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967
967화 아주 날강도였죠
대전 안.
엽현은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때 온 성은 마치 들끓는 듯했다.
불패아라!
엽현은 궁금해졌다.
한무기 시대 오유겁에 맞서 싸웠다는 불패아라.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수경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한무기의 오유겁에서 살아남은 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때 소범의 시선을 느낀 엽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엽현은 잠시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순간 그는 눈앞의 소범은 더 이상 자신이 아는 소범이 아님을 깨달았다.
“날 따라와.”
이것이 엽현이 들은 소범의 첫 음성이었다.
소범은 엽현의 손을 잡아끈 채로 대전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황포를 입은 여인이 엽현을 잠시 응시하고는 뒤를 따랐다.
대전 안에 있던 스무 명의 호위들 역시 이들을 따라 대전을 나섰다.
소범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이미 대전 앞에는 일백 기의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아라! 아라!”
소범을 본 병사들이 광분한 모습으로 목청껏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엽현은 이들의 눈에는 소범은 마치 신과도 같은 존재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병사들을 바라보던 소범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떠들썩하던 장내가 한 순간 고요해졌다.
이때 소범이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전의 일이 떠오르는 것 같아.”
“하하, 잘됐구나! 그런데… 넌 아직도 소범인 거야?”
“…….”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소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너 한 사람만이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
그 말뜻을 알아들은 순간, 엽현이 씩 웃어 보였다.
비록 소범이 예전의 기억을 되찾는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물론 소범이 말한 대로, 그녀를 소범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엽현 한 사람뿐일 것이다.
지금부터 이제 그녀는 불패아라로 돌아갈 테니까.
소범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전처럼 너와 함께 다닐 순 없을 거야.”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패아라의 역할은 소범일 때와는 또 다르리라.
소범이 다시 눈앞의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원래 이곳엔 십만이 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고작 이 정도로구나.”
“오유겁… 때문에?”
소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오유겁이 닥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이들과 함께 이 대황국(大荒國)을 지켜야만 해. 그것이 나의 임무니까.”
“그래…….”
이때 소범이 황포를 입은 여인을 돌아보았다.
“폐하, 제 친구에게 한 가지 조화를 선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에 여인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소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눈앞의 병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돌아왔다!”
“우와아아아아!”
“아라!”
“아라!”
일제히 환호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엽현은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함께 다니며 정도 많이 들었는데, 결국 헤어질 시간이 오고 만 것이다.
이때 황포의 여인이 엽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따라오시오.”
이에 엽현이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상 같은 건 필요 없소.”
소범이 엽현을 보자 엽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네가 무사하고 기억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나는 진심으로 기뻐. 그러니 보상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나 잘 해 주었는데.”
“그건, 친구니까. 처음부터 뭘 바랐던 게 아니니까.”
“…….”
말없이 엽현을 응시하는 소범.
이때 소범에게 한발 다가선 엽현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일 거야.”
“…당시 십만의 병사들은 나의 명령에 따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오유겁에 맞서 싸웠어. 그리고 남은 건 겨우 눈앞에 있는 자들이 전부지. 나의 책임은 바로 대황제국과 이들을 지키는 데 있어.”
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너는 왜 영생지에 있던 거야?”
“오유겁이 닥친 날, 나는 죽지는 않았지만 어떤 계기로 기억을 잃은 채 우주를 떠돌게 됐어. 그러다가 백악기가 도래했고, 마침 나를 발견한 기인이 영생지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던 거지.”
“그 기인은 이수경을 창조했던 그 자를 말하는 거지?”
소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백악기의 오유겁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어. 그리고 또 너를 만나 이곳에 온 덕분에 기억도 회복할 수 있었고. 네가 아니었더라면 꽤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소범으로 살아야 했을 거야.”
“하하하,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고마워, 날 진심으로 대해줘서.”
엽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건 밥 지어 먹인 것밖에 없는데 뭘.”
“그것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함께 밥을 나눠 먹던 기억을 떠올리자, 엽현과 소범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별해야 할 시간이구나.”
“그래.”
“네가 괜찮다면 오빠라고 불러도 돼. 물론 실력은 네가 더 강하지만.”
“…….”
“왜, 싫은 거야?”
“아니, 좋아.”
바로 이때, 구층 존재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알았다!] [알긴 뭘 안다는 거요?] [너는 너보다 강한 여인만 보면 죄다 동생을 삼으려 드는구나! 에라이 파렴치한 놈!] […….]이때, 두 사람 곁으로 황포를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날 따라오시오. 이대로 보내면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소.”
이에 소범이 엽현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봐, 우리 사이에 사양하지 말고!”
우리 사이?
이 말을 들은 엽현은 가슴이 뭉클해져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그럼 우리 사이니까 거절하지 않을게!”
“응, 좀 있다 날 찾아와.”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엽현은 황포 여인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소범은 멀어져 가는 엽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점점 그녀의 안색이 차가워지더니, 갑자기 눈동자 깊은 곳에서 살의가 번뜩였다.
잠시 후, 무언가 생각난 소범이 품 안에서 작은 나무 인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소범과 똑 닮은 인형. 이는 엽현이 예전에 선물 해 준 것이었다.
잠시 손 안의 인형을 바라보던 소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 황포의 여인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엽현.
“저, 내가 무어라 부르면 되겠소?”
이에 여인이 웃으며 엽현을 돌아보았다.
“나를 감히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없소. 하지만 아라의 친구이기도 하니. 나를 황정(荒靖)이라 부르시오.”
황정.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정 소저, 소범… 아니, 아라는 이곳에서 꽤나 명성이 드높은 것 같소?”
“아라는 우리 대황국의 수호자이자 영예이며, 또한 자존심이기도 하오.”
“그런데 그대들은 당시 오유겁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오?”
“그렇소. 그때 그 전투는…….”
말을 하던 황정이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일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소. 미안하오.”
“물론 이해할 수 있소.”
엽현은 굳이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성의 참혹한 모습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라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이오?”
“하하, 이수경이라는 세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소.”
“그럼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오?”
“무변지하성에 떨어졌다가 우연히 소도란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가 우리를 이리로 인도해 주었소.”
순간, 황정이 걸음을 뚝 멈췄다.
“소도? 혹시 천도전당포의 그 여인을 말하는 것이오?”
황정의 반응에 엽현도 기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아는 사이였소?”
“…….”
“왜 그러시오?”
“그 여인… 결코 만만히 볼 자가 아니오.”
“그녀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는 것이오?”
황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오. 나뿐 아니라, 그녀의 내력이나 실력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를 건드리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소. 참, 그녀가 두 사람을 이리로 데려온 것은 아마도 그녀가 아라의 신분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오.”
엽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 소도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이곳에 온 것은 모두 그녀의 계획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대는 앞으로 어쩔 셈이오?”
황정의 물음에 엽현이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할까 봐 신경 쓰이시오?”
“솔직히 말하면 그렇소.”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좋소. 내게도 할 일이 있으니 말이오.”
황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언짢게 생각하진 마시오. 다행히 아라가 돌아오긴 했지만, 곧 오유겁이 닥칠 것이고 바깥세상은 유래없이 혼란스러워질 것이오. 우리로서는 외부의 사정에 휩쓸리는 일은 피해야 하오.”
“옳은 선택이오.”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바깥세상은 점점 혼란이 가중되어 가는 실정이다. 백악시대와 한무기의 존재들은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의인까지……. 아무튼 엽현 자신이 보아도 골치 아픈 시기임은 분명했다.
이때 황정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라가 그대에게 주라는 ‘조화’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소?”
“모르오. 다만 나는 절대 탐욕스러운 자는 아니니, 그것이 무엇이든 감사히 받겠소.”
[에헴!]또다시 빈정대는 구층 존재.
“…….”
황정은 엽현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대가 좋아할 것이오.”
“하하, 그렇다면 기대가 되는구려!”
그렇게 다시 걸음을 재촉한 두 사람은 황궁 뒤편에 펼쳐진 호숫가에 이르렀다. 이때 황정이 호숫가 한 편에 있는 작은 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명검정(明劍亭)이라 하오. 오래전 아라가 저곳에서 깨달음을 얻곤 했소. 올라 가 보시오.”
깨달음이란 말에 엽현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혹시 범검과 관련된 곳이오?”
“정확하오. 다만 성공여부는 온전히 그대에게 달렸다는 걸 잊지 마시오.”
“아…….”
잠시 작은 정자를 멍하니 바라보는 엽현.
잠시 후, 그는 가볍게 지면을 박차며 정자를 향해 날아갔다.
엽현이 떠난 직후, 황정의 곁에 소범이 나타났다.
“아라, 바깥의 상황은 어떻더냐?”
“한마디로 말해 극도로 혼란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때보다 더 혼란스럽단 말이냐?”
소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시대를 대표하던 강자들이 어찌 된 일인지 동시에 몰려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오유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을 하는 소범의 시선은 하늘을 넘어 어두운 성공을 지나 머나먼 허무계에 닿아 있었다.
만약 삼대 금역 중 강약을 구분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허무계를 으뜸으로 칠 수 있다.
왜냐하면 허무계의 탄생이 다른 두 곳보다 더 빨랐던 데다가 훨씬 더 신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온 자는 선각자 한 명뿐이라는 점도 이러한 평가에 힘을 싣고 있었다.
소범의 눈은 허무계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 묘지 근처의 낙엽을 쓸고 있는 한 노인이 포착됐다.
이때, 노인의 시선이 소범과 마주쳤다.
“불…패…아라…….”
호숫가의 소범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은?”
“…너무 오래되어 잊었소.”
“언제 한 번 방문할까 하는데…….”
소범의 제안에 묘지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외인의 방문이 허용되는 곳이 아니오. 양해 바라오.”
“…그렇군.”
소범은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 또 누가 그곳에 다녀간 적이 있소?”
묘지기 노인이 한참 뜸을 들이고는 대답했다.
“아주 오래전, 한 남자가 요상한 탑과 함께 온 적이 있었소. 그는 멀리서 이곳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대로 사라졌소.”
“그자가 전부였소?”
묘지기 노인이 재차 고개를 저었다.
“청삼을 입은 남자가 두 아이를 데리고 방문한 적이 있소. 그 두 아이는 사탕 두 개와 나의 보물을 바꾸어 갔지. 말하자면… 아주 날강도였소.”
묘지기 노인의 마지막 한 마디에는 깊은 한이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