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One Target RAW novel - Chapter 20
준희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쉬면 눈물이 흘러 자신의 흐느낌이 소리가 되어 나올 것 같았다.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에게 상처를 주면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질 줄 알았다. 지난 힘든 시간들을 보상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에게 상처를 주면 줄수록 자신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새로이 생성되는 아픔에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준희는 입술을 꼭 깨물며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참아내었다. 자신의 몸을 더욱 웅크리며 무릎을 끌어당겨 꽉 끌어안았다. 몸이 떨렸다. 떨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 전 그의 품에 안겼던 그 따뜻함을 떠올리지 않으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의 뜨거운 입맞춤의 감촉을 생각지 않으려했지만 그마저도……쉽지 않았다……
“흐흐흑……”
준희는 주먹으로 자신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심장을 쥐어짜는 아픔에 더 큰 소리가 새어나올까 자신의 입을 힘껏 틀어막았다.
별빛이 유난히 아름다운 밤, 광장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외진 건물 안을 세 인영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건물 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 군데군데 널린 부서진 가구들과 벗겨진 페인트 자국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얼마 후 있을 캔디 축제에서 목표를 제거할 최적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나온 정찰이었다. 준희는 바닥에 뒹구는 식기들과 쓸모없는 집기들을 조심스레 피하며 강욱과 성환이 먼저 오르기 시작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층 또한 아래층보다 그 정도가 심하면 심했지 더 낫지는 않았다. 준희는 앞서 가고 있는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만치 앞서 걸음을 옮기던 강욱이 그녀를 기다리며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니 더욱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그녀를 떼어놓고 오려던 강욱에게 명령에 군말 없이 복종하고 조용히 소리 없이 움직이겠다는 약속을 굳게 한 후에야 그들의 움직임에 동행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가자 강욱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더 천천히 움직이는 그를 보며 준희는 입술을 꼭 깨물며 그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날 이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들의 서로를 향한 욕망이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한 정열로 남아있음을 확인한 그날 이후 그도 그녀도 그 일을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준희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버리면 그 사실이, 그의 손길에 아직도 자신이 격렬히 반응한다는 사실이 기정사실이 될까봐……강욱은 강욱대로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그렇게 그날의 입맞춤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흔히 보는 건물이 아니었다. 어두운 밤의 움직임이라 준희는 이 건물의 외양은 보지도 못한 채 강욱을 따라 들어왔었다.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다보니 꽤 여러 층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곳인데 높이는 높았다. 준희가 알기로는 카얀섬에는 이 정도로 높은 건물이 거의 드물었다. 광장 주위로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일 것이다.
아마도 이정도 높이라면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거의 5층 정도쯤이라 예상되는 그때에 성환이 어느 방문 앞에서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강욱이 준희를 벽에 바싹 붙이고 그 옆에 자신도 몸을 붙였다. 그리고 성환의 신호를 기다렸다.
반쯤 열린 문짝은 거의 쓰러질듯 위태롭게 붙어있었고 성환이 그 사이로 조심히 귀를 기울이더니 손에 든 권총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그런 성환을 바라보는 강욱과 준희도 동시에 자신들이 쥐고 있는 K-5권총에 힘을 주며 긴장했다.
성환이 강욱을 한번 쳐다보자 강욱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그와 동시에 성환이 슬며시 문 건너편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히 움직이는 그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얼마 후 성환이 모습을 드러내고 문 건너편이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강욱은 준희의 등을 밀어 먼저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그녀가 안전하게 문 건너로 사라지고 나서야 복도를 다시 한 번 돌아본 뒤 자신도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준희는 커다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 혼란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한쪽이 무너진 커다란 테이블과 구석에 쌓인 의자들, 바닥 곳곳을 메운 종이들이 이전에는 이곳이 회사의 안위를 결정하는 회의실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 카얀섬에 진출했던 어떤 기업이 스리랑카의 내전과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철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환과 강욱은 발끝에 걸리는 것들을 피하며 창가로 다가가 자신들을 철저히 숨기면서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이 창가에 자리를 잡는 동안 준희는 자연히 문밖 복도를 살피며 망을 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에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그가 라마카루마를 저격할 장소를 물색 중이지만 준희 자신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이라면……그곳이라면 광장 중앙의 탑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될 라마카루마를 저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위험했다. 목표를 저격하기는 쉬워도 그만큼 노출되기도 쉬운 장소였다. 하지만 준희는 자신이 있었다. 목표를 제거하고 빠르게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비록 그가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준희는 슬쩍 눈길을 돌려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며 적외선 망원경으로 광장을 살피는 강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그에게로 가는 자신의 눈길을 막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눈은 그를 향해 있었다. 가끔씩……아주 가끔씩 그를 향한 미움의 감정을 비집고 들어오는 미움과는 정반대의 다른 감정이……
그가 살아있음을 알았을 때 5년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감정이라는 것을 느꼈다. 미움이든, 증오든, 누구를 향한 감정이라는 것에 눈과 귀와 심장을 닫고 산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음을 알고부터 그녀의 죽었던 심장이 되살아났다.
그저 미움만 있을까? 단지 그에 대한 증오뿐일까?……
준희는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자 급히 그에게서 눈을 돌려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바보……바보. 서준희……어쩔 수 없으면서……기뻤잖아. 길고 긴 암흑의 터널에서 갑자기 한줄기 빛을 만나듯 그렇게 미치게 기뻤잖아. 그를 증오하는 것보다 더한 깊이로 그를 원하잖아……
준희는 물기 젖은 눈을 돌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가끔씩 성환과 나직한 말로 속삭이며 위치를 살피는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잊고 싶었다. 잊으려고 노력했다. 죽을 만큼 노력했다.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의 손길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깨달았을 때는 자신도 세상을 버리려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 이모나 할머니에게는 또 다른 배신임을 알기에……강욱을 잃어버리고 슬퍼한 그들에게 또 다른 절망을 줄 수 없기에……숨 쉬기조차 버거운 이 세상을 살아내었다. 그런데 그가 살아서……저렇게 살아서 자신의 앞에 숨 쉬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그 사실만으로도 준희에게는 숨을 쉴 수 있는 의미가 되고 있었다.
그렇다하더라도…그렇다하더라도 그녀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믿고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누군가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강욱과 성환이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환이 먼저 복도로 나가 살핀 후 준희와 강욱이 차례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신속한 움직임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3층 정도쯤 내려왔을까 갑자기 1층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그들의 움직임은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앞서 가던 성환이 곧바로 자신의 가장 가까이 있는 3층 복도 오른쪽 방으로 소리 없이 들어가고 강욱은 마찬가지로 가장 가까이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준희를 이끌었다.
강욱은 순식간에 준희는 벽 구석에 밀어 넣고 자신의 몸으로 그녀와 문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그가 들어 올리는 총구는 조용히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 반항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 1층의 누군가가 군인이라면, 만약 그 군인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건물로 들어온 거라면 총격이 있을 것이다. 총격이 일어나면……그 이후의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몰려올 군인들과 대치해야하는 사람은 겨우 셋. 그것도 한명은 현상금까지 걸린, 그들이 찾으려 혈안이 된 미 해군 소속 특수대원 최강욱이었다.
강욱은 그녀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한 후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밖의 동정을 살피고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를 더욱 벽 쪽으로 밀어붙이고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지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강욱은 그녀를 돌아보며 이 자리에 꼼짝없이 있으라는 수신호를 해보였다. 그리고 문으로 다가가 소리 없이 문을 조금 열었다. 바깥을 살피던 그가 다시 그녀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후 복도로 나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최강욱이 아니었다. 총을 들고 주변을 살피며 재빠르게 움직이는 그는 그녀를 향해 웃어주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거칠고 날카로운 맹수와 다름없었다.
낯설었다. 마치 감정없는 로봇을 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지난 5년동안 무엇을 했기에 저런 모습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로버트 대령이 말하던 ‘살인기계’니 ‘전장의 늑대’라는 별명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조금 전 그의 눈빛에 떠오른 메마름과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한 매서움은 우습게도 지금 그녀에게 아픔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군인으로서의 이성이 더 앞섰다. 비상시 대장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 그것만이 살길이다. 끊임없이 받았던 훈련과 교육으로 준희는 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숨 막히는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준희가 도저히 가만히 기다릴 수 없다고 느낀 순간 문밖에서 그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 가까이로 다가왔다. 조금 전 문을 나서기 전보다는 훨씬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다. 아마도 1층의 인기척이 무사히 사라진 듯 했다.
강욱이 그녀를 이끌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성환을 보고 1층의 누군가가 아무 일 없이 건물을 나갔음을 짐작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물을 빠져나와 곧바로 자신들의 아지트를 향해 숨 가쁘게 움직여야했다. 강욱이 맨 앞에서 길을 트고 준희가 강욱의 뒤를 바싹 뒤쫒았고 그 뒤로 성환이 그들의 뒤를 지키며 움직였다. 그들의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어느새 그들은 아지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준희는 침대에 걸터앉아 어스름히 들어오는 달빛을 보고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멍하니 한번 앉아있고 싶었다. 로버트 대령이 대한민국해군으로 자신을 찾아왔던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고 힘들게 지나갔다. 지난 5년동안 느꼈던 감정을 단 며칠 만에 너무나 격렬히 시달려 조금 쉬어주고 싶었다. 미움도, 증오도, 미련도, 각오도 모두 잊고 쉬고 싶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쉬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준희는 문득 자신이 있는 방문이 살며시 열리는 작은 소리에 방문을 바라보았다.
!
강욱이었다. 준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오던 그가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뭐하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강욱은 대답도 않은 채 다시 걸음을 옮기더니 방 한구석에 들고 온 침낭을 털썩 내려놓았다.
“뭐하는 거냐고?”
“자려고.”
그의 뻔뻔스러운 말에 준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갈며 다시 질문했다.
“여기서 자겠다는 거야?”
“……”
강욱은 침낭을 반듯하게 펴고 몸을 펴더니 곧장 웃옷을 벗어 옆의 탁자위로 던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구리빛 상체는 강인한 물결을 이루며 빛이 났다. 그리고 강욱은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낭위에 몸을 뉘었다.
“최강욱.”
그녀가 다시 음울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가 마침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긴 내가 자던 방이야. 침대는 너에게 뺏겼더라도 방 전체를 내줄 수는 없어. 내가 잘 수 있는 다른 방도 없고.”
방이 없다니. 이 방문 밖에만 해도 방이 2개는 더 있었고 또 위층에도 방이 있었다. 그런데 방이 없다니.
“저 밖의 다른 방들은 방이 아닌 모양이지?”
“그래. 잘 수 있는 방이 아니야. 엉망이거든.”
그의 느긋한 말에 준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있는 준희를 보다 강욱이 드디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느니 그냥 잠이나 자. 네가 그러고 있다 해서 내가 나갈 것도 아니고, 널 어쩌려고 할까봐 걱정이라면 그것도 걱정하지 마. 난 지금 당장 눈만 감으면 잠들 정도로 피곤하니까.”
그리고는 정말로 눈을 감고 미동도 없는 그를 바라보며 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뻔뻔하고 철면피 같으니……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성을 잃고 행동하면 할수록 그에게 지는 것이니까.
준희는 다시 침대에 털썩 앉아 드러누웠다. 그리고 날씨가 아주 더운데도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말이 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준희야.”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에 준희는 눈을 살짝 떴지만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다시 조용한 공간을 뚫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아프니?”
!!
준희는 그의 조용한 물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훗. 아버지? 아버지라……그녀에게 아버지가 있었던가……?
그녀가 그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는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린 후였다.
“……아니.”
짧은 대답이었다. 그 짧은 대답 속에 그녀는 모든 의미를 담았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녀의 무엇도 아니라고.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에게 어떤 영항력도 행사할 수 없다고……그녀의 짧은 대답 속에 든 의미를 이해했는지 강욱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라는 이름의 그 사람을 떠올리면 자연히 또 다른 아이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의 이복 여동생, 서희수……그 아이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그때가 아마 자신이 저격수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던 그 해였을 것이다.
준희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부대를 나서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다른 생각 같은 것은 들어서지도 못하게 바쁜 나날을 보냈다. 퇴근을 하고 나서도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책을 읽고 청소를 하고 하다못해 운동복을 입고 달리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녹초가 되어 침대에 들었다. 이렇게 몸을 혹사하다보면 다른 것들은 잊을 수 있었다. 처음 저격수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한 목표가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였고 그때 붙은 습관은 지금껏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부대를 벗어나고 있었다. 정문을 나서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흠칫 놀란 준희는 자신의 앞에 선 여자가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기억하려 애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가 자신을 밝히기 전까지는.
“왜 이렇게 퇴근이 늦어?”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준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얼굴에 예쁘장한 여자였다. 가냘픈 몸매에 하늘거리는 하늘색 원피스가 몹시도 어울렸다.
“누구십니까?”
“누구긴! 몰라서 물어? 네 아버지 딸이다.”
여자의 말을 준희는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딸? 아버지의 딸이라면……그래. 기억이 났다. 그 사람에게 아들 하나에 딸 하나가 있었지. 쿡. 그래. 그랬었지, 1남 1녀. 그 사람의 자식 구성은 1남 1녀였다.
준희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서희수를 감정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이 영창에 갇혀있는 동안 자신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강욱을 어찌 대했는지 나중에 들었었다. 그때부터 준희는 아버지를 버렸다. 그 사람이 자신을 버렸듯 준희도 그 사람을 버렸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다른 모든 사람도.
“비켜.”
준희는 그녀를 밀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만원짜리 하나 있어?”
뭐? 준희는 너무도 어이없는 그녀의 질문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참나. 또 말해? 돈 만원 있냐고. 여기 올 때 택시 타고 왔는데 다시 돌아갈 차비가 없어. 만원만 줘.”
너무도 당당하게 돈을 달라는 그녀를 준희는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우스운 아이였다.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닌데도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와 길게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준희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안 갚아도 돼지?”
생긋 웃으며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준희는 그제서야 그녀가 여기 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잊을만 하면 그 아이는 자신의 앞에 나타났고 항상 작게는 천원, 많게는 만원을 달라고 했다.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그리고 한 번도 자신이 왜 준희를 찾아오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준희 또한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뭔가에 궁금하고 신경 쓸 감정 같은 것은 준희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서희수는 그렇게 돈을 가져가면 꼭 다음에 올 때는 뭔가를 가지고 왔다. 오다가 맛있어 보여서 샀는데 맛이 없다며 과일봉지를 내밀었고, 또 어떤 날은 자신에게는 똑같은 것이 있다며 준희에게 가지라고 예쁜 핀을 내밀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받은 것들이 값으로 치면 그녀가 준희에게서 받아간 돈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얼마 후 준희는 심한 감기몸살로 부대로 출근을 하지 못한 날이 있었고 그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희수, 그 아이가 준희의 원룸으로 찾아왔다. 죽이며 음료수며 먹을거리를 잔뜩 사가지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벨소리를 견디다 못한 준희는 현관문을 열어주었고 안으로 들어온 희수는 준희의 집을 제집인양 종횡무진 휩쓸고 다녔다.
“아니. 냉장고가 이렇게 텅텅 비어서는 뭘 먹고 산거야? 이것 봐. 물밖에 없네. 그래도 청소는 하고 사나보네.”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 잔소리가 싫어 준희는 그대로 자신의 침대로 들어가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준희가 다시 깨어났을 때 희수는 가고 없었고 식탁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죽과 작은 반찬그릇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준희의 원룸을 드나들기 시작한 희수를 어느 날부턴가 준희는 별로 꺼리지 않게 되었고 어떨 때는 아무 말이나 툭툭 내뱉으며 항상 재잘거리는 희수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나마 그 아이가 있는 동안은 자신의 외로움이 조금은……아주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희수가 차려놓은 밥상 앞에 마주앉아 밥을 먹고 커피를 한잔씩 하고 있었다.
“당분간 못 와.”
희수의 말에 준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희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준희는 희수가 오지 않는다는 말에 왜 자신이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우리 아버지……아주 나쁜 사람이야.”
준희는 그녀의 망설이며 늘어지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쁜 사람이야. 그리고……서희준……오빠는……불쌍한 사람이야.”
“그만 가라.”
듣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이나, 서희준 그 개자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서희준을 불쌍한 사람이라 칭하는 희수, 저 아이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준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다급한 희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오빠야! 우리처럼 피가 섞인 친오빠라고.”
!!
준희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의 친오빠라는 것인지……준희는 서서히 몸을 돌려 희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서준희와 서희수가 피가 섞인 자매 듯이 서준희와 서희준도 피가 섞인 오누이라고. 아버지만 같은.”
하! 말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서희준과 준희는 겨우 10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서희준이 1년 선배이지만 개월 수로 따지면 10개월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언젠가 해사시절 그의 기록부를 본적이 있었고 분명 그의 생일이 그녀보다 열 달정도 빠른 걸로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아무리 아이를 낳는 것에 무지한 준희도 그만한 계산은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만한 계산을 못하더라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었다. 서희준이 태어났을 때 준희는 친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고 그 당시 준희의 생모는 아버지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강타하는 강렬한 충격에 준희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희수를 쳐다보았지만 희수의 눈은 준희가 지금 하고 있는 짐작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큭큭큭. 아하하하하하하”
준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그녀의 몸을 뒤흔들고 그녀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녀와 그녀의 돌아가신 친어머니는 서남일 대령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생생히 살아있는 아내의 뱃속에 자신의 아이를 두고도 이미 그는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 이전부터였겠지. 준희가 생기기전부터 서남일 대령,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지금의 서남일 대령의 부인이자 희준과 희수를 낳은 여자.
기가 막혔다. 피를 토하고 싶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런 아버지도 아버지라고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자신에게 침을 뱉고 싶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자신이 해사로 진학만 하지 않았다면 강욱은……강욱은……
“아아악!”
준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바보같은 멍청이인 자신을 죽도록 패주고 싶었다.
아아……강욱아……아아……미안해……너한테 미안해서……
준희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희수를 쳐다보았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 남자와 피가 섞인 사람이라면 다 꼴 보기 싫었다.
“나가.”
“언니……”
언니? 훗. 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언니라는 호칭에도 준희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 호칭조차도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꺼져. 꺼지라고!”
그녀의 거칠고 광포한 목소리에 희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전 희수는 문득 멈춰서 준희를 돌아보았다.
“나 내일 비행기로 파리로 가. 희준 오빠도 같이 갈 거야. 오빠가……오빠가 사실을 알고부터, 언니가 자신의 친동생임을 알고 너무 괴로워해서……오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했어. 자신이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닌 줄 알았거든. 엄마도 아버지도 당신들의 불륜이 자식들에게 알려질까 그냥……오빤 언니를 질투했어. 아버지의 친딸인 언니를 질투해서……미안해……그냥 난 언니가 보고 싶었어. 언니가 존재한다는 걸 안 순간부터 언니가 보고 싶었어. 미안해. 우리 아버지 딸이라서 미안해. 엄마도 나도……오빠도 모두 언니에게 미안해하고 있어. 잘 있어. 다시 돌아오면……다시 돌아오면 그땐……”
한동안 말이 없던 희수는 다시 몇 마디 말을 빠르게 쏟아놓았다.
“밥 잘 챙겨 먹어. 감기 걸리지 말고, 냉장고 가득 채워놔. 그러면 먹기 싫어도 조금은 먹게 되니까……편지 할게.”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준희는 그런 희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아이의 슬픔이나 사과를 받아줄 정신이 없었다. 조금 전 받은 충격으로 준희는 자신에 대한 지독한 환멸로도 벅찼다.
얼마나 괴로웠던가……얼마나 죽고 싶었던가……강욱이 죽은 줄 알고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인 것만 같아 더욱 힘들었었다. 그 죄책감의 무게에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한 세월이었다.
준희는 자신과 같은 방 건너편에 누워있는 강욱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희수, 그 아이의 뒷모습이 몹시 아팠던 것 같다. 아마 그 아이도, 또 서희준도 희생자겠지. 서남일 대령, 그로 인해 상처받은 불쌍한 영혼들 중 하나였다. 자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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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사장님께서 오늘 결근이십니다. 카카카…….(너무 좋아하나^^;;)
신나게 글 썼습니다.
오늘도 행복! 입니다. (전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