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959
959화 또 시작이네
엽현은 당황스러웠다.
지금 자신에겐 지금 몸뚱이 하나 말고는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은 그냥 동네 뒷산도 아니고 무려 오유계 삼대 금역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도망은커녕 가만히 서서 얻어맞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 빌어먹을 자식!
백의인에게 욕을 퍼부은 엽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 주변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희끄무리한 무변지하성의 하늘.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한 하늘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답답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엽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구층 존재 역시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대략 반 시진쯤 지났을까.
엽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엽현아, 어찌해서 자꾸 회귀하려 하는 게냐…….”
그는 문득 청성에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 당시의 엽현은 지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약했다. 심지어 그때는 검도 없이 주먹으로 싸우던 시절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누가 눈앞에 있어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았다.
엽현의 실력은 분명 예전에 비해 대단히 강해졌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약해진 것만 같은 것은 그저 기분 탓일까?
이 순간, 엽현의 몸 안에서 떨림이 발생함과 동시에 몇 개의 검명 소리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이는 계옥탑 안에 있던 검들의 검명 소리였다.
[허허허, 네가 그래도 아예 구제불능은 아닌가 보구나.]“그게 무슨 뜻이오?”
구층 존재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방금 전 네 검들의 상태를 통해 네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그동안 너무 내 실력만 믿고 있던 것이 아닌가 반성하던 참이었소.”
[네 실력에 네가 의지한다고 뭐가 잘못이겠느냐. 다만, 사내대장부로 태어난 이상 마음속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선 안 될 일이다. 상대가 나보다 강할 순 있다. 하지만 어차피 한 번은 죽을 인생, 왜 두려워해야 한단 말이냐?]“그런데… 그대도 남자면서 천녀 누님은 두려워하지 않소?”
[어허, 좋은 말 해 주고 있는데 왜 엄한 데로 새는 것이냐? 흠, 흠. 그건 번외로 쳐야 공정한 것이다.]“하하하!”
엽현은 웃으며 성 안쪽으로 이동했다.
지금 그의 마음 상태는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구층 존재의 말마따나 사내로 태어나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을까?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흐흐흐…….]바로 이때, 구층 존재의 기분 나쁜 웃음을 들리자 엽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보시오, 또 무슨 음흉한 상상을 하는 것이오?”
[하하하!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여기는 매우 안전한 것 같구나. 걱정말고 쭉 들어 가 보거라. 쭉, 쭈욱… 옳지!]그 말을 듣자 엽현은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
젠장, 저 영감탱이가 뭔가 발견한 게 틀림없어!
“혹시 날 겁주려는 건 아니오?”
[하하, 맞다! 그냥 심심해서 한 번 놀려 본 게다. 그러니 걱정 말고 계속 전진하거라.]“흥! 그런다고 진짜 내가 겁먹을 줄 알고?”
뭔가 불안했지만, 엽현은 우선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야, 좀 천천히 걸어가거라. 뒤에 오는 할망구가 영 쫓아오질 못하지 않느냐.]할망구!?
엽현이 안색이 창백해져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둠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는 건 없었다.
“젠장, 사람을 이렇게나 놀린다고? 내가 어디 가만히…….”
엽현의 말에 갑자기 뚝 끊겼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성문 앞에 한 노파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양손에 빗자루를 쥐고는 천천히 앞을 쓸고 있었다.
노파의 옷차림은 매우 소박했다. 치마에도 천을 덧댄 자국이 여럿 있었고, 머리는 눈처럼 새하얬다. 등이 다소 굽은 것이 영락없는 시골 노부인의 모습이었다.
“저 뉘신지?”
엽현이 조심스레 묻자 노파가 빗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사람을 보는구나. 근 천 년 동안 여기에 온 인간은 너까지 단 둘뿐이었다.”
노파는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씩 웃어 보였다. 이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매우 음산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하하,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한 바퀴 둘러보다 나가려 했습니다.”
이때, 노파가 불쑥 엽현 앞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귀신을 보는 듯했다.
지척 거리에서 노파와 마주하게 된 엽현.
그의 눈동자에는 어떤 두려움도 비치지 않았다.
“…한 바퀴 둘러본다?”
“그렇습니다. 이곳이 오유계의 금역이라기에 호기심에 한 번 들른 것뿐입니다.”
“아이야, 넌 네가 약한 것을 아느냐?”
“약하면 구경도 못 한단 말입니까?”
엽현이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하자 노파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였다.
“사실, 저는 사부를 찾으러 여기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사부?”
“그렇습니다. 혹시 여기에 왔다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노파가 다시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아까 말했듯, 천 년 동안 이곳을 찾은 자는 단 둘뿐이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이 네 사부라는 말이냐?”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곳에 간다고 하시긴 했는데, 돌아오질 않으셔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죽은 것이겠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엽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흥! 어찌 그럴 리가 없느냐?”
“우리 사부는 매우 강하단 말입니다!”
노부의 입가에 또다시 비웃음이 걸렸다.
“그건 네 생각이겠지.”
“…….”
“난 또 뭐 한 가닥 하는 자가 온 줄 알았더니, 이건 뭐 애송이도 이런 애송이가 따로 없군.”
노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먹을 감아쥐었다.
이때, 엽현이 돌연 한 자루 검을 꺼내 노파에게 내밀었다.
천녀의 검.
검을 본 순간, 시큰둥하기만 했던 노파의 표정이 급변했다.
“범검!?”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내 사부의 검입니다. 그녀는 하얀색 소복을 즐겨 입고, 말을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혹시 여기서 본 적 있습니까?”
“…이 검의 주인이 네 사부라고?”
노인이 똑바로 쳐다보며 묻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이 검의 주인의 제자라면, 왜 이렇게 허약한 것이냐?”
“뭐라 했습니까? 제가 약하단 말입니까?”
“그럼 아니냐?”
“하…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사부께서 먼저 진정한 검도의 오의를 깨달아야 한다며 제 무공 수위(修為)를 막아 놓은 상태입니다.”
그 말에 노파가 손을 들어 엽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신비한 힘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엽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눈앞의 노파를 이길 수 없다.
설령 현기와 검의를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감히 대항하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노파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뗐다.
“확실히 무공이 봉인돼 있군.”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이렇게 해야만 범검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셨습니다.”
범검.
다시 한번 범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노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마치 뭔가를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제 사부를 보셨습니까, 못 보셨습니까?”
“…본 적이 있다.”
노파의 말을 들은 순간 엽현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 그럼 말씀하신 대로 제 사부는 여기서 운명을 달리한 것입니까? 도대체 왜 돌아오시지 않은 것입니까!?”
이에 노파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범검의 경지에 이른 자가 여기서 죽는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 어떡하지? 어떡합니까? 정말 제 사부가 죽은 겁니까? 아니라고 말 좀 해 주십시오!”
노파가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엽현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진정하거라.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저, 정말입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파를 보며 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살아있다면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 어딘가에 사부가…….”
“여기서 가능한 빨리 떠나는 게 좋을 게다.”
노파의 말에 엽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말입니까?”
“뭘 어째서냐? 위험하니 그렇지!”
“에이, 제가 보기엔 조용하기만 한데 말입니다. 무슨 위험한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쯧쯧… 멍청한 놈. 살려 준다는데 고집 피우기는…….”
노파가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떠나거라. 웬만하면 너와 엮이지 않는 게 좋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나.”
말을 마친 노파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때, 엽현이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좀 도와주십시오! 사부를 꼭 찾아야 합니다!”
“…사람 찾는 걸 도와 달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곳에 살고 계시니 저보다야 이곳에 빠삭하지 않으십니까?”
“대가는?”
노파의 말에 엽현이 천녀의 검을 들이밀었다.
“사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순간, 천녀의 검을 향한 노파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 너… 이게 무슨 검인지 모르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이건 사부가 제게 주신 검입니다. 하지만 저는 또 따로 쓰는 검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정말로 이게 뭔지 모른다고?”
엽현이 천진한 눈으로 노파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냥 평범한 검이잖습니까? 게다가 이 녀석은 사용하기가 굉장히 불편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어 봐야 별 소용도 없습니다.”
“…네 사부는 도대체 왜 너 같은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냐?”
“하하하!”
그 말에 엽현이 옆구리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저의 천재적인 자질과 명석함을 알아보신 게 아니겠습니까? 사부께선 저더러 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 하셨습니다. 참, 제 사형과 사제 역시 모두 뛰어난 검도 천재들입니다.”
“사형? 사제?”
노파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청삼남의 검 등, 나머지 탑의 검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보십시오. 이것들이 바로 그들의 검입니다.”
두 자루 검을 본 순간, 노인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몇 발 뒤로 물러섰다. 심지어 손까지 떨고 있었다.
세상에나!
범검이 세 자루라니!
언제부터 범검이 이렇게 흔해빠진 물건이 됐단 말인가!
다시 엽현을 바라보는 노파의 눈동자는 마치 큰 폭풍이 몰아치는 듯 흔들렸다. 도대체 이 젊은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르신, 그러면 제 사부를 찾아 주시는 겁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 세 자루를 모두 드리겠습니다!”
“…….”
“혹시… 부족해서 그러십니까?”
잠시 말이 없던 노파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사부가 정말로 이리로 온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여기서 찾을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지요.”
사람을 찾아?
노파의 눈이 빠르게 구르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다니, 누구를 말인가?
잠시 후, 노파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떻게 네 사부를 찾아야 할지 도통 모르겠구나. 그러니…….”
노파가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백 장쯤 쭉 가다 보면 천도당포(天道當鋪)라고 하는 전당포 하나가 나올 것이다. 그곳에 가서 한 번 물어보거라.”
천도당포?
“그곳이라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정보에 대해 비교적 빠삭한 자들이다. 한 번 시도 해 볼 순 있겠지.”
“음… 알겠습니다!”
엽현이 세 검 중 한 자루를 노파에게 내밀었다.
“어르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보답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또다시 범검이 가까이 다가오자, 노파의 눈가가 재차 파르르 떨려왔다.
물론 갖고 싶다. 하지만 소유했을 때 따라올 인과를 생각한다면 결코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할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노파는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내저었다.
“이 녀석아, 뭐 이런 걸 가지고 사례를 한다고 그러느냐.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천도당포로 가 보거라. 그들은 해가 지면 곧장 문을 닫는단 말이다.”
“정말 안 받으실 겁니까? 이러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정말 괜찮다!”
“어르신… 알고 보니 보기 드문 호인이셨군요!”
“하하…….”
엽현은 멋쩍게 웃기만 하는 노파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올렸다.
이때!
“잠깐 기다리거라!”
돌아서려는 엽현을 노파가 물러 세웠다.
“그게… 내가 그곳까지 배웅해 주마. 아무래도 꼬라지를 보니 거기까지 가기 전에 뒈져버리겠구나. 그럼 큰일, 아니, 내 마음이 아플 것 같구나.”
“…….”
이때, 구층 존재의 한숨이 계옥탑에 울려 퍼졌다.
[또 시작이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