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Return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소림사의 미래(2)
생각지 않은 혈교 잔당들의 기습을 받는 바람에 천주지회는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
일성도장을 필두로 한 도가육문의 사람들이 숭사해에서 토왕과 혈풍삼십이사자를 처리하고 소림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천주지회를 주최한 형산파 장문인 일성도장은 천주지회를 내일로 연기한다고 소림과 각파의 사람들에게 공표하고 형산파 도사들에게 배당된 객청으로 들어갔고 다른 문파의 사람들도 자기 문파에 배당된 객청에 들었다.
하지만 도가육문의 사람들처럼 편히 객청에 들지 못하고 슬픔에 빠진 문파가 있었으니 개방과 소림이었다.
개방은 고죽삼개가, 소림은 무량선사와 십팔나한이 혈교의 잔당들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군불위와 방주수신호위들은 고죽삼개의 시신을 개방에 배당된 천막에 모셔놓고 슬픔에 빠졌다.
“아니, 방주께서는 어디서 뭘 하시는 거지? 낮에 변소엘 간다고 하고는 사라져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니……?”
“천안전주께서도 안 보이셔. 방주님을 찾으러 나가시더니 그 길로 오시지를 않네.”
“에휴. 방주님과 천안전주님은 행방불명이고, 고죽삼개께서는 변을 당하시고……! 천주지회고 뭐고 우리 개방은 초상집이네.”
방주수신호위들은 낙담에 빠졌고, 군불위는 고죽삼개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세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
고죽삼개가 누구인가. 일찍이 전전대 맹호동 방주와 인연을 맺어 개방에 투신한 뒤 공수정심, 의협을 기치로 건 개방이 제대로 나아가도록 앞장서서 이끌어 준 사람들이었다.
맹호동 방주가 변사를 당한 뒤, 대부분의 개방도들과 다른 장로들이 정의파로 전향했음에도 오의파 장로로서 절개를 간직한 채 개방도답지 않은 개방도로 살지 않겠다며 홀연히 개방을 떠났던 고죽삼개였다.
그리고 젊은 새 방주가 오의파를 재건하고 개방을 새로 만들 때 팔을 걷어 부치고 오의파를 몰아내는 데 앞장섰으며 다시 오의파 개방이 제대로 자리를 잡도록 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개방이 새 방주를 맞이하여 개방다운 개방이 되었고, 이제 중원천지에 개방이 재평가를 받고 천하제일방파다운 대접을 받을 일만 남았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흐흑!”
누구보다도 고죽삼개의 고매한 정신을 잘 아는 군불위가 흐느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소림사의 전대 조사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조사전에 딸린 첨방에 무량선사와 십팔나한의 시신이 옮겨져 있었다.
똑! 똑! 똑! 똑!
필과요문법~ 요당성불도~ 광제생사류~ 설과세계화~ 필과요문법~
조사전 관리를 맡은 무당선사가 첨방 안에 들어 무량선사와 십팔나한이 들어 있는 19개의 관 앞에다 향을 피우고 그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대무량수경을 외며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똑! 똑! 똑! 똑!
열학지대문~ 괴리연탁야~ 정심인제대~ 가령지령법~
나한당 소속의 소림 무승 수십 명이 조사전 앞에서 무당선사의 낭랑한 불경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개중에는 분노에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나한당의 중심인 무량선사와 십팔나한을 적당들의 손에 잃었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똑! 똑! 똑! 똑!
제일과제약~ 적정이완화~ 지정대세례~ 미황일지문~
아미파의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등신고당도 거기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무당선사의 불경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등신고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등신불(等身佛), 그러니까 사람의 몸에 황금을 입힌 불상이었다.
이 등신불에 자신의 몸을 공양한 사람은 당나라 무종(武宗) 때 소림방장이던 고척대사였다.
당나라 무종은 황위에 오른 뒤 서북쪽 이민족들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도교의 신봉자로서 이민족의 종교인 불교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러던 중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던 도사 조귀진의 사주에 의해 폐불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는데 중원 전역의 수많은 사찰의 재산이 몰수되고 승려들은 환속을 명령받았다.
당연히 소림사에도 폐찰(廢刹)을 하라는 황명이 떨어졌는데 방장 고척대사는 홀로 황실을 찾아갔다.
황제에게 소림사가 자발적으로 30년 봉문(封門)에 들어갈 터이니 폐찰만은 철회 달라는 상서를 올리고 고척대사는 황실의 성문 앞에 꿇어앉았다.
당시는 살을 에는 한 겨울이었는데 황제의 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그 상태로 물 한 모금조차도 먹지 않은 채로 버텼으므로 고척대사는 그 자세로 서서히 죽어갔다.
고척대사가 상서를 올린 지 한 달 만에 폐찰을 철회한다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고, 그걸 고척대사에게 전했을 때, 고척대사는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고척대사의 모진 항거(?) 덕에 소림사는 폐찰을 면할 수 있었지만 고척대사의 끊어진 목숨은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당시 소림승려들은 그렇게 앉은 채로 죽은 고척대사의 시신을 산사로 옮겨 시신에다 금물을 부어 등신불을 만들었는데 지금 등신고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 바로 그 고척대사의 등신불인 것이다.
모진 법난에 자신의 신체를 공양해 소림사를 구한 고척대사의 정신은 등신고당에 등신불로 남아 지금까지 소림사의 수호신 노릇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 달 전 천주지회에 참가하기 위해 아미파를 떠나온 아미파 사람들, 장문인 정현사태와 복호당주 정양사태, 그리고 10명에 달하는 복호승 비구니, 정명은 소림사에 도착하자마자 이 등신고당으로 들어와 고척대사의 등신불 앞에서 관불(觀佛) 수행에 들어가 있었다.
관불 수행은 입으로 불경을 외며 하는 염불(念佛) 수행과 달리 부처를 보면서 부처의 상호(相好)와 공덕(功德)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관찰하며 조용히 하는 수행법으로 관불삼매(觀佛三昧)라고도 한다.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시작한 수행이었지만 석가모니의 수행은 감정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고 엄청난 고행의 시간을 견뎌낸 뒤에 얻어졌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석가모니는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이지 않았던가.
불가에 입적하면 그때부터 인연과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탈속(脫俗)은 그렇게 어렵기만 한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척대사의 등신불 앞에 앉았을 때부터 정명의 두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일국의 왕자라는 안녕을 버리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신을 던진 석가모니, 소림을 구하기 위해 한 겨울 냉기에 몸을 던진 고척대사가 있는데 자신은 세속의 인연 하나를 떨치지 못해 대불가(大佛家) 아미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자신이 여린 몸을 던져 아미를, 불가를 구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통에 일그러져 있는 등신불의 면상(面相)을 주시하며 그런 기회가 와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호법당주 무한선사와 호법승들도 숙소에 들지 못했다.
단오절을 기한으로 소림의 퇴거를 명한 황로가 어떤 식으로 소림에 위해를 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호법당주 무한선사는 100명에 달하는 호법승들을 모두 동원해 소림사 경내의 중요한 곳에 경계를 세우고도 모자라 소림사의 산문을 비롯한 사림사의 주위 곳곳에도 경계를 서게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인이 경내에 한 사람이라도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
무한선사가 쉬지 않고 순찰을 돌며 소림의 경내, 외에서 경계를 서는 호법승들을 격려했다.
* * *
소림사의 경내, 외 곳곳에서 호법승들이 예기를 피워내며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소림의주요 전력은 소림의 지하에 있었다.
그 소림의 지하에 나한정(羅漢井)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수련관이 있었는데 소림승들조차도 이 나한정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나한정에 나한당 소속의 백팔나한이 열을 지어 앉아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원래 나한(羅漢)이란 불교의 수행을 완성하여 공양, 존경을 받을 만한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수행의 가장 높은 지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자로서 부처가 열반했을 때 그 법을 전수받아 보호하고 지키는 수행자의 역할을 한다.
특히 나한은 소림이 중원에서 신체를 단련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무가(武家)로 발돋움하면서 불교도로서의 정신뿐만 아니라 수호자의 역할을 완벽히 해 낼 수 있는 사람, 신체적으로도 완성된 사람을 의미했다.
언뜻 생각하기에 백팔나한이 십팔나한에 비해 그 무위가 많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십팔나한과 똑같이 그들이 하는 수련을 다 수행하고 그들이 익히는 무공을 다 익혔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 중에서 특별한 18명이 뽑혀서 십팔나한이 되었으므로 십팔나한이 백팔나한에 비해 그 무위가 조금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백팔나한은 수적으로 월등했으므로 소림의 주력은 십팔나한보다 백팔나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나한정에 백팔나한 말고 또 하나의 무리가 나한정의 반을 차지한 채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백팔나한과 비슷한 숫자의 그들은 특이하게도 핏빛처럼 붉은 승복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혈승(血僧)들이었다.
불교도들이 지켜야 할 계율, 불자오계(佛子五戒) 중에서도 제일계(第一戒)가 살아있는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게 불살생계(不殺生戒)인데 소림사에 적을 둔 승려들이면서도 그들은 불살생계를 면제받은 승려들이었다.
그래서 핏빛의 승복을 입고 살생의 도구인 검을 차고 있는 것이다.
소림의 지하에 숨겨진 요새, 나한정이 만들어지고 혈승들이 조직된 건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때에 있었던 두 번째 법난(法難) 때였다.
당시 소림사는 황실로부터 폐찰을 명령받아 모든 승려들은 하산하여 환속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승려들이 소림에 남아 관인들 몰래 나한정을 만들었고, 또 상당수의 승려들은 비소림(秘少林)을 만들고 그 비소림에서 혈승들을 키웠다.
비소림은 멀리 있지 않았다.
소실봉의 바로 뒤에 있는 봉우리, 거대한 바위산이었던 협렵봉(狹獵峰)의 중간을 파 들어가 거대한 지하 공간을 만들고 거기다 비밀리에 작은 소림사를 만든 것이었다.
소림의 승려라 해도 나한정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만큼 비소림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았는데 그 비소림의 모든 승려들은 열화신검(烈火神劍)을 익혀야 했다.
열화신검은 소림72절예 중에서도 특별한 살공(殺攻)들 만을 골라 조합해 만든 치명적인 검술이었다.
오직 혈승들은 열화신검을 발휘할 그날만을 기다리며 비소림에서 검술을 연마했는데 혈승들은 소림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거나 소림무승들이 처리하기 거북한 일을 할 때에만 소림방장의 허락을 받고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황로에 의해 소림이 극한의 위기에 처한 지금, 비소림의 모든 혈승들이 비소림을 나와 나한정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혈승들을 이끄는 혈승장(血僧長)은 공허대사였다.
몇 년 전, 아미파의 공명과 불사음계을 어긴 일로 소림에 큰 누를 끼친 후 그는 스스로 비소림에 들어가 혈승이 되었고, 원래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었던 지라 곧 혈승들을 이끄는 혈승장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