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896
896화 내가 바보로 보이냐?
계옥탑이 고자질하듯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검수? 네 배후에 있다던 그 검수를 말하는 건가?”
장문수가 엽현을 바라보며 묻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걸?”
“이 꼴통을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과연 대단하군!”
“…….”
“아무튼 탑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선 학해 깊은 곳에 있는 재기(才氣)를 주입해야 해.”
“재기?”
엽현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장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학(才學)의 기운이라고도 하지. 학해 깊은 곳에 이 재기가 뭉쳐 있어. 계옥탑도 이곳에서 태어나기도 했고.”
이때 엽현을 바라보는 장문수의 눈빛이 다소 진중하게 변했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놈은 태생이 고고하고 포악하게 태어난 까닭에 사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완전히 회복하게 되면 그땐 더 이상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괜찮겠느냐?”
바로 이때, 계옥탑이 무언가 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듯 난리법석을 치기 시작했다.
이때 장문수가 손을 들어 계옥탑을 후려쳤다.
퍽-!
“조용히 해! 어른들 얘기하는데 떠들어?”
“…….”
계옥탑이 다시 얌전해졌다.
“괜찮아. 회복하게 도와줘.”
엽현의 말에 장문수가 그를 돌아보았다.
“확실해?”
“확실하다!”
“일단 영지가 돌아오면 탑은 더 이상 네 통제에 따르지 않을지도, 아니, 어쩌면 너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는 거냐?”
“하하,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처음부터 나는 계옥탑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영지를 회복한 탑이 날 떠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설령 날 적으로 인식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이미 계옥탑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
엽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문수.
“꽤나 훌륭한 마음가짐이구나.”
장문수가 다시 탑을 엽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때 엽현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봐, 이참에 서옥을 열어버릴까?”
만유서옥을 개방한다?
이는 엽현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만유서원은 서원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은 그 열쇠인 계옥탑을 가지고 있다.
둘만 원한다면 서옥을 여는 건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그다음엔?”
“그다음은…….”
엽현이 말끝을 흐리자 장문수가 말을 잘라 들어갔다.
“만약 서옥을 열었을 때, 그 안에 우리를 무적으로 만들어 주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우린 다 죽은 목숨이다. 설령 여부자와 수라여제가 함께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세계 어딘가에 숨어 지내는 노괴들의 존재를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사부가 있었을 때야 신경 쓸 것 없었지만, 지금은 만유서원 전체가 똘똘 뭉친대도 서옥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이대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 방법밖에 딱히 떠오르진 않는군. 일단 서옥이 열리면 오유계 모든 무인들이 이리로 몰려들 텐데, 그에 대한 대책이 없지 않느냐?”
“후……. 어렵군, 어려워.”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계옥탑부터 회복시키자.”
말을 마친 장문수가 앞장서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엽현이 계옥탑을 들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
사유계, 어느 아득한 성공 한 복판.
소복 차림의 여인, 천녀는 천천히 어디론가로 이동하고 있다. 그녀의 주위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선인 인과선(因果線)이 빼곡하게 얽혀 있다.
어떤 선은 검을 들어 잘라내기도 했지만, 어떤 선은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관찰하기도 했다.
사실 그녀 정도 되면 인과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선을 잘라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엽현과 이어진 선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여인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중년인 하나가 공간을 뚫고 걸어 나왔다.
여인을 찾은 남자는 다름 아닌 ‘전’ 만유학부의 부주인 진천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남자는 마침내 여인을 마주 보고 섰다.
“오랫동안 찾아다녔소.”
“…….”
“그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소. 부디 날 실망시키지 않기를!”
음성이 떨어진 순간, 강대한 기운이 진천의 체내로부터 휘몰아쳐 나왔다.
진천이 기운을 방출한 순간, 성공 전체가 출렁였다.
그의 기운을 담아내기엔 사유계의 공간은 너무나도 연약했던 것이다.
눈앞의 여인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진천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그로 인해 사방의 공간은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여인의 안색은 평온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했다. 마치, 한 점 바람도 불지 않는 어느 적막한 호수처럼.
이때 천녀를 응시하고 있던 진천이 돌연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그를 대신한 강대한 기운이 파도처럼 천녀를 향해 들이닥쳤다.
열 장, 아홉 장, 여덟 장…….
마침내 다섯 장 앞에 도달했을 때, 돌연 진천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중차원!
진천은 이 일격에 모든 힘을 쥐어 짜냈다. 설령 막힌다고 하더라도, 여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던 것이다.
얼마나 강한지 보자!
진천의 일격이 막 적중되려는 순간, 천녀가 돌연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쿵-!
찰나의 순간.
반경 수십만 장 이내의 성공이 크게 흔들리더니, 경계 안에 있던 별들이 먼지처럼 터져 나갔다.
이때 여인의 앞에 가만히 멈춰 서 있는 진천.
천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속엔 의심과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 하지만 그대는 검수가 아니오?”
“…어리석긴. 벌레를 상대로 검을 낼 수야 있겠느냐?”
말을 마친 여인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진천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의 등 뒤, 진천의 육신이 조금씩 사라졌다.
멀리 떠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천은 비참한 마음이었다.
일생을 무도에 매진해 왔건만, 누군가의 눈에는 고작 벌레만도 못하단 말인가. 무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으랴.
비통하고 애통하도다!
장문수가 옳고, 자신은 틀렸다. 왜 처음부터 엽현을 노리려 했단 말인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 않던가? 왜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었는가!
이때 진천은 엽현에게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처음부터 저런 괴물이 배후에 있다고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애초에 적이 될 이유도 없었을 텐데.
잠시 후, 먼지가 된 진천은 그대로 어두운 성공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초연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 대한 후회와 원망을 품고 갔을 뿐.
한편, 다시 고요해진 성공 위.
천천히 걸음을 내딛던 여인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오유계.
이때 무언가 발견한 여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하늘의 별이 빛을 잃을 정도로 찬란한 미소였다.
“네가 있기에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말을 마친 여인은 다시 긴 치맛자락을 이끌며 어디론가로 나아갔다.
그녀가 움직이자, 무수히 많은 인과선들이 나풀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 * *
오유계, 만유서원.
엽현이 장문수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선각자가 창조했다는 학해였다.
두 사람이 학해 중심부에 도착했을 때, 장문수가 엽현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떨어뜨려.”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서 계옥탑을 꺼내 들었다.
이때 탑이 진동하자 엽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널 원래대로 만들어 주려는 거야.”
엽현이 손을 놓자, 계옥탑은 물속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바로 이때, 장문수가 돌연 주변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흥! 긴장하기는! 만유서옥 열 거 아니니까 호들갑들 떨지 마!”
장문수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본 엽현은 그제야 암중에 숨어 있는 기운들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와 있다!
“어느 세력에서 보낸 거지?”
“별의별 세력들이 다 섞여 있다. 서영족도 어딘가 와 있을 거다.”
“뭐해? 죽여 버리지 않고?”
“…하고 싶으면 네가 해. 난 뒤에서 응원하마.”
“장문수, 여긴 만유서원의 영역이잖아. 저들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주인 없는 것처럼 행세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이건 대놓고 너희를 무시하는 거잖아!”
장문수가 엽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너는 내가 바보로 보이냐?”
“에이 뭐 그런 말을 해?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겠어?”
순간 장문수의 표정이 다소 차가워졌다.
“잘 들어라. 수라국과 부문종, 그리고 우리 만유서원은 한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만 더 가당찮은 농간을 부리려 했다가는 동맹이고 뭐고 너부터 죽여 버릴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뜨끔한 엽현이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알았어. 다시는 이런 농담 하지 않을게!”
“후… 네게 화풀이 해봐야 뭐 하겠느냐? 내 살다 살다 만유서원이 이런 수모를 겪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한 때, 오유계의 패자로 군림했던 만유서원. 하지만 선각자가 실종된 이후, 그들은 더 이상 패왕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때 장문수가 낮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라는 말은, 저들이 탑을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다는 거야?”
“맞아. 그리고 계옥탑도 신경 써야 한다. 영지를 회복한 탑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아직 모르니까. 어쩌면 널 거들떠보지도 않을지 모르지.”
“그렇게나 거만하다고?”
“흥, 계옥탑은 원래 거만 그 자체였던 녀석이었다. 특히 아홉 도칙과 함께 있을 때는 여부자도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았지. 다시 말해 도칙과 영지를 회복한 계옥탑은 여부자조차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놈이 너를 주인으로 여길지는 잠시 후 알 수 있겠지.”
그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학해 깊은 곳을 응시했다. 혹시 탑이 자신을 떠나려 할 수도 있으니,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놓아야 했다.
“그나저나 엽현,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흠… 글쎄. 네가 보기에는 태고족, 사령족, 이족, 무족 중에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세력이 누구라고 생각해?”
“아무도!”
장문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엽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째서?”
“그들은 모두 사부 때문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과거가 있다. 그런 그들이 우리 쪽에 설 리가 있겠느냐? 만약 만유서원에 사부가 설치한 진법이 없었더라면, 이미 백 번은 쳐들어 왔을 자들이다.”
“흠…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
“오히려 서영족이 조건만 잘 맞춰 준다면, 서영족 편에 붙을 가능성이 높지. 마찬가지로 육대강자들도…….”
이때, 말을 하던 장문수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그들의 목표는 만유서옥……. 만유서옥을 차지하려면 먼저 진법을 깨트려야 하지. 즉, 그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진법과 여부자를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는 의미…….”
“네가 볼 때 저들이 언제 움직일 것 같아?”
이 질문에 장문수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곧!”
“…….”
엽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순간 서영족이 움직인다면 탑의 주인인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이때, 학해 깊은 곳에서 진동이 일더니, 수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엽현이 황급히 물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학해 깊은 곳엔 이미 거대한 회오리가 생성되어 있었다.
“이제 나오려나 보군.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