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inary Art Factor RAW novel - Chapter 19_1
7-1
“간만이우다. 형.”
“…….”
“허… 또 까먹어수꽈? 나우다, 나. 현 가.”
미친놈이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본인 소개를 한다. 음… 그러고 보니,
“아! 현지훈!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맞다.
분명 맞다.
얼굴에 기다린 자상이 있어서 잠시 헷갈렸는데, 저놈은 분명 현 가 놈이 맞다.
20대 초, 중반에 한창 유흥과 도박에 빠졌을 때 그렇게나 날 쫓아다니며, 형님, 형님 하면서 아부를 떨던 놈.
2년 전, 내가 처음 각성하게 된 용담 10등급 기갑 던전에 먹혔을 때, 그때 던전 클리어하러 들어와 나와 다시 마주친 놈.
그리고 그 던전 안에서 지금까지 그나마 성실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던 내 가치관을 치욕과 모욕으로 더럽힌 놈.
짧지만, 충실한 내 삶을 자신의 한때 놀림거리로 만들어 버린 전형적인 소인배, 아리아 길드 제주지부 소속 각성자, 현 가 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주시청 6등급 던전에서 내 심장에 구멍을 뚫리게 만든 하수인의 숙주로 짐작되었던 놈.
그 놈이 바로 내 앞에 서서 빈정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우연?
좆까지 말라고 그래.
이런 장소에서, 이런 우연이 있을 리가 있나!
지금 저 놈이 날 쳐다보는 독사 같은 눈빛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간다. 먹음직스런 쥐를 앞에 둔 포식자 같은 눈빛.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니가?
감히 니가?
찰나의 시간에 수많은 옛 기억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현실로 돌아온다.
“하하하. 거기, 마법사들! 마력 발현 안 될 거야, 괜히 용쓰지 마. 이 근방 500m 내에 마력 차단 증폭기를 수없이 매설해놨거든.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부터 이런 개인화기에도 당신들은 실드나 힐 같은 마법을 쓸 수 없다는 뜻이지. 아직도 이해를 못한 분들을 위해, 깜짝 이벤트!”
놈이 이상한 말을 잔뜩 설명하더니, 품에서 권총을 꺼내 전방에 자릴 잡은 길드원 한명에게….
‘타앙!’
“스, 승기야!”
“뭐, 뭐야!”
“씨팔! 지금 뭐 하는 짓이야!”
“…….”
“다들 움직이지마! 조금이라도 허튼 짓하면 다 뒤지는 줄 알아!”
‘처처척, 철컥.’
놈의 권총 소리가 신호였는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의 군인들이 일제히 자동소총을 장전하자, 쓰러진 4팀 전사 승기에게 급하게 달려가던 팀장급 얘들과 길드원들이 갑작스럽게 멈추어 선다.
“혀, 형님!”
“길드장님!”
“…….”
음….
지금 이게….
“하하… 그렇게 당신네 길드장을 아무리 불러 봐도 답이 없을 거야. 그쪽에 있는 형도 마법사에 아트팩터 맞지? 마법사 직군이면 당연히 마력 차단 증폭에 걸릴 거고, 그럼 소환은 무슨 얼어 죽을… 크하하하.”
“이, 이익!”
“승기야! 괜찮아?”
“씨팔! 지금 왜 우리한테 이러는 건데! 우리가 너흴 도와주러 온 거잖아!”
“하, 참나. 아직도 이렇게 순수하신 분이 있을 줄이야. 아… 혹시, 고한득 팀장님?”
“…….”
“사진으로 본 게 맞는 것 같구만. 어이, 젊은 친구. 잘 들어. 지금 이 상황이 왜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무, 무슨 말이냐!”
현 가 놈이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길드원들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징그럽게 웃더니 입을 열어 나불나불 잘도 까불어 댄다.
“이게 다 잘나신 누구 덕분이라 할 수 있지. 나도 예전에는 꽤 잘나가던 중견기업 소속 제주지부의 과장이었는데 말이야. 아, 그러고 보면 고향 후배들이군. 크하하. 예전 제주지부 방위 파티 선점을 뺏긴 시점부터 내 인생이 존나 꼬이기 시작했지.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봐도 제주에선 그때 당시의 지원 파티를 당할 자가 없었지. 그래서 일찌감치 이쪽으로 넘어왔어. 일본은 한국만큼 각성자 마력 법률에 대해 까다롭지 않거든. 이곳은 천국이야, 웬만큼 해서는….”
음….
더는 못 들어 주겠다.
승기 문제도 있고.
난 혹시나 싶어, 한쪽에서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무차관에게 물었다.
“어이! 거기 사무차관!”
“네, 네. 지원 길드장님.”
“지금 이 상황, 당신이 주도한 건가?”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지원 길드와 좋은 관계를 맺고….”
“그래? 그럼 됐어.”
“우와~ 존나 센 척 하네? 지원형, 미쳤어?”
미치긴.
하도 어이가 없는 거지.
“거기, 승기 괜찮냐?”
“… 사,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옮기지 않으면….”
옆에서 승기 상태를 지켜보던 길드원의 말에 난 걸음을 옮겼다.
“어이, 아저씨! 움직이지 말라니까!”
“기, 길드장님!”
“혀, 형님!”
언제부터 내가 아저씨였지?
아, 나이 40이 넘어가니 아저씨가 맞는 건가?
그럼 이제 나도 중년이군. 크음.
내가 승기에게 걸어가기 시작하자, 현 가 놈이 나에게 권총을 겨루며 고함을 지른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말라고!”
그러든가 말든가.
주변을 보면 항상 그렇더라?
왜 꼭 싸우기 전에 죽인다, 없애버린다 말로만 지랄하고, 씩씩거리다 그만두는 건데?
싸울꺼면 확실하게 싸우고, 엎을 거면 확실하게 엎고, 그리고 죽일꺼면 확실하게 죽이던가!
각성자 세상에 발을 들였으면, 갈팡질팡하지 말고 확실히 하라고!
그런 정신 상태로 최고위급 던전 클리어에 공헌도 1% 라도 기여하겠냐?
미친 새끼.
됐다. 신경 끄자.
놈이 존나 어이가 없어서 내가 할 말이 없다.
현 가 놈을 무심히 바라본 후 공터 바닥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승기에게 거의 다다를 때쯤,
‘타앙!’
살얼음판의 고요한 주변에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형님!”
“길드장님!”
“오빠!”
“씨꺼!”
내 말 한마디에 안 그래도 조용했던 공터에 묘한 침묵이 흐른다.
멍하니 서서 날 쳐다보는 팀장급 얘들과 길드원들.
침 닦아라.
보기 더럽다.
“… 기, 길드장님!”
“… 형님!”
“뭐야! 공포탄이었어?”
“무슨! 그럼 승기는!”
얘들이 정신을 차려 한마디씩 내뱉을 때, 난 현 가 놈을 무심히 쳐다봤다.
부르르 떨리는 두 손 때문에 권총이 바닥에 떨어질 듯 위태롭다.
“그거 가지고 한 번만 더 장난치면, 뒤.진.다.”
“이… 이익!”
시뻘게진 얼굴을 보아하니 꽤나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신경 껐다.
지금 당장 저 놈을 처리하는 것보다, 길드원 부상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난 바닥에 드러누워 꿈틀대고 있는 4팀 전사, 승기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냐?”
“크으으. 기, 길드장님.”
“쯔쯔. 대(大)지원 길드 전사가 총알 하나 막지 못해서야, 어디 써 먹겠냐?”
“무, 무슨 마, 말도 안되는 말씀을… 크헉.”
“쩝. 됐다. 약하게 키운 내 잘못이지. 닥치고 이거나 마셔.”
난 승기에게 걸어오며 미리 소환해 둔 이데아 치료 포션을 바닥에 툭 던지자, 옆에 있던 길드원들이 달려와 뚜껑을 열어 반은 관통상에 붓고, 반은 녀석의 입으로 흘려 넣는다.
“크아아악!”
주변 길드원들의 도움으로 포션을 왼쪽 옆구리의 관통상에 붓자마자 하얀 거품이 일기 시작하더니,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저렇게 잠시만 기다리면 새살이 돋아나고, 안에 있는 장기까지 치유된다. 물론 포션의 등급과 종류에 따라 치유 속도와 통증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문제는 존나 아프다는 것.
그래. 아프겠지. 존나 아프겠지.
예전에 나도 가슴에 구멍이 뚫릴 때 포션을 먹어봐서 아는데, 저거 존나 아프….
“… 이,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타앙! 타아앙!’
하… 이 개씨팔쌍놈의 좆같은씨밤바 새끼가!
“씨팔새끼가! 내가 한 번만 더 장난치면 뒤진다고 했지!”
한창 승기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데, 총성이 울리더니 날 보호하던 어둠의 암살자들의 기다란 대검이 어지럽게 휘둘러지며 총알을 튕겨낸다.
만약 어둠의 암살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난 놈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암살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거 잘라버려.”
‘스걱!’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현 가 놈의 오른팔이 허공에서 갑자기 잘려진 채 바닥에 나뒹군다.
“크아아악! 쏴! 쏴 죽이란 말이야!”
‘투타타타당!’
‘타타당!’
‘팅! 티티팅! 팅!’
“이것들이! 그래, 해보잔 말이지? 좋아! 다 잘라버려!”
놈의 명령에 수십 명의 군인들이 나에게 일점사 한다. 그리고 이어진 내 명령에 사방에서 군인들의 팔과 다리가 허공에서 잘려진 채 피분수를 내뿜으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크아악!”
“아아악!”
“な、何だ!”
“見えない何かがいて!”
“으으….”
씨팔!
차라리 다 죽여버릴까?
아니다. 지금 이 방식이 놈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더 효과적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대상,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언제 당할지 모를 막연한 공포, 그리고 여기에다 약간의 동기부여만 된다면….
“지금부터 내게 총구를 겨루는 놈은 팔이나 다리가 아닌 대가리가 잘릴 거야! 사무차관!”
“… 네? 네, 넵!”
“통역해!”
“네, 넵!”
“射撃中止! 射撃中止するよう! 死にたくないなら、総しまえ! 捨てろということだよ! この人が誰なのか知らない? ….”
한쪽에서 군인들에게 제압되었던 사무차관이 앞으로 뛰쳐나와 뭐라고 고함을 꽥꽥 질러대고, 내가 말한 경고와 사지가 잘린 군인들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에 점차 몇몇 군인들이 머뭇거리며 조금씩 총구가 바닥을 향한다.
자신들의 무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무언가가 자신들을 공격한다.
처음이 중요하지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점차 상대하기를 포기하는 듯한 분위기가 퍼져나가는데,
“크으윽. 쏴! 쏘란 말이야! 저 새끼 죽여… 뭐야? 와다나베! 뭐 하는 짓이야!”
“…….”
현 가 놈이 그제야 자신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챘는지, 주변에 있던 40대 중반의 군인에게 다가가 남은 한 손으로 멱살을 잡는다. 어떤 사이인지, 뭐 하는 관계인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와서 저 놈의 명령을 듣는지 모르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주변을 둘러봐라.
수십 명의 군인들이 사지가 잘린 채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고, 잘려진 팔과 다리가 주변에 널려있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흘린 피비린내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머지 군인들의 굳은 표정엔 포기와 절망, 두려움과 공포가 한데 뒤섞여 있다.
내가 마치 그들을 이렇게 만든 포악한 악마 같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들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
그리고 난 왜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모르겠다. 아니, 내가 확실히 아는 건 하나 있다.
이게 다 저놈이 자초한 일이라는 걸.
그래. 악연은 여기까지.
이만 끝내자.
잘 가라.
‘스걱!’
40대 중반의 군인 멱살을 잡고 거친 고함을 질러대던 현 가 놈의 대가리가 잘려 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오고, 높게 치솟던 핏줄기가 낮아지더니 놈의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진다.
“아아….”
“혀, 형님!”
“길드장님!”
주변에서 날 애타게 부르는 외침과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군인들의 표정에, 내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뭔가가 무겁게 가라않는 느낌이다.
잠시 후.
“대,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우선,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곳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공식적으로 모든 잘못을 시인하며, 지원 길드가 행한 모든 일에 정당방위를 인정합니다. 또한 정신적 피해보상과 앞으로의 재발 방지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
“기, 길드장님. 제발 노여움을 푸시고, 제 말을 끝까지 들어봐 주십….”
“됐어요. 일단은 쉬고 싶네요. 부상자도 있고.”
“네, 넵. 아, 알겠습니다. 일단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사무차관의 비상 연락에 20분도 지나지 않아 수십 대의 구급차와 군용 차량들, 일본 각성자 협회와 정부쪽 요원들이 들이닥쳤고, 공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 군, 경찰, 각성자 협회 인원들까지 합세해 사지가 잘린 부상자들을 구급차로 실어 날랐고, 그들의 떨어진 팔과 다리를 수거해 갔다. 아마도 중급 이상의 포션을 사용하고, 각성자 병원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면 대부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할 것이다.
그러라고 내가 일부러 그들의 팔과 다리만 잘라낸 거니까.
공터가 대충 정리되자, 사무차관과 정부쪽 요원들이 앞 다퉈 나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원인과 과정, 현 가 놈의 소속과 지금까지 있었던 오사카 던전 방어군과의 유착관계, 그들의 처리, 정신적, 물질적인 피해보상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괜히 머리가 더 아파왔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고.
얼른 이곳을 떠나 숙소에 도착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그저 자고 싶을 뿐이다.
사무차관과 정부 요원들의 나불거리는 입을 닥치게 만든 후 길드원들과 함께 기존의 대형버스가 주차된 곳으로 말없이 걸어가다, 문득 뒤를 돌아 던전 입구 앞 공터를 바라봤다.
던전이 비활성화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묘한 빛을 뿌리고 있었고, 그 주변 공터 바닥에는 수많은 핏자국들이 보인다.
던전과 핏자국.
그리고 악연의 결과.
누구는 돈 때문에, 누구는 권력 때문에, 또 누구는 명예 때문에 던전에 들어가고, 목숨을 건다.
난 무엇을 위해 그들을 처단했을까?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각성자의 길을 잘못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오전.
정신이 멍하고,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몸을 지배한다.
먹고 싶은 생각도, 자고 싶은 생각도, 뭘 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제 일은 벌써 잊어버린 기색으로, 너무나 태연하게 팀장급 얘들이 아침부터 내 방에 모여, 내 눈치를 슬슬 봐가며 재미없는 상황극, 꽁트 연기를 시작한다.
한득과 길수, 지혜와 미혜, 김은희와 최은지, 그리고 싸이와 중환까지. 물론 다른 길드원들도 같은 심정이겠지.
안다.
이들이 왜 이러는지.
그래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쿨 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참을 지켜봐도 얘네들이 하는 꽁트는, 한마디로 말해 정말 재미없다.
말 한마디 하다가 내 눈치를 보고, 오버스러운 액션을 취하다가도 내 눈치를 본다.
이러니 분위기만 더 이상해져 가고, 지들도 뻘쭘한지 뒤통수를 긁어대는 일이 잦아진다.
“휴… 됐다. 그만해라.”
“오, 오빠.”
“형님.”
“크흐흑! 주군! 주군의 허무한 심정을 비루한 제가 대신할 수 없다는 게 이토록 원통할 줄 정말 몰랐사옵니다. 주군의 가시는 그 길에 제가 나서서 대신해야 함이 마땅한 줄 압니다만….”
“싸이야.”
“네? 넵! 주군!”
“조용히 좀 해줄래?”
“… 어, 어찌, 닥치라고 하지 않으시는지. 주, 주군. 크흐흑. 주우우구우군!”
“…….”
“싸이 씨, 그만해요. 그리고 오빠, 이러지 말고 우리 나가서 놀… 지는 못하겠네. 아~ 진짜 답답하다. 답답해! … 아, 이러지 말고 마침 점심때 된 것 같으니까, 내려가서 먹지 말고 룸서비스 시켜서 와인이나 맥주 한잔 할까? 기분이 꿀꿀할 땐 술이 최고지!”
“굿 아이디어!”
“콜.”
“제가 시킬게요. 3팀장님. 이것저것 해서 그냥 풀코스?”
“그것도 콜.”
“네. 그러세요.”
지혜의 대답에 김은희가 전화기를 들고 호텔 룸서비스를 이것저것 시킨다.
혹시 이것도 꽁트냐?
잠시 후.
2명의 여성 호텔리어가 룸서비스와 와인, 얼음통에 담겨진 차가운 맥주 등이 놓인 카트를 끌고 내 방으로 들어온다. 그저 말없이 테이블에 음식 셋팅을 기다리는데, 호텔리어 두 명 중 20대 후반 여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한국말로 입을 연다.
“혹시 한지원 씨가 누구세요?”
“어? 한국분이세요?”
“아닙니다. 한국어 전공이라서요. 어떤 분이… 아, 알겠네요. 일주일 전에 어떤 젊은 분께서 이걸 카운터에 맡기셨어요.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하시면서, 오늘 이 시간에 꼭 전달해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여기 이거… 그리고 팁은 괜찮습니다. 그분께 많이 받았어요. 그럼.”
자신의 일이 원래 이걸 전달하기 위함이었는지 내게 조그만 종이박스를 건네주고 방을 빠져 나간다.
“오빠, 여기 아는 사람 있어?”
“형님. 그거 뭡니까?”
“…….”
갑자기 뭐지?
일주일 전? 젊은 분? 굉장히 중요한 거?
더군다나 일주일 전이라면 내가 한국에 있을 때인데, 어떻게 내가 일본에 올 줄 알고?
난 호텔리어가 건네준 주먹만 한, 조그만 종이박스 포장을 뜯었다.
“편지?”
“아까 젊은 분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그게 남자라는 말이야, 여자라는 말이야?”
“와~ 형님. 여기서도 인기 좋습니다?”
네 번정도 접힌 두툼한 질감의 종이 한 장.
정말 편지인가?
누가?
왜?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접힌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피는데, 맨 앞 줄에 적혀 있는 문구가 내 뒤통수를 후려친다.
‘아빠에게.
많이 놀랐지? 켈켈켈.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난 여전히 아빠 아들이 맞아.
그리고 괜찮아?
원래 아빠는 이쯤에서 대충 1년 반정도 침거생활을 했었지.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 이… 씨팔 좆같은 쌍놈의 미친 새끼가!”
“뭔데요?”
“오빠, 왜?”
“…….”
내 갑작스런 고함에 얘들이 옆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이 미친놈이 뭐라고 하는지 다 읽어봐야겠다.
‘아빠에게.
많이 놀랐지? 켈켈켈.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난 여전히 아빠 아들이 맞아.
그리고 괜찮아?
원래 아빠는 이쯤에서 대충 1년 반 정도 칩거생활을 했었지.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신났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그러라고 하고 싶은데, 난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뭐.
그러니까 지금의 나와 잘 놀아주라니까!
맨날 아빠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얼굴 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초등학교 때는 아빠하고 어디 놀러가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물론, 중·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고.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서 지금의 나와 자주 놀아줘. 켈켈켈.
아, 도쿄하고 요코하마는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오사카는 아빠가 정리하는 게 맞고, 여긴 내가 필요한 게 있어서 일부러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앞으로 이틀이면 끝나.
그리고… 그 미친 현 가 놈은 잘 처리했어.
앞으로도 그런 일이 더 있을 거니까, 겨우 대가리 하나 가지고 죽네, 사네, 하지 마.
꼴 보기 싫어. 켈켈켈.
나에겐 위대하고, 존경스런 모습만 보여달라고.
언제까지나.
아, 씨팔! 존나 오글거려! 켈켈켈.
나중에 또 연락할게.
고생하십서~.
Ps. 어둠의 엘릭서 찾고 있지?
뭐, 몇 년 후에 아빠가 찾긴 찾는데, 그때까지 사라한테 갈굼 엄청 당할 것 같으니까, 내가 미리 말해줄게.
영국 브라이튼 해안가, 이탈리아 마테라 협곡 쪽으로 가 봐.
비활성화 된 던전이 있을 거야.
자세한 위치는 싸이 삼촌에게 물어보고.
그럼 빠이~ 켈켈켈.
아, 앞으로 가능하면 삼촌하고 이모들한테 던전 클리어 맡겨.
언제까지 아빠 혼자 뺑이 칠건데?
그럼, 진짜로 빠이~ 켈켈켈.’
“하… 진짜 미치겠네.”
내가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려는데, 지혜가 내 손 들린 편지를 슬그머니 잡아가려고 한다.
쩝. 말을 하던가.
어차피 공유해야 할 일이니….
“그래. 니들도 봐라.”
“응. 땡큐.”
편지를 지혜에게 건네주고 두 손으로 관자놀이와 미간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룸서비스와 와인, 맥주를 처묵처묵하던 길수가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는지 내게 묻는다.
“쩝쩝. 캬~. 형님. 진짜 예전에 사고 친 기억 없어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걸 보면, 아무래도 형님 자식이 맞는 것 같은데… 뭐 정신은 이상한 것 같지만.”
“병신아, 편지 보냈다고 다 니 새끼냐?”
옆에서 한득이가 길수의 말에 나 대신 태클을 건다.
“뭐래? 병신이. 잘 봐봐. 여기하고 여길 보면 완전 형님 말투하고 똑같잖아. 쌩판 모르는 사람이 형님 말투를 어떻게 알겠냐? 그러니까 형님이 예전에 술에 취해서 뭔 일이 있었다는….”
“닭이냐? 니 대가리는 닭대가리야? 형님 나이가 지금 41인데, 20대 중반 애가 있을 수가 있냐? 계산이 안 돼? 더하기 빼기 몰라?”
“모르지 병신아! 고등학교 때 사고 쳐서 애 낳았으면, 맞잖아!”
“중반이라잖아. 20대 중반!”
“언제? 병신아! 20대 초반이라고 했잖아!”
“귀까지 막혔냐? 뚫어줘? 왜 니 귓구멍만 똥꾸멍인데?”
“지랄을 하세요. 다 같이 들었는데, 왜 니만 병신이고?”
너희들 지금 이거 꽁트냐, 아님 진짜냐?
말투와 표정을 보아하니 진짜긴 진짜 같은데, 존나 웃기다.
날 웃게 만들기 위한 꽁트라면 성공이다. 합격점을 주마.
“바보 오빠들! 지금 나이하고 말투 때문에 싸우는 거야? 내용에 핵심을 모르네. 쯔쯔….”
“뭐라냐?”
“몰라. 신경 끄자.”
“응.”
한득과 길수가 지혜의 타박에 말다툼을 멈추고 서로 맥주 캔을 건배한다.
하, 이럴 때는 죽이 또 잘 맞아요.
“거기, 멍청한 오빠들. 잘 봐. 여기 보면 큰오빠 스킬 사라도 나오고 싸이 씨도 언급되잖아. 이게 뭘 뜻 하는 거 같아?”
“… 넌 아냐?”
“… 아니. 그러는 넌?”
“… 글쎄?”
“오빠들, 진짜 웃긴거 알아? 덤 앤 더머 같아. 잘 들어봐. 이 사람은 20대 초에서 중반, 그리고 큰오빠 말투를 흉내 내고 있고, 싸이 씨를 삼촌이라고 불렀어. 더군다나 우리만 알고 있는 큰오빠 스킬, 사라도 언급하고 있지. 거기에 자신을 자꾸 큰오빠의 아들, 성준이라고 밝히고 있고, 마지막으로 저번부터 여기에 적힌 대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고 있다고 판단 돼. 그럼 뭐겠어?”
“…….”
“…….”
시파! 나도 궁금하다.
뭔데?
“아, 진짜! 이래도 몰라? 엄청 간단하거 아냐!”
지혜의 답답한 외침에 방 안에 있는 모든 이가 집중한다.
“대략 15년 뒤! 미래에서 온! 큰 오빠의 아들! 성준이잖아!”
“…….”
“… 싸, 쌍….”
“… 헐….”
“그, 그게 뭔 소리예욧!”
씨발년!
때릴까?
격렬한 논의 끝에 결국은 내 아들을 흉내 내는 미친놈의 정체에 의문을 가지는 것에 대해 잠정적 중단하기로 다 같이 동의했다. 아니, 지혜의 답답한 외침 이후에는, 아무도, 어느 누구도, 편지와 내 아들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저 실실 웃으며 맥주를 처묵처묵하고, 헤헤 웃으며 와인을 홀짝이고, 껄껄 웃으며 음식을 퍼 먹을 뿐이다. 물론 그 모든 행동이 지혜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루어진다는 게 더 웃기긴 하지만.
꽁트인지, 진심인지는 몰라도, 이 미친놈의 편지와 얘들의 리액션에 조금은 내 기분이 풀어졌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이걸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지만, 뭔가 훌훌 털어버린 느낌이다.
꽉 막혔던 가슴이 시원해졌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고맙다.
모두 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하는데, 뭘 털어버렸는지는 묻지 마라.
나도 모르니까.
늦은 오후.
만장일치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쿄와 요코하마 사태가 해결되지 않았다며, 앞으로 모든 경호는 협회와 국가에서 책임지겠다며, 앞으로 절대 어제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며, 정신적인, 물질적인, 그 어떤 책임도 다 짊어지겠다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사무차관에게 3일 내로 처리 안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공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미친 아들 흉내를 내는 녀석의 편지에는 분명 이틀이면 된다고 했으니, 일단은 기다려 볼 심산이다.
물론 제주에서 도쿄까지 전세기를 타면 금방이기도 하고.
길드 전세기를 이용해 제주국제공항에 도착 후 간단히 던전 클리어팀 해산식을 가진 뒤 팀장급 얘들과 외도로 향했다.
내 집도 외도, 얘네들 집도 내 집 근처에 있으니, 어차피 같은 방향이다.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과 함께 검은색 SUV 차량을 이용, 외도 해안가 집 앞에 도착하자 경호팀의 연락을 받았는지 정문 앞에는 부모님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간단히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자고 한 뒤 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나에게 달려드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빠를 연발하는 귀여운,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금쪽같은 내 새끼.
아들 녀석의 뺨과 입술에 뽀뽀를 가장한 부비부비를 한 뒤 도망치려고 바둥거리는 녀석을 내려놓고, 부모님과 장인어른, 장모께 인사드린 후 팀장급 얘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길수 놈이 쪼르르 내 옆으로 다가와 아들에게 한마디 한다.
“어이, 성준. 니가 일본에서 형님에게 편지를 쓴 미친놈이 맞아?”
“… 길수 삼촌, 그게 무슨 말이야?”
“…….”
“…….”
‘퍼어억!’
“아아악! 왜, 왜요?”
“뭐? 미친놈이 맞아? 그래, 맞아라! 맞아서, 죽어라! 씨밤바새꺄!”
‘퍼억! 퍼어억!’
“아악! 아아악! 형님! 아니 길드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