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939
939화 그저 벌레일 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엽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천녀가 무조건 더 강하다고 밀어붙이는 게 다소 우스웠던 것이다.
현와 역시 계옥탑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서로 자신이 아는 존재만을 말하고 있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층 존재 역시 계속해서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사실 누구의 인과가 더 지독한지를 알아봤자 딱히 써먹을 데도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요함.
이때 엽현이 속으로 물었다.
[구층 주민, 그대가 보기에 천녀와 선각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소?] […….]누가 들으면 동네 꼬마들 사이의 대화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질문.
[하하, 그대도 모르는 것이오?] [흠… 나 역시 이 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만, 딱히 무어라 답할 순 없구나.] [어째서 말이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둘의 진정한 실력을 모르지 않느냐. 게다가 둘의 강점 역시 다르니 제대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좀 자세히 말 해 보시오.] [선각자의 강점은 그의 해박한 지식에 있다. 공간, 차원, 시간, 윤회 등등, 세상에 알려진 대부분의 지식은 모두 그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들이다. 반면 천녀의 강점은… 그냥 말 그대로 무식하게 강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그녀의 일검 이상을 받아낼 수 있겠느냐? 그러니 둘이 진짜로 싸워보기 전에는 누가 더 강한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흠…….]바로 이때, 곁에서 가던 현와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길 보시오.”
엽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이수 한 마리가 보였다.
순간, 엽현의 눈빛이 돌연 어지러워졌다.
그의 앞에 있는 이수는 당시 자신의 앞에서 대붕과 싸웠던 그 거대 원숭이가 아닌가!
거대한 산과 같이 앞길을 막고 있는 원숭이를 보니 엽현은 자기도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저놈은 도대체 무슨 이수지?”
“여원(戾猿)이란 놈이오. 이곳에 있는 이수 중 아마 몸집이 가장 큰 녀석일 것이오.”
“그럼 실력은?”
그 질문에 현와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 여유 있는 모습에 엽현은 현와가 여원보다 강하리라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이때 여원이 현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무엇에 놀란 듯 흠칫한 여원은 현와 곁에 있던 소범을 발견하자 아예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길을 비켜 주었다.
이를 보자 엽현이 현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너의 위치가 여기선 꽤나 높은 모양이구나.”
이에 현와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평소라면 그저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오. 놈이 저렇게 얌전히 길을 내준 까닭은 우리가 천맥자와 함께 있기 때문이오.”
“천맥자가 그렇게 두려운 건가?”
“물론이오. 이곳에 있는 이수들은 감히 천맥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소. 비단 그녀의 실력이 고강한 이유 말고도, 우리들은 모두 예전의 그 천맥자 덕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기 때문이오. 비록 두 사람이 동일인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녀를 선대 천맥자의 후인으로 여기고 있소. 그래서 이곳 안에서는 누구라도 그녀의 체면을 살려줄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럼 이수경은 왜 소범을 죽이려는 거지? 이수경 역시 천맥자에서 탄생한…….”
이때 현와가 엽현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대 한 가지 착각하고 있군. 이수경이 죽이려는 것은 천맥자가 아니라 바로 그대요.”
“…….”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그녀가 천맥자를 건드릴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오. 천맥자는 이수경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이 되지 않는 동시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오.”
위협적이지 않으면서 위협적이다?
“그 말은 즉, 천맥자는 이수경과 특별히 이해관계가 없으니 평소에는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수경의 통제 밖에 있기에 결국엔 위험한 요소다, 뭐 이런 건가?”
엽현의 추리에 현와가 감탄의 기색을 보였다.
“바로 맞췄소. 지금 천맥자는 이수경의 가장 큰 위협으로 돌아섰소. 왜냐하면 이수경이 그대를 죽이려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천맥자이기 때문이오.”
“아니, 그 이수경이란 여자는 바보처럼 보이진 않던데, 왜 자꾸 날 죽이려 하는 거지? 혹시 내 몸에서 느껴지는 선각자의 기운 때문에 그러는 건가?”
“물론 그대를 선각자의 전인으로 생각하고 분풀이하려는 것도 있겠지만, 아마 그대 몸에 있는 어떤 물건이 더 큰 이유일 것이오.”
“음? 계옥탑?”
“…그 탑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것일 수도 있소.”
현와가 엽현의 복부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 모습을 본 순간 엽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계옥탑이 아닌 다른 물건이라면 혹시 만유서옥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이곳에 와서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서옥인데 도대체 어찌 알고 있는 거지?
그 문제는 차치하고, 만약 서옥이 이수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물건이라면 앞으로 자신의 신변에 더 큰 위협이 가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게 아닌가!
이때 현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이수경과 달리 우리는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그러니 당장은 그대와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소.”
“당장은?”
“후후, 인간의 말을 빌리자면, 이익 앞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소?”
그 말에 엽현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보아하니 이미 인간의 사상에 물든 모양이로군!”
“후후, 인간은 재밌는 종족이오. 어떤 때는 모두 똘똘 뭉쳐 어려움을 이겨내다가도, 또 돌아서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지 않소. 비록 태생이 약하고, 때때로 악독한 마음을 품고 있지만, 학습 능력이나 창조력에 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소. 아마도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이 우주에 문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보아하니 인간을 아주 미워하는 건 아닌 것 같군?”
현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이유가 없소. 앞서 말했든, 이 우주는 어느 한 종족만의 세상이 아니오. 비단 인간뿐 아니라, 생령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분쟁이 있기 마련이오. 바로 지금처럼. 그대가 보기에 우리가 밖으로 나간다면 얌전히 지낼 것 같소?”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엽현이 보기에 이수들이 오유계로 나간다면 오유계는 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다.
현와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를 하고 있소.”
엽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수가 강력하긴 하지만 개별로 움직인다면 인간에게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렇게 강한 이수들이 체계적으로 행동한다면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바로 이때, 현와가 자리에 멈춰 섰다.
“저길 보시오.”
엽현은 현와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거대한 산 위에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낸 궁전 하나가 보였다.
“저건?”
“직접 한 번 가 보시오.”
“음? 그대도 같이 가는 게 아닌가?”
“나 같은 이수는 저곳의 반경 천 리 안으로는 접근할 수 없소.”
“어째서?”
“그것이 강자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오.”
강자에 대한 존중!
엽현은 물끄러미 현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매우 진중한 것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과연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수 역시 강자를 존중하는 법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엽현이 소범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 아이는 괜찮은 건가?”
“그녀는 강하니까 상관없소.”
“그럼 나는?”
엽현의 질문에 현와가 곤란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인간. 내가 솔직히 말하면 그대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 그냥 입 다물고 있겠소.”
그 말을 듣자 엽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말은 자신이 형편없이 약하다는 뜻이 아닌가!
엽현은 군소리 없이 소범과 함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엽현과 소범, 그리고 검은 강아지가 현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로 이때, 현와의 곁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머리에 뿔이 달린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인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엽현 일행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믿기 어렵군. 천맥자가 신뢰하는 인간이라니.”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이수경은 뭐 하고 있지?”
“한창 부상에서 회복 중인 것 같다. 그리고… 지옥견과 대붕이 그녀를 찾아갔다. 아마 그녀에게 붙을 심산인 듯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봉인돼 있었건만, 아직도 그 정도 영향력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단 말이지.”
“그런데 정말로 저 인간을 믿어도 되는 건가?”
이 질문에 현와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더 좋은 방법이라도?”
“…….”
“결코 함부로 얕볼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왜 그리 생각하지?”
“천맥자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자가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지 않나.”
남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래.”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높이 떠 있는 궁전을 바라보았다.
“놈이 그의 전승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남자의 질문에 현와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을 뿐, 성공 여부는 본인이 하기에 달린 것이겠지. 그나저나 바깥의 상황은 어떤가?”
“하하, 그것참 그동안 재밌게 흘러갔더군. 선각자는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나머지 인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고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가 나간다면 막을 자가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멍청이!”
현와가 돌연 눈을 흘기며 차갑게 소리치자, 남자의 표정이 급변했다.
뒤이어 현와가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누누이 어떤 경우에도 방심하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건 괜찮지만, 어떤 상대라도 신중히 행동해야 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거늘!”
“…네 말이 맞아. 내가 실수했군.”
“비록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강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조금 전 녀석의 몸 안에 있던 자가 말하길 어떤 여인이 놈의 뒤를 봐 주고 있다고 했다. 너는 가서 그녀가 어떤 자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확실하지도 않은 말을… 그가 되는 대로 지껄인 것일 수도 있잖아?”
“고금을 막론하고, 작은 변수가 일의 성패를 좌우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게다가 그저 한 번 조사해 보라는 것뿐이니 어려울 것도 없지 않느냐?”
“만약 찾아갔는데 정말로 강하면?”
남자의 말에 현와가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야 얼마냐 강하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만약 우리와 비슷한 정도라면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고, 더 강하다면 어떻게든 친분을 만들어야겠지. 그리고 만약 우리보다 약하다고 한다면…….”
현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에 남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한편 소범과 강아지와 함께 나란히 숲길을 걷고 있는 엽현.
이때 엽현이 문득 구층 존재를 찾았다.
[구층 주민, 저 현와란 이수를 어떻게 보시오?] [내가 그 여자 마음속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알겠느냐? 다만 한 가지 말 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떤 계략이나 음모나 강한 실력 앞에서는 부질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아직 그 정도가 아니니 상대가 널 흔들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네가 해야 할 것은 지금보다 더 강해지는 것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엽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험험, 그런 의미에서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느냐?] [음? 말 해 보시오. 무슨 부탁인데 그러시오?] [그러니까… 시간 날 때, 아니 가능한 한 빨리 유서를 한 장 쓰도록 하거라. 내용은 가만 보자… 아하, 네게 어떤 일이 발생해도 나와는 상관없으니 천녀에게 제발 날 죽이지 말아 달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구나!]그 말을 듣자 엽현의 표정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보시오, 그대도 나름 한 가닥 하던 강자인데 천녀 누님이 그렇게나 무섭소?] [응.] […….]엽현이 무어라 반박하려 할 때, 구층 존재가 먼저 말했다.
[너야 별짓을 해도 그녀의 편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하지만 널 제외하고 나머지 생령들은 그녀에게 그저 벌레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수틀리면 언제든 밟아 죽여 버릴 수 있는 그런……. 그리고 나는 그 벌레 중에서 조금 큰 놈에 속할 뿐이고. 알겠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