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895
895화 누가 얘를 이렇게 만든 거야?
장원을 떠난 엽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한가운데 주저앉은 그는 현재 소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죄다 펼쳐 놓았다.
천주검, 진혼검, 주천필, 만유경, 서계, 그리고 이모백에게서 받은 허령인까지. 현재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의 목록이었다.
이외에도 참선검호 등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유계에서 쓰기엔 위력이 약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신물들을 갈무리한 엽현은 이번에는 계옥탑을 소환했다. 손바닥 안에 기묘하게 떠 있는 검은 탑을 보며 엽현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탑을 포기할까?
사실 예전에는 탑을 포기할 생각을 해봤던 엽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계옥탑은 이미 그의 친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때 문득 엽현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도칙!
탑을 지키려면 결국은 도칙을 다 모으는 수밖에 없어!
바로 이때, 연천이 말을 걸어왔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염가와 아월이 이미 큰언니를 찾았지만, 여전히 몇몇 도칙들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이 네 명령을 들을지도 불분명한 상황이고. 그러니 지금 당장 네가 해야 할 일은 도칙을 찾는 것보다는 탑의 영지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어차피 도칙을 모두 모아도 탑이 잠들어 있다면 제 위력을 내지 못할 테니까.”
“영지를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서원.”
“음? 만유서원?”
“그렇다. 서원 내부에 ‘학해(學海)’라는 곳이 있다. 탑을 학해 깊은 곳에 놓아두면 저절로 영지를 회복할 것이다.”
“흠……. 그렇다면 장문수를 찾아가야겠군!”
계옥탑을 집어넣은 엽현은 지체없이 부문종 밖으로 나섰다.
바로 이때, 엽현의 앞에 웬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뉘시오?”
엽현이 묻자, 노인이 예를 차리며 대답했다.
“노부는 천책종의 종주, 현천책(玄天策)이라 하오.”
천책종!
현천책은 당시 만유학부 부주였던 진천을 도와 엽령의 위치를 찾아냈던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엽현이 처음 보는 현천책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엽 신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가져 왔소.”
“정보? 어디 말 해 보시오.”
엽현이 현천책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정보에 의하면 서영족과 적선성주 사이에 접촉이 있었다 하오.”
적선성과 서영족이!?
“그들이 이모백을 찾아갔단 말이오?”
“그렇소. 뿐만 아니라, 적선성에서 나온 자는 곧장 무진(無盡)의 땅으로 갔다 하오.”
“무진의 땅? 그건 또 어떤 곳이오?”
“오유계 남쪽에 있는 무진의 땅, 바로 태고족(太古族)이 위치한 곳이오.”
태고족!
“좀 자세히 듣고 싶소!”
엽현이 태고족이란 말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연천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내가 설명해주마. 당시 서영족이 몰락한 이후, 오유계에 세 개의 강대한 세력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바로 사영족(邪靈族), 이족(異族), 그리고 지금 말한 태고족이다. 이들은 원래 존재하던 선종(禪宗), 교종(教宗), 그리고 무국(武國)과 이인자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지. 아, 물론 일인자는 주인이 세운 만유서원이었다.”
“선종? 교종? 무국?”
엽현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자 연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선종과 교종은 주인이 등장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세력들이다. 그 신도들이 온 천하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주인이 등장한 이후 서서히 쇠락하더니, 결국 사람들의 눈에서 자취를 감췄지. 그리고 무국은 수라국과 동시대에 존재하던 국가로, 수라국처럼 강대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연천이 돌연 엽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시 수라기병이 두 번째로 강했다면, 가장 강했던 것은 무국의 장신기병(葬神騎兵)이라 할 수 있지.”
“수라기병보다도 더 강하다고?”
엽현이 깜짝 놀라 소리치자, 연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강한 게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장신기병 열기로 전체 수라기병을 상대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 당시 수라국이 사공(邪功)에 열을 올렸던 이유도 바로 무국이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장신기병이 한 번 출격하면 아무도 막을 자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강했던 자들이 왜 지금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거야?”
“그야… 주인이 모두 진압해 버렸으니까. 당시 주인에게 비협조적이었던 세력은 모두 변방으로 물러가 쥐죽은 듯 살아야 했다.”
“…….”
연천의 말을 들은 엽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실력만 있다면 그 사람이 무얼 말하든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 하지만 실력이 쥐뿔도 없는 자라면 아무리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돌아보는 이 하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엽현은 장문수와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 만유서원이 오유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각자가 옳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장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각자가 없는 지금, 그 누가 이치와 도리를 따지려 할까?
이치의 핵심은 다름 아닌 힘인 것을!
엽현은 문득 들고 있던 천주검을 바라보며 천녀를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
이치? 논하기 전에 머리가 잘려 나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녀에게 있어 이치란 자신의 검 앞에 모두 무릎을 꿇는 것이니까.
생각을 접어 둔 엽현이 다시 눈앞의 현천책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런 정보를 내게 흘리는 것이오?”
“…….”
잠시 주저하던 현천책이 엽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엽 신사, 부끄러운 일이지만, 노부의 바보 같은 실수로 인해 천책종 전체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소. 천책종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꼭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
“만약 그대가 나를 도와 종문을 재건해 준다면, 앞으로 영원토록 견마지로를 다 할 것이오!”
“흠… 도와주는 거야 어렵지 않소. 다만 한동안 그대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될 것이오. 이해하겠소?”
현천책은 물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엽현은 지금 천책종에게 자신만을 위해 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현천책이 우물쭈물 대꾸하지 않자 엽현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이 일이 끝나면 내 전력을 다해 천책종을 지원할 테니. 장래에 천책종은 부문종과 같은 거대 세력으로 탈바꿈할 것이오!”
“하지만 수라여제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인데 어찌…….”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소식이 어둡구려!”
현천책이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엽현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수라여제는 내 동생이오. 즉, 내가 말하면 그녀도 따를 거라는 뜻이오!”
동생!?
현천책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당시 그가 엽현의 동생을 수색할 때, 수라여제가 나와 천책종을 몰살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자신의 비술이 실패했다고 여겼었는데, 알고 보니 수라여제가 정말로 엽현의 동생이었다니!
“앞으로 우리 천책종은 그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말이 되겠소!”
“하하하, 그럴 것까지는 없소. 다만 지금부터 내게 이익이 되는 정보는 모두 알려 주시오. 특히, 서영족을 잘 감시해 주면 고맙겠소.”
“그러려면 돈이 좀 필요하오. 종문이 망해 알거지가 된 상황이라…….”
현천책이 딱한 표정을 짓자 엽현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문종으로 가서 달라고 하시오. 내 이름을 대면 흔쾌히 내어 줄 것이오.”
“그러도록 하겠소!”
현천책이 포권을 취한 후 재빨리 사라졌다.
오유계 최고 갑부인 부문종이 뒤를 봐 준다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엽령에게 종문이 멸망한 이후, 현천책은 천책종을 재건하기 위해 기회를 노려왔다. 그중에서도 부문종의 비호를 받고 있는 엽현은 종문 재건을 도와줄 가장 강력한 후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엽현은 돈 많은 부문종의 사조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현천책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엽현이 필요할만한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이와 같은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육대강자 중 하나인 수라여제가 엽현의 동생이라는 점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엽현과 수라여제가 뒤를 봐주게 된다면 천책종이 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만은 아니리라!
* * *
현천책과 헤어진 엽현은 곧장 만유서원을 찾았다.
그가 막 산문 앞에 도달했을 때,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다름 아닌 임소서였다.
임소서를 알아본 엽현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임소서, 오랜만이군. 안 본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는걸?”
임소서는 엽현을 잠시 응시하고는 말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엽현을 건들지 말라는 장문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같은 육대교존이라고 하나, 둘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 그 성격 또한 포악하기 그지없으니, 임소서로서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국면으로 보았을 때, 만유서원은 엽현과 손을 잡아야 하는 처지에였다. 더더욱 엽현과의 관계를 망칠 순 없었다.
장문수의 장원 앞에 도착한 엽현.
그가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 검은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엽 신사,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좋소!”
엽현이 흔쾌히 문 앞에서 한 발 떨어져 섰다. 흑의 노인 역시 마치 문지기처럼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엽현이 주변을 살피더니 노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그런데 육대교존이라면 여섯이어야 하는데, 나는 왜 넷밖에 보지 못한 것이오?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소?”
“그들은…….”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하는데?”
이때,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장문수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까지 단정하게 말아 올린 모습이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장문수의 등장에 노인이 황급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두 사람한테 뭐 볼일 있어?”
“하하하, 내가 볼일 있는 게 아니라, 너희 만유서원이 위기에 빠졌는데 어디 있나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소식 들어온 거 있나?”
장문수가 노인을 향해 묻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장 교존과 소 교존이 하고 있는 일을 마치는 대로 돌아오겠다고 연락을 보내 왔습니다.”
“진일몽 그놈은?”
“아직 찾는 중입니다.”
“반드시 잡아 와. 만약 오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그날로 제명에다가 사문에서 이름을 파버릴 거라고 전해! 나 장문수, 한다면 하는 거 알지?”
“하지만…….”
“하란 대로 해!”
“알겠습니다…….”
“여부자, 그 여편네는?”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 있는지 갈피도 잡지 못했습니다.”
“흥! 망나니 계집애. 언제까지 싸돌아다닐 생각인 거지?”
“…아마 그럴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정은 얼어 죽을 놈의 사정! 사문의 안위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망할 계집애! 혼자 잘 먹고 잘산다 이거지! 젠장!”
“…….”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만 더 거들었다간 눈앞의 여인이 폭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때 다행히도 장문수의 관심이 엽현에게로 넘어갔다.
“근데 넌 뭐 하러 왔어?”
“이것 좀 회복시키게 도와줘.”
엽현이 소매를 펄럭이자, 계옥탑이 장문수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계옥탑을 살펴보던 장문수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
“애를 누가 이렇게 병신을 만들어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