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943
943화 진심을 말해 보시오
순간 엽현의 안색이 거뭇하게 변했다.
오유겁 당시, 한 시대를 살아가던 생령 전체가 멸망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 후에 얼마나 많은 사기들이 이 세상을 채웠을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눈앞의 흑의인은 그 멸겁에서 살아남은 것뿐만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던 사기들은 한군데 모으는데 성공했다.
이런 자가 어찌 그저 그런 평범한 무인일 수가 있겠는가!
엽현은 같은 무인으로서 흑의인에 대한 존경심을 숨길 수 없었다.
이때 흑의인이 말했다.
“아까 말했듯, 이 물질은 형태의 변형이 가능하다. 너는 검수이니 검으로 만들어 보거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엽현이 곧 도를 향해 염원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웬걸, 도는 마치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참, 참 내 정신 좀 봐. 녀석을 통제하려면 우선 놈이 너를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말입니까?”
흑의인이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상자 안에 있던 도가 순식간에 검은빛으로 변해 엽현의 미간 안으로 사라졌다.
쾅-!
순간, 엄청난 양의 사기가 엽현의 몸 안에서 휘몰아쳤다. 이 충격에 흑의인이 몇 장 뒤로 밀려났고, 대전 안이 마치 무너지기라도 할 듯 크게 흔들렸다.
이때의 엽현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전신을 떨고 있는 상태였다. 칼날이 몸 안에 들어온 순간 엄청난 양의 사기가 그의 정신과 육신을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특히 정신 측면에서 입은 충격은 하마터면 신지가 파괴되어 버릴 정도로 엄청났다.
뭐 이딴 힘이!
엽현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사망지인으로부터 전해진 충격은 그의 혈맥이 각성했을 때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던 것이다.
바로 이때 흑의인의 음성이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지금 느끼고 있다시피 사망지인이 품은 사기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기를 모두 받아들여야만 사망지인이 너를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무조건 버텨라!]그 말을 들은 엽현은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버텨야 한다!
엽현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 버티기에 돌입했다. 아무도 말 해 주진 않았지만,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도 사망지인이 방출하는 엄청난 양의 사기는 엽현의 전신을 계속해서 두들겨댔다. 비록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육신은 점점 변형되어갔다.
사기가 육신을 강화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때 엽현의 몸 안에는 검기와 검의 뿐 아니라, 충만한 사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기는 기존의 두 기운과 충돌하지 않고 원만하게 서로 뒤섞였다.
엽현은 다시 한번 사기로 인해 육신이 강성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망지인의 공격을 무사히 받아낸 엽현.
하지만 그의 모습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삼일 밤낮으로 계속된 사기의 도전 탓에 그 역시 모든 기운을 쏟아부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하하, 아직 살아있느냐?”
흑의인의 물음에 엽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만 겨우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하, 네 놈의 의지력은 지켜보는 나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하하…….”
힘없이 웃은 엽현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안에 사망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도의 모습이던 사망지인은 엽현의 생각에 따라 검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사망지검(死亡之劍)!
이 검은 사기를 집중시켜 만든 것으로, 따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주인의 마음대로 얼마든지 형태를 변형시킬 수도, 아니면 허공에 뿌려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엽현이 사망지검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쳐다보며 물었다.
“이 검의 등급은 어느 정도나 되겠습니까?”
“네 몸 안에 있는 탑의 검보다 한 단계 낮을 것이다.”
탑의 검!?
엽현이 동작을 멈추고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계옥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후후, 놀랄 것 없다. 내 눈을 속이기에는 탑의 실력이 충분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의인이 말을 이어갔다.
“탑 위의 세 검이 처음부터 범검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주인의 강력한 실력을 따라 자연히 그리 진화한 것뿐이지. 그렇다 하더라도 범검은 결국 범검.
그들 주인의 검의나 의지가 닿는 순간 세상 어느 신기와도 비할 수 없는 위력을 낼 것이다.”
범검.
엽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본 무기 중 가장 강한 것은 단연 이 범검이었다. 이 범검 앞에서는 계옥탑 조차 벌벌 떨 정도이니 그 위력은 결코 그가 의심할 바가 아니었다.
이때 불현듯 뭔가 떠오른 엽현이 진혼검과 천주검을 꺼내 들었다.
“그럼 사망지검과 이 두 검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두 검을 본 순간 흑의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호오, 꽤나 재밌는 녀석들이로구나. 하나는 육신을, 다른 하나는 영혼을 상대하는데 강점을 갖고 있군.”
이때 흑의인의 시선이 천주검에 멈췄다.
“그런데 이 검은…….”
“왜 그러십니까?”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이건 완전한 검이 아니로구나.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어.”
순간 엽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걸 어찌 알아보셨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엽현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주검이 완벽하지 않은 것을 알아본 자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천주검은 네 등분 된 청아의 검 중 하나이지 않은가!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이렇게 오래 살고도 그만한 안목도 없다면 헛산 것이 아니겠느냐?”
“…….”
엽현은 순간 자신이 눈앞의 남자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저 윗대의 강자 중 하나인 줄 알았건만, 어쩌면 자신이 판단하지 못할 정도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굳이 품계를 따지자면 이 검은 사망지검보다는 한 등급 떨어진다. 아마 너보다 실력이 뛰어난 강자를 만났을 때 이 검으로는 힘들다고 느꼈을 것인데… 내 말이 맞느냐?”
엽현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엽령과 같은 강자들 앞에서 천주검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별히 밀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서 판세를 뒤집을 정도의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막 천주검을 얻었을 때 거의 무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검의 효용이 점점 떨어져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때,
“어쩌면… 이 검을 강화시켜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흑의인의 말에 엽현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게 누구입니까?”
“이 대전으로부터 우측으로 만 리쯤 가면 이보다 큰 산이 나온다. 산의 깊숙한 곳을 잘 찾아보면 작은 대장간이 있을 것인데, 그곳에 있는 자라면 이 두 검의 경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해 주려 하겠습니까?”
“하하, 만약 다른 자라면 몰라도 너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가 보면 안다. 하하하!”
엽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직접 한 번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후후, 그나저나 네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뭐든 하명 하십시오.”
흑의인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인경은 내가 나름 심혈을 기울여 창안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 공법 역시 언젠가 너의 자질과 천재성에 뒤처질 날이 오게 되겠지.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설령 네게 사인경이 필요 없게 될지라도, 누군가에게 전수 해 주어 그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 줄 수 있겠느냐?”
엽현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응당 그렇게 할 것입니다!”
“후후, 너만 믿겠다.”
“그런데… 아직 은인의 성함도 여쭙지 못했습니다.”
엽현이 묻자 흑의인이 잠시 상념에 잠겼다.
“오래전, 한 여인이 날 이렇게 부르곤 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리버리.”
“아니, 그걸 이름이라고 하기엔…….”
“자, 이제 볼일 끝났으면 어서 가 보거라. 좀 쉬고 싶구나.”
흑의인의 축객령에 엽현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섰다.
갑자기 헤어지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급한 일을 끝낸 후에 찾아오면 그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한편, 떠나가는 엽현을 바라보며 흑의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도와줄 사람을 찾겠다고 떠나더니…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
잠시의 침묵 후, 흑의인이 문득 고이 간직해 놓은 듯한 두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순백의 새하얀 두건을 바라보던 흑의인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한 번 지나간 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거늘.”
이 말을 끝으로 흑의인은 의식을 치르듯 두건을 이마에 곱게 동여맸다. 뒤이어 그의 두 눈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무겁게 닫혔다.
* * *
한편 엽현이 막 대전 밖으로 나왔을 때, 구층 존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떠났다.]“떠나?”
엽현이 순간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구층 존재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엽현이 황급히 대전을 향해 돌아서려 할 때,
[가지 말거라.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일찍 보낸 것이다.]이 말을 듣자 엽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전 내에 가득했던 사기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정말 갔구나!
엽현은 황량한 전각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역시 혈기 넘치던 젊은 시절, 이 오유계의 긴 역사 중에서 나 역시 한 줄기 큰 파도라 여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훗날 선각자를 만났고, 천녀를 보았으며, 9호와 천맥자, 그리고 방금 전의 흑의인까지 많은 강자를 겪게 되었다. 이들을 만나고 난 이후에야 내가 한 줄기 파도가 아닌, 망망대해 속에 빠진 한 알에 좁쌀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 우주의 무구한 역사 속에 인물이 얼마나 많았으며, 그중에서 강자는 또 얼마나 많았겠느냐? 다만 아무리 그러한들 결국은 다 흙으로 돌아가고 이제는 기억으로 남을 뿐이로구나.]“인생이 별거 있겠습니까. 그저 한바탕 즐겁게 살다 가면 될 것을.”
이때, 구층 존재가 벌컥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 한 번 즐겁게를 못하고 있으니 하는 말 아니냐! 젠장 나도 밖에 있었으면 기깔나게 살았을 것인데 여기 갇혀가지고 허송세월이나 하고 있다니! 이 망할 탑을 부수고 거의 나갈 뻔했는데, 너의 빌어먹을 누님께서 또 날 병신으로 만들고… 나는 도대체 언제 즐겁게 살 수 있단 말이냐! 알면 좀 가르쳐다오!]“…….”
[이보다 더 절망적인 게 뭔지 아느냐?]절망?
엽현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이 망한 인생에서 더 나빠질 게 있단 말인가?
[퉤! 내가 가만히 앉아서 계산해 보니, 네가 도칙을 찾아와서 날 풀어준다 한들 이제는 즐길 시간이 없을 것이다.]“그게 무슨 소립니까? 세상이 망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하하하! 역시 총명하구나! 이제 곧 오유겁이 닥칠 시간이 아니더냐! 오랜 수련을 끝내고 나와서 좀 편하게 사나 했더니 탑에 갇혀버리고, 또 이제 나가나 싶은데 오유겁이 온다네? 젠장 할, 이 정도면 우주 전체가 편먹고서 날 미치게 하려는 속셈 아니겠느냐!]“…….”
엽현은 감히 아무런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세상 천지에 이보다 더 억울한 존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안타깝지만 이럴 거면 차라리 진작 죽고 새로 태어났으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기구한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 선각자를 증오하시오?]“…….”
구층 존재는 꽤나 긴 시간을 침묵하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어차피 여기 갇힌 것도 내가 멍청해서 그런 거였고, 그가 사라진 것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던 것 같은데…….]“아니, 진심을 말 해 보시오.”
이 말에 구층 존재가 다시 울컥했다.
[진심? 진심을 듣고 싶어?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어차피 다시 만나봐야 이기지도 못할 것인데! 내가 미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