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435
434화
-잊힌 사도(2)
윤나진은 새로 생긴 던전 게이트 앞에 섰다.
“이거, 히든 던전인가 봐.”
가끔 히든 던전까지 완료해야 던전이 공략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일단 던전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한 뒤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공략에 돌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장 조자룡도 텔레파시를 통해 그렇게 말해오고 있었다.
[와서 충분히 쉬고 가거라. 너 지금 사흘을 내리 싸웠어!]자신의 딸을 걱정하듯 애타게 외치는 조자룡의 말에도 윤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부님.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흐려진 걸 거다. 서둘러 돌아와!]“정말이에요. 누군가가, 누군가가 절 부르고 있어요.”
[나진아! 나진아!]“전…… 가야겠어요.”
윤나진은 그 말을 남기고 홀린 듯이 게이트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녀 스스로 말한 대로 정말 누군가가 부르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이 만남이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크게 바꿀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자신은 이 만남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윤나진은 게이트로 발을 들여놓았다.
“아……. 아…….”
그곳에서 만난 이는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존재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윤나진은 그에게 몸과 영혼, 그리고 운명까지 모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보스 흰나비가 마지막에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던 그 호칭으로, 윤나진은 그 존재를 섬겼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어요.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지구를 버리고, 스스로의 목숨까지 버리라는 비상식적인 명령이 그녀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윤나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명령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사상 최강의 헌터가 아닌 ‘네임리스’가 된 그녀는 ‘네임리스의 던전’의 던전 보스가 되어 누군가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무려 4년간이나.
* * *
석양빛이 저물고 별이 떠오른 밤, 달빛이 교실 창문으로 들어와 쓰러진 윤나진을 비추고 있었다.
책상을 어설프게 이어붙인 침상에 눕혀진 윤나진은 창백한 혈색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권속으로 변신하면서 생겨났던 날개와 키틴질 갑각, 그리고 더듬이와 볼의 털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가려진 두 눈의 보석안은 아직 희미하게 그 빛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곤충의 겹눈과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90% 이상 인간으로 돌아온 그녀를 한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 목적을 이해하고 나를 따라주었다. 나의 권속이지만, 내가 지켜야 할 아이이기도 하지. 그녀를 죽이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여전히 던전을 울리며 들려오는 어떤 존재의 목소리에 이현이 으르렁거렸다.
“원래라면 죽일 생각이었으니깐 감사 인사는 그만두지 그래?”
괜히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었다.
이현은 진짜 윤나진을 죽일 셈이었다.
하르페 검의 형태로 변환한 [판타소스의 꿈]에 잔뜩 불어넣은 규격 외의 힘이 갑자기 회수되지 않았다면, 진즉에 그랬을 터였다.
‘왜 갑자기 그때 규격 외의 힘이 회수된 걸까?’
마치 썰물이 빠지듯이 규격 외의 힘이 상단전으로 되돌아와 버리자 이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직 규격 외의 힘을 완전히 다루지 못해서 그런 건가?’
티타누스가 규격 외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것과 달리 이현은 아직 미흡했다.
하지만 이현 역시 상단전을 완벽하게 개방하면서 진정한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고, 또한 반신의 격을 지닌 존재였다.
그렇게 허무하게 컨트롤을 상실할 정도로 수준이 낮지 않았다.
즉, 결론은,
‘누군가 내 힘에 개입했다.’
범인은 뻔했다.
던전에는 죽기 직전의 윤나진과 이현, 그리고 또 하나의 존재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현이 스스로 한 짓이 아니라면 죽기 직전의 윤나진뿐인데, 그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이현의 힘에 간섭할 수 있는 이는 바로 지금 던전을 울려대며 말을 건네고 있는 존재뿐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스스로를 이렇게 밝혔다.
‘벌레 신의 첫 번째 자식.’
‘가장 위대한 사도.’
그가 바로 지구-2의 윤나진의 주인이자 ‘네임리스의 던전’의 진짜 지배자였다.
[나의 이름은 사피오 사트라. 나의 벗은 나를 표사트라고 불렀지.]“사도가 친구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자신의 애칭을 소개하는 사도 표사트의 말에 이현이 혀를 찼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파괴하는 벌레 신의 무리가 친구라니.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소리였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내 형제자매들에게 많은 고통을 받았으니.]“그리고 그들 모두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렀지.”
갓 알에서 깨어나 도시 뉴가텀을 파괴한 사도 샤이 규라흐.
행성을 파괴할 정도로 성장한 사도 누다르.
이현의 앞길을 막은 사도들은 모두 그의 손에 소멸되었다.
먼 옛날 ‘규격 외의 힘’의 원래 주인이었던 티타누스가 그랬듯이.
[알고 있다. 너의 독특한 힘도, 네가 해왔던 일들도.]“그걸 안다고?”
이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사도 표사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핫하! 이 아이에게 너의 생활을 영상으로 보여준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지?]사도 표사트의 말에 납득한 이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던전 자체가 그의 지배하에 있다면 윤나진이 볼 수 있었던 지구-1의 영상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벌레 신이 골머리 좀 썩겠군.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사도가 둘이나 소멸하다니. 다시 그들을 창조하는데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이 소비될 거다.]고소하다는 웃으며 말하는 사도 표사트의 태도에 이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벌레 신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도가 하기엔 이상한 말 아닌가?”
[그렇지. 나는 벌레 신의 첫 번째 자식이지.]이현의 물음에 한참이나 큭큭 대던 사도 표사트는 웃음을 멈추고 부정의 의사를 던전 가득 퍼뜨렸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독립한 첫 번째 자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그와 관련이 없으며,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선언에 이현은 잠시 말을 잊었다.
벌레 신의 사도는 벌레 신이 친히 낳은 자식들이었다.
마치 권속이 제 몸을 바쳐서라도 사도를 보필하고 돕듯이, 사도들 역시 벌레 신을 위해 어떤 짓이든 하게 되어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이 사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사도 표사트는 그런 사도의 본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총관의 떨거지들이라고 모두 총관의 말을 듣는 건 아니지 않나?]“그건 확실히 그렇지만…….”
사도와 십이선은 달랐다.
십이선은 총관의 자식들이 아니라 몇 번의 우주 속에서 그녀가 눈여겨본 인재들이 승격한 존재들이었다.
물론, 총관에게 충성하지만, 사도가 벌레 신에게 그러하듯 맹목적인 충성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총관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따로 있다. 아니, 있었다.
오래전 벌레 신에게 덤볐다가 목숨을 잃은 티타누스. 그리고 그의 딸 티타니아.
티타니아는 조금 애매했지만, 티타누스가 총관에게 바친 충성은 오히려 사도들의 충성이 빛이 바랠 정도였다.
‘즉, 사도가 벌레 신에게 충성하는 것을 관둔다는 것은 티타누스가 총관을 배신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현은 사도 표사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해야 한다.’
이현은 겉으로는 사도 표사트와 대화를 하는 척하면서 암암리에 규격 외의 힘을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잠깐, 그 힘은 잠시 넣어둬라. 대화에 방해가 될 뿐이니.]상단전을 가득 채우기 직전, 규격 외의 힘이 사도 표사트의 말과 함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그라들었다.
“역시 너였군……!”
이미 예상한 것이었지만, 사도 표사트가 이현의 규격 외의 힘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현이 이를 악물었다.
‘규격 외의 힘이 없으면 사도를 상대하기는 무리다.’
권속 정도라면 이현의 내공이나 [강화] 스킬 정도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도는 달랐다. 아무리 강한 공격을 퍼부어도 금세 회복하기 일쑤였고, 혹여 쓰러뜨리더라도 그들의 알은 규격 외의 힘으로만 소멸시킬 수 있었다.
즉, 규격 외의 힘이 없다면 영원한 전투를 반복하며 결국엔 힘이 다하는 쪽이 죽게 될 터였다.
‘이런 적을 만날 줄이야.’
이현이 절망감과 적대감을 동시에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평범한 사도의 천적이 이현이라면, 사도 표사트는 바로 이현의 천적이었다.
그런 이현의 반응을 눈치챈 사도 표사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힘과 그 힘의 원래 주인과 관련된 자에겐 절대 해를 끼칠 생각이 없으니까.]“그걸 어떻게 믿지?”
오늘 이 말만 몇 번을 하는 걸까.
하지만 이현은 또 한 번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사기꾼을 믿고 말지 어떻게 사도를 믿겠는가.
하지만 사도 표사트는 이현에게 확실한 보증을 내걸며 자신을 믿게 했다.
“……!”
충격적인 사도 표사트의 맹세에 이현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 * *
“티타니아. 어때요? 이현이가 보여요?”
“전혀요.”
나진의 물음에 티타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천산산맥 깊숙이 위치한 마교의 본산을 코앞에 두고 진을 친 무림맹 세력이 정마대전을 앞두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티타니아는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송아를 비롯한 와이트들을 데리고 마교 본산의 허공을 날아 정찰을 마쳤다.
무림맹의 고수들도 와이트들을 볼 수 없었으니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마교 교주가 아니면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 완벽에 가까운 정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0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주인님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어요.”
“다들 어디로 간 걸까요?”
나진이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를 마교가 아니었다.
천산산맥은 그들의 앞마당이니 아마 무림맹 세력이 천산산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전쟁을 앞두고 모두 모습을 감췄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인보다 내공이 없는 일반 신도들이 많다고 해도, 싸울 사람은 남겨 놓아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정찰들의 보고에 나진은 골치가 아팠다.
‘이현이는 이 어려운 걸 어떻게 해왔나 몰라.’
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독이는 것은 잘할지 몰라도, 계책을 내어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보통 무협지를 보면 이런 게 함정이던데.”
아무것도 없는 채로 적들을 유인해 방심하게 만든 다음 숨겨진 복병을 이용해 적을 공략한다.
적들이 만약 이 계책을 노리고 있는데 그대로 쳐들어간다면, 무림맹 세력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진의 대답은 단호했다.
“들어갈 거예요.”
이에 따를 희생이 크든 작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나진은 이곳에 이현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
설령 이곳에 수많은 피가 뿌려지더라도 이현을 구한다면 나진에게는 성공이었다.
“모든 무림인에게 알려야겠어요. 이제 전쟁이 시작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