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제법 사람 죽이기 괜찮은 곳을 골랐군요?”
여인의 음성에 엽현이 뒤돌아섰다.
“그대는 누군데 날 쫓는 것이오?”
“소녀는 하후옥(夏侯瑾)이라 합니다. 공자께서는 어느 집 자제이신지요?”
“…그보다 왜 나를 미행 한 것이오?”
“미행이라 하기엔 제가 저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았던가요? 엽 공자.”
여인의 말에 엽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앞의 여인은 과연 누구이기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단 말인가?
여러 말 할 것 없이 엽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간 살기가 스멀스멀 몸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호호, 공자께서는 소녀를 죽여 입을 막을 생각인가요?”
“…….”
“엽 공자, 내가 그대를 두려워했다면 과연 이렇게 대 놓고 따라 왔을까요? 게다가 소녀는 만유학부 출신도 아닐뿐더러, 공자의 적은 더더욱 아닙니다.”
“대답하시오. 어떻게 나의 신분을 알아낸 것이오?”
엽현은 이 점이 매우 궁금했다.
이에 하후옥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가의 이운기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릴 듣긴 했으나, 계옥탑을 이리 가볍게 찾아올 만한 능력은 없습니다. 즉, 이는 엽공자가 고의로 탑을 넘겨주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소?”
“공자의 뒷조사를 조금 해 보았습니다. 그 작은 세가에서 나와 지금까지 이르도록 생존해 온 점… 어찌 보통 사람이겠습니까? 하물며 공자의 실력은 분명 이운기 등에 비해 월등할진대 이리 쉽게 탑을 포기했다는 점이 매우 의심스러웠습니다. 하여 이 모든 것은 공자가 스스로와 사유계를 보호하기 위해 꾸민 짓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지요.”
엽현은 속으로 상대의 추리에 감탄했다.
이때 하후옥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공자가 탑을 통해 만유서원을 농락한 점은 정말이지 대단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계옥탑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탑의 주인이 된 듯한데, 이것 역시 높이 살만한 점이지요.”
엽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아귀에는 어느새 한 줄기 검광이 들려 있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의 안위에 위협을 주는 존재라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후옥은 검광을 보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