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844
844화 긴말하지 않겠소
말을 마친 하후무 등 두 사람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혈제는 공기를 양껏 들이켜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쉽구나.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 * *
“아버지, 정말 혈제의 말대로 하실 건가요? 엽현을 건드렸다간 우리 역시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 것이에요.”
이동하는 중에 하후옥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방법이 없구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혈제의 다리를 부여잡는 것뿐이란다.”
“하지만…….”
“옥아, 너는 이 길로 하후가를 떠나거라.”
“아버지?”
하후옥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하후무를 바라보았다.
“우리 하후가는 이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그래선 안 된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하후옥은 침묵했다.
“조금 전 엽현을 만났을 때, 분명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탑과 도칙을 부리는 자……. 적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위험한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혈제의 봉인을 푼 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번이 우리 하후가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잠잠히 듣고 있던 하후옥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계옥탑이 다시 오유계에 나타났으니 선각자 역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선각자!
그의 이름을 듣자 하후옥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비록 같은 시절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선각자에 대해 익히 들어 본 터. 그가 오유계에 있었을 때는 질서와 공정함이 살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변했지만.
즉, 강한 자가 진리요 도리인 시절인 것이다.
하후옥이 고개를 흔들고는 하후무를 바라보았다.
“그럼 아버지, 부디 보중하십시오.”
하후무와 작별을 마친 하후옥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사라졌다.
하후옥은 자신이 떠나야 하는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하후가의 도박이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실패했을 땐 그녀가 하후가를 재건할 마지막 씨앗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침내 하후옥의 모습이 하늘 너머로 사라지자, 하후무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근심이 가득했다.
* * *
하후가를 떠난 엽현은 한적한 곳을 찾아 몸을 은신한 후 곧장 조금 전 얻은 주황색 부적을 꺼내 들었다.
“연천, 이건 무슨 부적이지?”
“힘의 부적이다. 한 번 써보거라.”
“음… 사용법은?”
“간단하다. 신식을 주입하면 부문이 활성화될 것인데, 그러면 네가 부적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엽현이 연천의 말을 따라 부적에 신식을 주입했다. 그 순간 부적이 돌연 한 줄기 빛으로 변해 그의 팔 안으로 스며들었다.
쾅-!
순간 엽현의 한쪽 옷자락이 불에 그슬려 재로 변했다.
엽현은 천천히 자신의 주먹을 쥐어 보았다. 그러자 바다와 같이 끝을 알 수 없는 강대한 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힘은 이미 그의 육신의 힘을 초과할 정도였다.
처음으로 부적의 힘을 경험한 엽현은 순간 자신이 무적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 힘이라면 파명경 강자 정도는 일권에 박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는 하품 부적에 불과하다. 만약 상품이나 극상품 부적을 사용한다면 그 위력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대단해… 대단해! 하지만 역시 이 힘 역시 결국 외물일 뿐이니 너무 의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어.”
“하하, 이제 뭔가 좀 아는구나! 기특하구나!”
“하하하! 자 그럼 슬슬 여장로를 만나러 가 볼까!”
엽현은 부적을 갈무리한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한편, 엽현이 수정 구슬로 여진무의 행동을 낱낱이 밝힌 이후, 많은 무인들이 여진무를 찾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게다가 그가 계옥탑을 탈취해 어디론가로 도망친 사실 역시 오유계 전체가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여진무를 잡는 자가 계옥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그를 찾기 위해 오유계 전체를 뒤지고 있는 사이, 엽현은 계옥탑과의 감응을 통해 쉽게 여진무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때의 여진무는 어느 깊은 숲속의 동굴 안에 기운을 감춘 채 꽁꽁 숨어 있었다.
엽현은 곧장 동굴 안으로 들어가 여진무의 근처로 다가갔다. 물론 여진무는 공명경에 있는 엽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동굴 깊숙한 곳에 앉아있는 여진무는 손 안에 계옥탑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계옥탑.
선각자의 신물.
“우선 탑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여진무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선혈 한 방울이 탑 위에 떨어진 순간, 계옥탑이 화답이라도 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를 보자 여진무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러나 바로 이때, 동굴 입구에서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공명경에 있던 엽현이 기이한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직 위치를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누가 벌써 여진무를 찾아냈단 말인가?
강자의 기운을 느낀 여진무 역시 황급히 계옥탑을 숨겨놓고 입구를 주시했다.
이때, 동굴 입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니, 동굴 주변의 산이 모두 가루로 변해 여진무의 모습이 허허벌판 위에 노출됐다.
돌가루와 먼지가 가라앉자 여진무의 정면에 흑의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을 검은 옷으로 가린 흑의인의 몸 주위에는 어떤 신비한 힘까지 흐르고 있어 그의 용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여진무가 무거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대는 누군데 감히 만유학부의 장로를 건드린단 말이오!”
이에 상대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만유학부? 탐욕에 눈이 멀어 탑을 갖고 도망친 주제에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그, 그걸 어떻게!”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고?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노부가 어찌 모르겠느냐? 여진무,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만약 순순히 탑을 내놓지 않는다면…….”
바로 이때, 여진무가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상대와 맞설 순 없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 지면 다른 자들이 더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채 몇 걸음 떼기도 전, 또 다른 노인 하나가 나타나 그의 앞길을 막았다.
여진무가 무어라 소리치려는 순간, 노인이 오른손 손바닥을 펼쳐 아래로 내리눌렀다.
쾅-!
그 순간, 여진무가 있던 공간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 있던 여진무는 영혼도 건지지 못하고 순식간에 소멸돼 버렸다.
초살!
어둠 속에서 이를 지켜보던 엽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진짜 거물이 출현한 것이다.
엽현은 오유계에서 계옥탑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렇게 빨리 이런 괴물급 인사가 나타나다니!
엽현은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여진무를 단숨에 죽인 강자라고 하기엔 다소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이때 노인이 손을 펼치자 계옥탑이 손바닥 위로 떠 올랐다.
“이런 신물을 가져가 봐야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혼잣말을 하던 노인이 정면의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흑의인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엽현이 속으로 물었다.
[연천, 저 괴물은 도대체 어떤 경지인 거야?] [한 번의 손짓으로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지울 수 있는 자, 그렇다면 최소 생사경일 것이다.]생사경!
엽현은 침묵했다.
그는 이 오유계에서 생사경이 끝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 먼 하늘로부터 강대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노인 역시 하늘을 응시했다.
“원목창(元木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흰옷을 입은 노인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을 막은 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만유서원의 총괄 사부 원목창이었다. 전체 만유서원의 무원을 총괄하는 그는 지위만 놓고 본다면 만유서원 삼인자라 할 수 있는 고위급 인사였다.
하지만 그런 원목창을 앞에 두고도 노인은 아무런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노인의 손에 있는 계옥탑을 응시하던 원목창이 먼저 운을 뗐다.
“만유서원은 그대 제가(齊家)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 줄 알았거늘…….”
“하하하! 나 역시 만유서원과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진 않소.”
“…그렇게 말한다니 우리 만유서원의 보물을 돌려주길 바라오.”
그 말에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원목창, 그대는 이 탑이 그대 만유서원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오?”
“그럼 아니겠소?”
“훗, 내가 알기론 계옥탑의 주인은 선각자이지 그대들 만유서원과는 하등 관련이 없소. 그러니 원주인인 선각자가 사라진 이상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 아니겠소?”
원목창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인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두려움 없이 말을 이어갔다.
“만약 선각자가 있었다면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공손히 돌려주었을 것이오. 하지만 다른 이가 와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너무 파렴치하지 않나 싶소만?”
제가(齊家).
오유계에도 몇몇 강력한 무력을 지닌 세력들이 존재한다. 이 제가 역시 그중 하나로 보통의 세가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주황색 부적을 제조할 수 있는 강력한 부문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유계에서 이 정도 되는 부문사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단순히 유능한 부문사이기만 했다면 만유학부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부문종의 장로라는 것이었다.
부문종(符文宗)!
이는 아무리 만유학부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대 세력이었다.
선각자가 있었을 때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부문종의 창시자에게 부문도(符文道)를 전수해 준 것이 바로 선각자였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해 부문종 창시자는 선각자의 제자인 셈이었다. 비록 선각자는 이를 인정하진 않았지만, 부문종의 창시자는 줄곧 자신을 선각자의 제자라 칭해왔다.
다만 선각자가 실종된 후 만유학부와 부문종의 관계는 그렇게 좋다고 볼 순 없었다.
노인의 말을 들은 원목창은 여러 가지 변수를 가늠한 후 곧바로 출수하지 않기도 결정했다.
“제무(齐武), 그대 역시 지혜로운 자이니만큼 이 일에 어떤 배후가 개입해 있다는 것을 알 것이오.”
그 말에 제무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그러나 흉수가 누구이든 간에 우리 제가와는 무관하오. 왜냐하면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대들 만유서원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하지만 물건이 제가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오.”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소. 계옥탑은 충분히 목숨을 걸 가치가 있으니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원목창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는 긴 말 하지 않겠소.”
말과 동시에 원목창이 달려들었다.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원장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소!”
제무의 응전으로 두 사람의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