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969
969화 이래도 되는 거냐?
호숫가.
엽현과 소범이 천천히 보조를 맞추어 걷고 있었다.
소범이 시선을 호수에 둔 채 말을 꺼냈다.
“오래전 선각자는 영생지에 선한 씨앗을 심은 적이 있었지. 그렇기에 너… 선각자의 전인인 네게 선과가 떨어질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무변지하성은 달라. 그는 무변지하성을 먼발치에서 한 번 둘러보았을 뿐, 아무 인(因)도 심지 않았어. 그러니 영생지에서와 같은 요행을 바라서는 안 돼. 또한 범검에 이르긴 했어도 널 죽일 수 있는 자는 여전히 많다는 걸 잊지 말고. 그리고…….”
소범이 고개를 돌려 엽현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나는 무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물론이지! 걱정하지마, 내 몸은 내가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까!”
엽현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소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으면 됐어. 다만 각 시대의 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분명 보통 조짐은 아니야. 게다가 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응당 이 시대에 있어선 안 될 존재들까지 나타나고 있어.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이 세계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될 거야.”
소범이 엽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특히 너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서옥 때문에?”
소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서옥은 분명 태풍의 소용돌이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거야.”
이때 엽현이 서옥을 눈앞에 꺼내 놓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저 선각자가 남겨 놓은 창고일 뿐이잖아.”
“선각자가 강력했던 이유는 비단 그의 무공뿐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이해 때문이야. 엄밀히 말해 그는 무인이라기보다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대학자라 보는 편이 옳을 거야. 이 점 때문에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는 거지.”
소범이 엽현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오유겁을 상대로 무식하게 정면 대결을 해야만 했어. 그러나 만약 선각자라면 힘보다는 지략을 이용해서 해결하려 들겠지. 그는 나처럼 단순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건 내 직감인데, 그의 계획이 성사되려면 네 배후에 있는 여인과 협의가 필요할 거야.”
순간 엽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말은 선각자는 애당초 천녀와 접촉하기 위해 나의 존재를 이용하려 했고, 계옥탑과 서옥은 이 모든 계획을 위한 포석이었단 말인 거야?”
소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를 탓하기보다는 네 자신을 탓해야겠지.”
“어째서?”
“애당초 네가 약하지 않았더라면 이용당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
“어찌 되었든, 선각자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절대 서옥을 남에게 빼앗겨선 안 돼.”
이 말에 엽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많은 자들이 노리고 있을 텐데…….”
“죽여.”
“그중에는 내가 죽이지 못할 자들도 분명 있을 거야.”
“만약 정말로 위험해지면 이리로 도망쳐. 내가 있는 한은 결코 네게 손대지 못할 테니까.”
그 말에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소범아. 말이라도 들으니 위로가 되네.”
“고맙다니.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가당치 않아.”
“하하, 신경 쓰지 마.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니까.”
엽현의 너스레에 소범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우리 관계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그 소범이고, 너는 똑같이 낯짝이 두꺼운 엽현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 낯가죽이 그렇게 두껍진 않을 텐데.”
“헤헤, 나도 알아. 그저 범검으로 찔러도 안 뚫릴 정도라는거.”
“…….”
한 시진 후, 엽현은 대황국을 떠났다.
배웅을 나선 소범은 성문 앞에 서서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 그녀의 곁에 황정이 다가왔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가 보구나.”
“저를 사심 없이 잘 대해 준 사람입니다.”
문득 소범은 자신의 떡진 머리를 감겨주던 엽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기억은 완전히 돌아왔으나, 예전의 실력을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한동안 폐관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소범이 떠난 후, 잠시 성 밖을 응시하던 황정이 소리쳤다.
“성문을 닫고 진법을 가동하라! 앞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일절 금한다!”
전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아라. 그녀의 실력이 온전치 않은 이상 대황국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이 세상은 더 이상 대황국이 지배하던 그 오유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 * *
대황국을 떠난 엽현은 마음 한켠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소범이 기억을 회복한 것은 다행이지만, 대황국의 불패아라로 돌아간 이상 더 이상 자신과 함께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무변지하성의 우물가로 돌아온 엽현.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먼저 천주검을 꺼내 들었다. 이때의 천주검은 이미 범검이 된 상태였다.
이와 더불어 엽현 본인의 실력 역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게 어떤 식의 변화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영생지의 제군 정도 되는 강자와 맞붙는다고 하더라도 쉽게 패하진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각종 신물을 더한다면 상대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이때 뭔가 떠올린 엽현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 뭐하나. 내가 강해진 만큼, 적들은 훨씬 더 강해져서 나타날 텐데.”
[이놈아 당연한 일로 한숨 쉬지 말거라. 앞으로 한숨 쉴 일이 태산 같을 테니.]“에효, 언제쯤이면 이런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겠소?”
[그야 네가 천녀 정도로 강해진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마 그녀 눈엔 모든 무인이 개미 정도로 보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큰 개미와 작은 개미 정도?]“…….”
엽현은 검을 집어넣고서 천도전당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성 안으로 들어온 엽현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만났던 노파, 구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한 노인과 대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 양상은 매우 치열했다.
바로 이때, 상대의 공격에 밀려난 구음이 마침 근처에 있던 엽현을 발견했다.
“음? 또 너로구나!”
“하하! 안녕하셨습니까, 어르신?”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이곳을 떠나거라.”
이에 엽현이 반대쪽에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고융노인(枯融老人),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자다.”
“아니,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흥! 그야 내게서 취할 것이 있기 때문이지.”
이때, 고융노인이라는 자의 시선이 엽현에게로 향했다.
“외부인?”
상대의 시선을 받은 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하하! 감히 너 같은 외부인이 이곳에 들어오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구나!”
그 말에 엽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쳤다.
“너무 오래 살아? 그럼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군?”
“뭐?”
순간 노인이 벙찐 얼굴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구음 역시 순간 멈칫했다.
이때 엽현의 생각을 이해한 구층 존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엽현은 이제 막 새로운 경지에 이른 상태. 즉,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것이다.
그의 짐작대로 엽현은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였다. 경지를 돌파해 놓고 시험 해 보지 않는다면 애써 새로운 경지에 오른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때, 고융이 엽현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 놈은 누구냐?”
노인은 과연 백전노장답게 쉽사리 덤벼들지 않았다. 상대가 강하게 나오는 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오히려 엽현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딴 게 왜 중요한 건데? 손자뻘도 안 되는 놈이 막말을 하는데 참고만 있을 거야? 어? 안 들어 올 거냐고?”
“이런… 미친놈을 봤나. 네 정체부터 밝혀라!”
“흥! 이래도 안 들어오겠다면 내가 가는 수밖에!”
말을 마친 엽현이 곧장 신형을 날렸다.
이를 본 순간, 고융노인이 황급히 일권을 뻗어냈다.
쾅-!
검과 권이 부딪친 순간, 고융노인이 백 장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자리에 멈춰 선 노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 놈은 도대체…….”
바로 이때, 노인의 시야에 엽현의 검이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버, 범검!?”
이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고융노인이 돌연 엽현을 향해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엔 결례를 범했소. 내가 귀인을 알아보지 못했구려.”
“뭐?”
엽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아니, 여기서 그만둔다고? 이제 시작인데?”
“내가 어찌 범검의 주인과 싸울 수 있겠소? 조금 전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니 한 번만 눈 감아 주시구려!”
“…….”
아닌 게 아니라, 고융노인은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손발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범검!
눈앞의 소년이 범검의 경지에 들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융노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큰 똥을 밟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때 흥미가 떨어진 엽현이 손을 휘저었다.
“이만 가 보시오.”
그 말을 듣자 고융노인이 황급히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빠르게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순간적으로 회춘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때 구음의 경악에 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정녕 범검에 도달한 것이오?”
“하하, 그렇습니다.”
“오… 정말 대단하구려!”
“헤헤, 어르신…….”
엽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구음이 당황한 표정으로 양손을 흔들었다.
“어르신이라니, 가당치 않은 말이오! 어찌 내가…….”
이에 엽현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르신, 제가 누군가를 존중한다면, 그것은 실력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 성품 때문일 것입니다.”
“…….”
“하하, 그럼 저는 또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참, 저는 천도전당포에 있을 것이니, 누가 또 괴롭히거든 그리로 찾아오십시오.”
“…찾는다는 사부는 찾았소?”
“찾았습니다!”
“잘 되었군……. 조심히 가시오.”
“어르신도 몸조심 하십시오!”
엽현은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음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생전에 저런 천재를 본 적이 있던가…….”
* * *
엽현은 곧장 천도전당포를 향하지 않고, 괜히 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누군가 알아서 시비를 걸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다녀도 아무도 그를 찾는 이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러 후미진 골목만 골라 보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아… 싸우고 싶다… 싸우고 싶다… 나와 싸워 줄 사람 어디 없나…….”
[녀석,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가 보구나.]“아니면 그대라도 나와 주면 안 되겠소? 답답해 미칠 지경이오!”
[정 상대를 찾고 싶다면 내가 상대를 하나 추천해 주마.]“정말이오!? 그게 누구요?”
[그때 그 백의인. 그를 찾아가서 도전해 보자꾸나.]“흥! 내가 무서워할 것 같소? 지금 상태로 봐선 아무리 그자라 해도 내 상대가 될 수 없소!”
[하하하하!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낄낄낄, 오랜만에 웃는구나!]“…….”
결국 적당한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고, 엽현은 힘없이 천도전당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소도는 보이지 않았다.
전당포 안을 둘러 본 엽현은 폴짝 뛰어 계산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대 생각에 소도란 여인은 얼마나 강한 것 같소?”
[나 역시 짐작할 수 없다.]바로 이때, 전당포 문이 열리면서 키가 크고 머리에는 갓을 쓴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계산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온 여인은 거침없이 납계 하나를 꺼내 계산대 위에 탁 올려놓았다.
“고시대(古時代) 악마의 날개요. 살펴보시오.”
“어… 저기, 난…….”
엽현이 떠듬거리는 것을 보자, 여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왜, 문제 있소?”
“어, 없소! 내가 한 번 보겠소!”
대답을 마친 엽현은 얼떨결에 여인이 내민 납계를 낚아챘다.
[야, 너 이래도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