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944
944화 어디 놀아볼까?
뭐가 달라져?
구층 존재의 말에 엽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조를 분명 선각자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덤벼봐야 이기질 못하는데!
“됐다, 잔말하지 말고 대장간이나 찾아가거라!”
“참, 깜빡할 뻔했네. 헤헤, 검이 잘 강화될 수 있도록 행운을 빌어 주시오.”
“행운? 내 앞에서 그딴 말 꺼내지 마! 퉤!”
“…….”
대화를 마친 엽현은 다시 사인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궁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린 엽현은 소범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 * *
숲속을 바람처럼 가로지르는 엽현.
지금 그에겐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일반 이수들은 더 이상 사인경을 배운 자신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결코 자만하거나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의 실력으로 이 험난한 지역을 활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니까.
한편, 검은 강아지와 나란히 걷는 소범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가끔씩 사탕을 오물거리며 신난 표정이었다.
우선 엽현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워 보였다. 그가 매일 해 주는 맛있는 밥도 그녀의 하루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배가 고프다 싶으면 엽현의 소매만 잡아끌면 된다.
그러면 밥이 뚝딱하고 튀어나오니까.
엽현 역시 소범을 천맥자가 아닌 그저 하나의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다.
앞서 현와가 말했던 천맥자의 인과에 대해선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아니더라도 자신 역시 한 인과 하는 몸이었으니까!
빚쟁이에게 빚 몇 푼 더 얹는다고 크게 대수롭겠는가?
그렇게 한참 탈 없이 걷고 있던 중, 엽현이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곁에 있던 소범 역시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의 앞에는 거대한 산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이 사이로는 얕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무슨 위험한 기운이라도 있습니까?] [글쎄다. 정 느낌이 이상하면 어검비행으로 이동하면 되지 않느냐?]어검비행.
엽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수경 안에선 언제 어디서라도 이수가 나타날 수 있다. 현재 그의 실력으로 어검비행을 하다가 위치가 노출되기라도 하면 꽤나 곤란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이수들은 영역 개념이 생각보다 철저하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영역 상공을 비행한다면 이는 자신에 대한 도발로 간주 되어 폭력사태를 촉발할 수 있다.
그러니 굳이 이런 번거로운 상황에 휘말리지 말자는 것이 엽현의 생각이었다.
잠시 고민 끝에 엽현은 소범과 함께 검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하천을 따라 낮게 비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이수들에 발각될까 하는 염려를 크게 줄일 수 있다. 게다가 만약의 사태를 위해 혼돈지기로 기운을 감추었다. 한편 태생적으로 기운이 없는 소범은 굳이 혼돈지기를 덮어 줄 필요가 없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를 가르는 검광.
그 위에 서 있는 엽현의 시선은 줄곧 물밑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이수가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반 시진을 내 달릴 동안 이수는커녕 물고기 한 마리도 튀어 오르지 않았다.
바로 이때, 소범이 갑자기 엽현의 옷자락을 잡아끌더니 먼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엽현은 순간 검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멀리 천 장 높이에 이르는 큰 산 주위를 어떤 생명체 하나가 빙빙 둘러싸고 있던 것이다.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자 엽현은 그 생명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구렁이었다!
거대한 산 하나를 집어삼킬 듯 휘어 감고 있는 구렁이의 몸집은 산 전체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순간 흔들리는 엽현의 입꼬리.
일단 실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압도적인 크기에 싸우기도 전에 질려 버릴 것만 같았다.
지난번 거대 원숭이도 그렇고, 이 동네의 이수들은 어찌 하나같이 이렇게 비대하단 말인가!
바로 이때, 소범이 출수하려는 듯 철검을 손에 쥐었다.
이를 본 엽현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보아하니 잠들어 있는 것 같아. 깨지만 않으면 귀찮을 일 없으니, 조용히 지나가자.”
큰 눈을 깜빡이는 소범.
그녀는 해치우지 않는 게 더 귀찮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엽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계속해서 어검을 타고 전진하는 두 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 구렁이가 있는 산과 냇가는 딱 붙어 있었기에 그들은 결국 구렁이의 옆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구렁이와 가까워질수록 엽현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반면 소범은 여전히 뭐가 즐거운지 싱글벙글하는 모양새다.
그렇게 그들이 막 구렁이의 곁을 지나치려는 이때, 구렁이가 돌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엽현의 눈가에도 마찬가지로 경련이 일었다.
산등성이 부근에서 구렁이의의 머리가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엽현 등 두 사람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면서 하늘이 어두워졌다. 구렁이의 덩치가 너무나 큰 탓에 태양을 가려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구렁이의 머리는 태양과 정확히 일치하는 그곳에 멈췄다. 그리고는 엽현 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소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아는 사이라도 되는 걸까?
엽현이 혹시나 해서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소범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때, 거대한 구렁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천맥자…….”
이 한 마디에 조용히 흐르던 물이 돌연 범람하기라도 할 듯 들끓기 시작했다.
이때 막 출수하려던 소범을 향해 엽현이 말했다.
“그냥 지나가기만 할 거라고, 악의는 없다고 알려 줘.”
그러자 소범이 검을 들어 산 너머를 가리켰다.
이에 구렁이가 알아들었다는 듯 소범을 향해 대꾸했다.
“천맥자, 너는 지나가도 좋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 남아야 한다.”
소범이 불쾌한 듯 인상을 쓰며 출수하려는 찰나, 엽현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어째서지? 이유나 알자!”
구렁이의 눈이 소범을 지나쳐 엽현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의 대부분엔 멸시의 기색이 가득했다.
“인간, 약자는 나와 말할 자격 없다.”
“…….”
이 말을 들은 엽현은 울컥하고 말았다.
말도 못 하게 하다니, 그렇게나 고귀한 존재란 말인가?
이때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구층 존재의 음성.
[보아하니 이수 중에 총명한 놈도 있는 반면, 이렇게 멍청한 놈도 있는가 보구나.] [전적으로 동의!]구렁이가 엽현을 무시하고 다시 소범을 향해 말을 걸려 할 때, 엽현이 돌연 한 줄기 검광으로 변해 공중으로 솟구쳤다.
쾅-!
엽현의 검이 구렁이의 머리 부근을 강타하자 비늘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다. 반면 엽현 역시 그 충격에 뒤로 튕겨 날아갔다. 하지만 이 순간 천주검이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일검무량(一劍無量)!
빛처럼 날아간 천주검은 곧장 구렁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한 줄기 선혈이 하늘 높이 뿜어져 나왔다.
“캬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구렁이의 거대한 꼬리가 하늘을 덮으며 엽현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이를 본 엽현은 감히 정면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잔상을 남기며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구령이의 머리 위로 이동한 엽현.
바로 이때, 구렁이가 엽현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작은 산만한 구렁이가 입을 벌리니, 엽현은 순간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붉은 혓바닥을 바라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려 가던 엽현,
그가 막 사망지검을 꺼내 들려는 순간, 갑자기 구렁이가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이때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 있던 엽현의 시선에 어느 순간 잘려나간 구렁이의 꼬리가 들어왔다. 하늘 높이 솟구친 꼬리는 정확히 시내 한가운데 빠졌고, 곧이어 시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엽현은 문득 소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때 그녀의 철검은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녀가 출수한 것이었다.
꼬리를 잃은 구렁이가 소범을 향해 미친 듯이 포효했지만,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는 모습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직까지 이성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때 소범이 검을 들어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은 그녀는 목을 긋는 대신 구렁이가 있는 허공을 향해 가볍게 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돌연 구렁이의 배 부분이 길게 갈라지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냈다. 순간, 이 구멍으로 엄청난 양의 선혈이 쏟아져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이 장면을 본 엽현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아무리 소범이라 해도 이수를 상대로 이 정도로 압도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구렁이의 비명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 이때, 재차 출수하려던 소범이 엽현에 의해 제지당했다.
엽현이 그녀를 막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 상황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저 이수는 왜 갑자기 이런 곳에 나타난 걸까?
게다가 왜 소범과 함께 있는 자신을 노린 걸까?
이렇게 멍청한데도 지금까지 생존한 것이 과연 가능할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가던 엽현이 표정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함정이다!
누군가 고의로 우리가 저 구렁이를 죽이도록 유도한 것이 틀림없어!
이때 엽현의 머릿속에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이 떠올랐다.
이수경!
뭔가를 눈치챈 엽현은 소범을 데리고서 황급히 구렁이의 머리 옆에 도착했다.
소범이 가까이에 나타나자 구렁이의 눈은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문득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범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바로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
이때 엽현이 구렁이를 향해 다그치듯 소리쳤다.
“누가 널 이리로 보냈느냐!”
구렁이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엽현이 소범을 바라보자, 소범이 조용히 검을 들어 구렁이의 목에 드리웠다. 그러자 마침내 구렁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수경…….”
이수경!
예상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엽현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결국 배후는 이수경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왜 소맥과 자신이 구렁이를 죽이도록 유도한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이점이 있기에?
바로 이때, 엽현의 눈이 번뜩였다. 짧은 순간, 상대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들이 구렁이를 죽인다면, 이수경은 즉각 이 사실을 모든 이수들에게 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수들은 자신에게 반감을 갖게 될 것이다. 어쩌면 손을 잡고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재로서는 이수들과 엽현 사이에 아무런 은원이 없으니, 굳이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낼 필요가 없지만, 이수 중 하나가 죽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소에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하는 이수들이더라도 다른 종족과 분란이 일어나게 되면 결국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다.
이수경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악랄한 년!”
욕지거리를 뱉어낸 엽현이 구렁이를 향해 눈을 희번덕이며 소리쳤다.
“작아져!”
작아져?
구렁이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에 엽현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너 정도 되는 이수라면 얼마든지 크기를 변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모른 척하지 말고 빨리 작아져라.”
“너 대체 날 어쩔 셈…….”
바로 이때, 소범이 철검을 들어 구렁이 머리 위에 살포시 얹었다. 비록 구렁이의 머리와 비교하면 이쑤시개로 보일 정도로 작은 검이었지만, 문제는 검을 쥐고 있는 자가 소범이라는 것이었다.
차가운 검날이 머리에 닿는 순간, 구렁이가 화들짝 놀라며 몸체를 줄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산과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했던 구렁이가 손가락 굵기만 한 작은 새끼 뱀으로 변했다.
[구층 주민,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 [뭔데?] [이놈에게 훈육이 좀 필요한 것 같소.]말이 끝나기 무섭게 엽현이 뱀을 들고 냅다 계옥탑 구층에 던져 버렸다.
[그래, 마침 인생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잘 됐구나.]잠시 후, 계옥탑 구층에서 쿵쿵 소리와 함께 구슬픈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엽현의 생각대로 구층 존재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뿐이지, 이수를 가볍게 상대하는 걸 보면 절대 약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언젠가 그가 탑에서 나올 수 있다 한다면, 천녀나 소범, 그리고 9호 정도를 제외하면 막을 수 있는 자가 많지 않으리라.
하긴, 그 정도 되니까 선각자와 내기도 할 수 있던 것이겠지.
그러다가 탑에 갇히기도 했고.
* * *
계옥탑 밖.
엽현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이수경! 네가 이렇게 원하니 어디 재밌게 놀아보도록 하자꾸나!”
말을 마친 엽현이 소범의 손을 붙잡고는 순식간에 장내를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잘려나간 구렁이의 꼬리 위에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수경이었다.
이수경은 표정 없는 얼굴로 엽현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그래……. 인간, 어디 한 번 내 기대에 부흥해 보도록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