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863
863화 내가 눈앞에 있지 않느냐?
사실 그는 애당초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종문이 사라진 충격에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이 잦아든 지금,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품게 된 것이다.
수라여제가 엽현의 동생이라니!
현천책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엽현!
그에게 있어서 급선무는 바로 파괴된 단전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엽현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망해버린 천책종을 재건하기 위해선 기댈 언덕이 필요했다. 그럴 수 있는 자는 엽현 뿐이었다.
만유서원은 그들의 희망이 될 순 없었다. 이미 이용가치가 사라진 자신을 그들이 도와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결국 천책종을 되살리기 위해선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수라여제의 혈육인 엽현보다 적격인 자는 없다는 것이 현천책의 생각이었다.
* * *
부문종.
천책종이 멸망했다는 소식은 곧 부문종에게 까지 들려왔다. 이 소식을 듣자 부문종은 충격에 휩싸였다.
천책종이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만한 세력을 단숨에 무너뜨릴 정도의 세력은 오유계 내에서도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부문전.
한참 동안 고민하던 심성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류웅,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인 해 보거라.”
“그렇지 않아도 이미 사람을 보내 놓았습니다. 하지만 천책종을 단숨에 먼지로 만들어 버릴 강자라면… 그가 원하지 않는 이상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음… 그건 그렇군.”
자리에서 일어난 심성하가 창가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걱정의 기색이 역력했다.
“사조께서는 잘하고 계실는지 모르겠구나.”
엽현!
아닌 게 아니라, 엽현에 대한 그의 근심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조가 약한 것은 아니지만, 오유계는 그야말로 와호장룡(卧虎藏龙)의 위험한 세상이지 않은가.
“참, 사유계에서 온 소칠이라는 여인이 곧 경지를 돌파할 것 같습니다.”
소칠!
“그래? 내가 한 번 가 봐야겠구나.”
류웅의 말에 심성하가 곧장 대전 문을 나섰다.
그들에게 있어 소칠과 안란수는 특급 경호의 대상이었다. 두 여인은 전투력이 떨어지는 부문종에게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엽현이라 해도 외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두 사람을 쉽게 꺾지 못하리라.
* * *
수라지옥.
천책종을 멸한 엽령이 차원문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뒤편에 서 있던 두 노인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주인, 만유서원 놈들이 감히 주인의 뒤를 캐려 한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명만 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수라철기군을 대동해 만유서원을 평정하고 오겠습니다!”
이때 엽령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내가 아니었더냐? 그러니 내가 직접 방문해 주는 게 예의겠지.”
이 말을 끝으로 엽령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만유서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천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다. 이는 선각자의 영향을 받은 습관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바뀌지 않은 습관이었다.
이때 진천이 문득 책을 내려놓고 한쪽을 바라보았다.
“엽현의 소식은 어찌 되었는가?”
진천의 시선이 향한 공간에 물결이 일더니 이내 노인 하나가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소매에 양손을 숨기고 있는 노인은 전신에서 음산한 기운을 방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진일몽이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만큼 조만간 기별이 있을 것입니다.”
진일몽, 그는 만유서원 육대존자 중 일인이었다.
“다른 다섯은?”
“그들은 여전히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원의 명운이 걸린 일이 발생한다면 응당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말에 진천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여쌍(余雙) 장로, 그들이 나서지 않는 것은 나 때문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에게 있어 선각자가 없는 만유서원은 만유서원이 아니기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다만 그들 중 일부가 은둔한 것은 선각자와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취한 부주의 원인도 있습니다.”
“후후, 그분께서 만유서원을 세운 것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만 있다면 재능도 배경도 상관없이 모두 받아들이셨지. 그러나 선생께서도 그들이 성장한 후, 만유서원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제자들이 오유계 전체에 널려있기에 만유서원이 그동안 초연한 위치에 있을 수 있던 것 아닙니까?”
“흥! 그것도 선생께서 있으실 때의 일이다. 당시야 모두가 선생의 말을 들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지 않았느냐?”
“…….”
여쌍은 이에 반박하지 못했다.
진천의 말은 사실이었다. 선각자가 존재할 때만 해도 오유계는 질서가 잘 지켜지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지금, 오유계는 점점 만유서원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설령 여부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만유서원을 지키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다른 세력들에 간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만유서원은 더 이상 선각자의 뜻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그럴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선각자가 없는데 누가 만유서원을 왕으로 여기겠는가!
“후… 사실 부주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각자가 사라진 후, 수많은 강자들이 만유서원을 등지고 떠나갔다. 진천이 어렵사리 부주에 오를 때 그의 경지는 고작 음양경이었다. 만약 다른 거대 세력들이 선각자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했더라면 지금의 만유서원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만유서원을 잘 이끌어 온 것은 분명하나, 최근 한 가지 실수를 범하셨습니다. 그건 바로 엽현을 적으로 삼은 일입니다. 엽현 하나 때문에 이미 많은 제자들을 잃었습니다.”
“…….”
“만유서원이고 부문종이고 엽현을 노린 대가로 많은 인명손실만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우리 만유서원도 이미 세속의 다른 세력들과 같이 이익 추구만을 위한 존재로 변모하였으니, 이는 결코 당초 선생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이미 계옥탑이 그를 주인으로 삼은 이상, 죽이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만에 하나 놈이 제 손으로 탑을 바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진천의 말에 여쌍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놈이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후…….”
진천은 머리가 지끈거린 탓에 두 눈을 감아야 했다.
“할 수 없다. 그놈을 살려 두었다간 만유서원이 앞으로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놈은…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
“…그렇지요. 한 번 적으로 삼은 이상 죽이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여쌍이 고개를 돌려 대전 밖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이미 그의 신형은 대전 밖의 허공에 나타나 있었다.
바로 이때, 만유서원 강자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멀리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마치 폭풍처럼 포악하게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천의 시선 속에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수라여제로 화한 엽령이었다.
갑작스런 엽령의 등장에 잠시 멍하니 있던 진천. 그 순간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황망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여제께서 어찌 이런 먼 곳까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엽령이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내리눌렀다.
쾅-!
그 순간, 진천의 머리 위 공간을 뚫고 나온 거대한 손바닥 하나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 기운만으로 상대를 압살시켜버릴 것만 같은 위력이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손을 보자, 진천이 황급히 양손을 번쩍 들었다.
콰쾅-!
모두의 시선 속에 진천이 뿜어낸 기운이 그대로 소멸되었다. 진천 역시 서전 깊숙한 곳으로 튕겨 날아갔다.
쾅-!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버린 서전. 먼지 속에서 모습을 보인 진천은 사방으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단 한 방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진천을 고고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엽령.
이때 한쪽에 있던 여쌍이 소리쳤다.
“여제, 이게 대관절 무슨……”
이때 엽령의 손이 허공을 때렸다.
쾅-!
폭발음과 함께 여쌍의 육신은 그대로 터져 나가버렸다.
이를 본 만유서원 무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단 두 번의 손짓으로 만유서원 최강자들을 박살 낸 것을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이때 여인의 만년설 같은 차가운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입을 열다니……. 몹시 건방지구나.”
이에 영혼만 남은 여쌍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때 엽령이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여쌍의 앞에 반쯤 투명한 손 하나가 나타나 그의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여쌍을 바라보는 엽령의 눈에는 여전히 어떠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무엄하게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건가?”
말을 마친 순간,
쾅-!
여쌍의 영혼이 순식간에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말 그대로 영혼이 단숨에 소멸한 것이다!
장내에 있던 만유서원의 무인들은 경악의 찬 눈으로 엽령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수라여제가 뭘 하려는 것인가? 설마 만유서원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작정인가?
정신을 차린 진천의 눈에도 의혹이 일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라여제가 왜 갑자기 나타나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미쳐버린 건가?
이 순간, 엽령의 소매가 다시 한번 펄럭였다.
그러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손 하나가 공간을 부수며 진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를 본 진천이 황급히 손을 위로 뻗자, 황금색 방패 하나가 그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솟구쳤다.
처음에 손바닥만 하던 방패는 순식간에 원래의 수십 배가량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거대한 손과 접촉한 순간 방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손바닥은 그대로 진천을 덮쳤다.
쾅-!
순식간에 지면에서 사라져버린 진천. 그가 있던 자리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가 존재할 뿐이었다.
다른 만유서원의 강자들 중, 아무도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눈도 감히 마주치지 못했다.
오유계 육대 강자인 수라여제를 향해 출수한다? 그것만큼 재밌는 농담은 또 없으리라!
이때 거대한 구덩이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잠시 후, 진천이 지면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이때 그의 몸은 걸레가 되다시피 찢어져,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상태인 것이다.
진천이 힘겹게 고개를 들여 엽령을 바라보았다.
“왜… 무엇 때문에…….”
“왜? 나를 찾은 건 네 놈이 아니었더냐?”
수라여제를 찾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가 언제 그대를…….”
말을 하던 진천이 불현 듯 품 안에서 한 장의 화상을 꺼내 들었다.
화상과 멀리 엽령의 모습을 번갈아 본 진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화상 안의 엽령과 수라여제의 모습이 판박이처럼 꼭 닮아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바로 이때, 엽령이 진천 앞에 나타났다.
“네가 찾고 있던 자가 눈앞에 있다. 자, 이제 어찌할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