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875
875화 내가 누군지 알아?
찰나의 순간, 그녀의 손 안에서 시뻘건 대낫 하나가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슈각-!
다음 순간, 엽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대낫이 번뜩인 순간, 사방에서 날아오던 뇌전들이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장문수의 뇌창 역시 뇌광을 일으키며 폭발한 것이다.
“하하하! 과연 명불허전! 어디 이것도 막아 보거라!”
어느새 공중으로 솟구친 장문수.
그녀의 손에 순간 한 자루 창이 나타났다.
“화천(划天)!”
푸캉-!
장문수의 손을 떠난 창이 그대로 하늘에 커다란 구멍을 내며 사라졌다. 다음 순간, 엽령 정면의 공간이 돌연 길게 찢어지면서 한 자루 창이 엽령의 얼굴로 떨어졌다!
이때 창에 깃든 멸천의 기운을 느낀 엽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번개처럼 엽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엽령의 앞에 나타난 엽현은 정면으로 날아오는 창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창의 위력은 그의 상상을 벗어 날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내가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침을 꿀꺽 삼키며 혈맥지력을 개방하려는 엽현.
이런 그의 뒷모습을 엽령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한편 그녀의 뒤편에 있는 두 노인들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바로 이때, 엽령이 가볍게 엽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비켜. 내가 한다.”
엽현이 채 반응하기도 전, 엽령의 손을 벗어난 붉은 대낫이 원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서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장문수의 창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엽령의 낫은 속도를 멈추지 않은 채 어디론가로 날아갔다. 낫의 진행 방향에는 다름 아닌 장문수가 서 있었다.
“하하하! 재밌구나!”
장문수가 여전히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며 눈을 감았다. 이 순간, 패도 넘치게 날아가던 붉은 대낫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를 본 엽령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뒤편에 있던 두 노인의 표정은 기이하다 할 만큼 일그러졌다.
“창혼차원(槍魂維度)! 대단하구나!”
한 노인이 깜짝 놀라며 소리치자, 엽현이 그를 향해 물었다.
“창혼차원이 무슨 뜻이오?”
노인이 엽현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저 여인과 그녀의 창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 그럼 오유계가 아니라 육유계에 있단 말이오?”
그 질문에 노인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연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말하는 차원은 오유계에 있는 다른 공간을 뜻하는 것이다. 공간은 두께와 겹으로 이루어진다. 오유계라 함은 다섯 개의 공간이 겹쳐져 있다는 뜻인데, 장문수가 있는 공간은 그중에서도 두 번째 공간, 즉, 이중차원(二重維度)이다. 게다가 그 차원 안에 자신의 창도(槍道)를 융합해 창혼차원이라는 독자적인 공간을 형성했으니, 노인들이 놀란 것이다.또한 이중차원은 우리가 있는 공간에 비해 밀도가 높은데, 바로 이 때문에 낫의 위력이 갑자기 줄어든 것이다.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이중차원에 있는 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할 수 있지.]
연천의 설명을 듣고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중차원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왕도는 없다. 먼저 높은 경지와,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수반 돼야 한다.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불가능하다.] [그럼 천녀 누님은 몇 번째 차원에 있어?] [또 시작이구나. 너는 대체 적당히란 걸 모르는 것이냐?] […….]바로 이때, 상공에서 큰 움직임이 일었다. 엽현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을 땐 붉은 낫은 완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엽현은 이번에는 엽령을 바라보았다. 엽령이 서 있는 공간은 온통 불투명해져 있었다. 장문수의 이중차원이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소 걱정스레 엽령을 지켜보는 엽현.
바로 이때, 엽령이 손을 뻗자 붉은 낫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 안으로 돌아왔다.
이 순간 붉은 낫이 다시 한번 번뜩였다.
핏-!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희미해졌던 공간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이와 동시에 장문수의 한쪽 뺨에 핏물이 튀었다!
장문수는 자신의 뺨에 흐르는 피를 가볍게 닦아내며 엽령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오유계 최후의 여제답군. 탄복했다. 그리고…….”
장문수가 엽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네가 이겼다.”
이 말을 끝으로 장문수가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 엽현이 주저하듯 엽령에게 말을 건넸다.
“령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던 거야?”
령아?
그 말을 듣자 두 노인 중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서려 했다. 하지만 이내 다른 노인에 의해 가로막혔다.
엽령은 그저 엽현을 응시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내 동생이 맞지? 그렇지?”
“…….”
엽현이 침묵하는 엽령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에 작은 나무 인형 하나가 나타났다.
인형은 바로 엽령을 조각한 것이었다.
이때였다.
“물러나 있거라.”
엽령의 말에 두 노인이 황급히 멀찌감치 자리에서 물러났다.
“따라와.”
이 한마디를 던져 놓고 엽령은 돌아섰다.
엽현은 황급히 엽령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곳 검은 문을 통과해 수라지옥의 영역 안으로 진입했다.
지옥 안에 한 발 내디딘 순간 지독한 기운이 엽현의 전신을 휘감았다.
꽤나 지독한 곳이군…….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은 그가 방문했던 곳들 중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었다.
엽령의 인도 하에 엽현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전진했다.
이때 검은 갑옷을 입은 무인들이 중간중간 나타나 엽령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차렸다. 이들의 기운은 만유서원 강자들과 비슷하거나 더욱 강했다.
[네 동생은 정말로 강하구나.] [어떻게 알아?]연천의 말에 엽현이 물었다.
[그녀는 조금 전 출수하면서 이중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고도 장문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아는 이가 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이다.]엽령이 강하다고?
그 말에 엽현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어쨌든 오빠인 그로서는 동생이 강해진 것에 대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지켜 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내가 볼 때 네 동생은 이미 삼중차원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정말 그렇다면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지.]이때 엽현이 엽령을 향해 물었다.
“령아, 너 삼중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어?”
“…가능하다.”
엽현이 무어라 더 질문하려 할 때, 엽령이 그의 말을 끊었다.
“오유계는 뭐 때문에 온 거지?”
“당연히 널 찾으러 왔지!”
이때 엽령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엽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다음은?”
이에 엽현이 엽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다음은 없어. 너는 내 동생이고 동생 곁에 오라비가 있는 게 당연한 거야.”
“…하지만 나는 이미 네가 아는 그 엽령이 아니다.”
이때 엽현이 갑자기 엽령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 순간, 사방에 있던 무인들이 엽현을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엽령이 반항하지 않는 것을 보자 감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네가 정말 엽령이 아니란 말야!? 설마 그동안 있었던 추억을 다 잊었단 말야!?”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누구긴 누구야! 내 동생 엽령이지! 소면 하나에 계란 올려 나눠 먹던 엽령이라고!”
엽령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동안 엽현의 얼굴을 바라보던 엽령은 오래전 기억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녀의 눈빛도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정체는 수라여제, 하지만 이와 동시에 엽령이기도 했던 것이다.
* * *
계옥탑 안.
연천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수라여제에게 엽령의 모습이 남아 있다는 걸 확신했다. 수라여제가 어찌하여 엽령의 모습으로 환생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일단 이것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너라.”
짧은 한마디와 함께 엽령이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엽현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지옥 심층부에 도달했다. 이곳은 사방에 검은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기둥끼리는 피처럼 붉은 쇠사슬들로 연결돼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위치한 검은 불꽃을 내뿜는 거대한 구덩이였다.
엽령이 등장하자 구덩이를 지키던 갑옷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거라.”
병사들을 일으켜 세운 엽령이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바로 진짜 지옥으로 가는 통로다.”
그 말에 구멍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엽현. 뱀의 혓바닥처럼 춤을 추는 검은 불꽃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임무는 바로 이곳을 지키는 것이다. 마침 지옥 안에 약간의 소동이 있어 살펴보러 가야 한다.”
“괜찮겠어? 오빠가 같이 가 줄까?”
“…….”
엽령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는 이때, 연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멍청한 놈! 눈치가 그렇게도 없느냐? 지옥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네가 따라간단 말이냐? 가서 수라여제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있으려고?] […….]이때 엽령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내려가 있는 동안 잠시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이곳에 침입하지 못할 테니, 지내는 동안은 안심하거라.”
그 말을 들은 엽현은 왜 엽령이 자신을 수라지옥으로 데려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엽현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려 했던 것이다.
“좋아, 네 말대로 할게! 그런데 령아, 여기 있는 동안 혹시 저자들이…….”
엽현이 사방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갑옷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대한 기운은 제아무리 엽현이라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들 중 일부가 밖으로 나간다면 지금의 만유서원 정도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감히 네게 불경할 짓을 하진 않을 테니까. 다만 저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는 일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 말고는 저들에게 지시나 부탁을 해도 상관없어?”
엽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로만 다루지 말거라.”
“하하, 물론이지!”
이때 엽령이 소매를 펄럭이자, 검은 영패 하나가 엽현 앞에 날아들었다.
“수라령(修羅令). 그걸 지니고 있으면 마치 나에게 하듯 너를 대할 것이다.”
수라령을 받아든 엽현.
이내 그의 시선이 검은 구덩이로 향했다.
“위험…한 건 아니지?”
“…….”
“령아, 조심히 다녀와…….”
이때 엽현은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엽령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자신이 그녀의 짐이 되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이런 마음을 읽은 엽령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오래전 네가 나를 위해 해 주었던 일들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령아, 오빠가 동생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거야. 충분하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마.”
“…….”
잠시 엽현의 눈을 응시하는 엽령.
“그럼 아무쪼록 무사히 지내도록.”
이 말을 끝으로 엽령은 검은 구덩이 안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