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500
외전 4화
-1만 명의 귀환자
“보안 유지. 알죠?”
차원의 균열을 마음대로 여닫는 이현의 모습에 놀란 이길수를 보며 아차 싶은 티타니아가 손가락을 입술 앞에 가져다 댔을 때였다.
“티-타-니-아!”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는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소리가 큰 것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영험한 신격이 온 사방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으힉!”
겁이 많은 이길수는 그 소리만으로도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였다.
반면, 티타니아는 고막을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전혀 동요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목을 움츠리며 귀찮아졌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에잇, 언제 또 알고 왔담?”
“티타니아, 이러기에요?”
타닥.
하늘을 날아와 땅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여성은 등 뒤에 솟아 있던 날개를 갈무리하고는 씩씩대며 티테이블로 다가왔다.
누구보다 고귀한 신격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성은 다름 아닌 나진이었다.
“이현이가 왔다면서요? 어딨어요?”
“아이고, 아까워라. 방금 뉴서울 쪽으로 갔는데.”
“아악! 엇갈렸어!”
나진은 이현과 엇갈렸다는 사실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곤 다시 이현을 만나러 뉴서울을 향해 몸을 돌리려 했다.
“지금 돌아가도 또 엇갈릴걸요? 주인님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알잖아요?”
“규격 외의 힘 치사해!”
당장이라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던 나진이 고개를 떨구며 한탄했다.
그녀가 다시 날아가는 동안 이현은 차원의 균열을 열고 이곳으로 돌아올 터였다.
결국, 이현을 쫓아가는 것을 포기한 나진이 이번에는 티타니아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새로운 지구에 왔으면 당연히 나를 불러야지, 나만 빼놓고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딨어요?”
“눈치 없긴. 일부러 연락 안 한 거 몰라요? 알아서 빠져 줘야지!”
티타니아가 입을 삐죽이며 투덜대자 나진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와, 진짜 너무한다. 동천복지에서 매일 같이 이현이랑 붙어 있으면서!”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 일이 얼마나 밀려 있는 줄 알아요? 주인님이랑 같이 있을 시간이 조금도 없다구요!”
새로운 지구에서 이현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나진이 보기엔 배부른 소리였지만, 티타니아 역시 이현과의 시간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지난 1년간 우주 전체에서 발생하는 사념 에너지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레 신의 무리가 파멸과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긴 했지만, 엄연히 사념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데 공헌하던 존재들.
그들이 물러나면서 생긴 공백을 메꾸기 위해 총관과 구성들은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주인님이랑 제 본체는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구요! 조금 쉴 수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 이 망할 주인님은 일만 하고 말이야.”
티타니아는 오히려 자신이 더 억울하다는 식으로 씩씩댔다.
바쁜 와중에 숨을 돌릴 수 있는 잠깐의 데이트라고 생각해서 따라왔건만, 여기서도 이현에게는 일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연락 한 번 안 한 건 협정 위반이에요.”
“그, 그건 그렇죠…….”
나진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리자 깨갱 한 티타니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티타니아-나진 협정.
동천복지에선 티타니아가, 새로운 지구에선 나진이 이현과 함께 있는다.
나진이 화가 난 이유는 이현과 데이트할 생각에 들뜬 티타니아가 협정을 어기고 얌체같이 따라온 것 때문이었다.
“이거, 나중에 돌려받을 거예요.”
“에휴,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요. 나중에 동천복지로 한 번 놀러와요.”
차가운 나진의 눈빛에 결국 티타니아가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동천복지에서의 데이트권을 받아낸 나진은 그제야 얼굴을 풀고 생긋생긋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티타니아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주인님 좋아한다는 걸 숨기지도 않네. 많이 뻔뻔해졌네요, 나진 양?”
“신도 됐는데 거리낄 게 뭐가 있어요?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 안 그래도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쌓여 있단 말이에요.”
행성을 관리하는 신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는 소리였다.
나진은 매일매일 새로운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하며 고된 업무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 맘 내가 잘 알죠. 우리 서로 힘내요.”
“언젠간 편해질 날이 오겠죠.”
언제 싸웠냐는 듯, 같이 업무에 시달리는 처지인 둘은 손을 맞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감동적으로, 아니 얼이 빠져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저, 저기, 기, 길드 마스터?”
“네?”
자신을 길드 마스터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나진이 고개를 돌려 이길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우리 행성 사람이 아니네? 티타니아, 누구예요?”
“그쪽에서 건너온 사람이에요. 주인님이 볼 일이 있어서 불렀대요.”
“아, 그게 오늘이었구나.”
나진은 이미 깨끗하게 청소되었지만, 주변에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애!”
그때, 요란스러운 아이의 울음소리가 티타니아의 품속에서 울렸다.
“어머, 벌써 이런 시간이네.”
티타니아가 화들짝 놀라며 품속에서 회중시계 하나를 꺼냈다.
놀랍게도 울음소리는 회중시계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중시계에는 빛으로 된 글자로 [맘마 시간]이라고 떠올라 있었다.
“나진 양, 주인님이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 좀 맡아줄래요? 난 지금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티타니아가 고생이 많네요. 아기 돌보기 힘들죠?”
사정을 아는 나진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안쓰럽게 티타니아를 바라보았다.
“뭘요. 뒤늦게 효도하는 셈이죠.”
티타니아가 돌보는 아기란 바로 새로 태어난 티타누스였다.
벌레 신에게 돌려받은 티타누스의 영혼을 이현과 티타니아, 표사트가 규격 외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 3개월 전이었다.
아기 티타누스를 돌보는 이가 지금 이곳에 있는 티타니아의 분체였다.
딸이 갓난아기가 된 아버지를 돌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티타누스 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아직은 인사를 알 정도로 크지도 않았어요. 주인님이랑 데이트 잘해요.”
“걱정 안 해도 끝내주게 할 거거든요?”
혀를 쏙 내미는 나진을 보며 티타니아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동천복지로 향하는 게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자, 그럼 방해꾼도 갔겠다.”
떠나는 티타니아를 손을 흔들며 배웅한 나진이 이길수를 향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쪽의 나랑 관련된 사람이구나. 흐으음.”
나진은 호기심이 넘치는 눈으로 이길수를 바라보았다.
지구-2의 윤나진이 헌터로서, 던전 보스로 지내던 시절의 기억이 나진에게 흡수되었기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이길수는 지구-2의 윤나진이 네임리스의 던전에 들어가고 난 후에 황충 길드에 들어온 사람이었기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디, 그쪽 세상 이야기 좀 들어볼까요?”
이길수는 길드 마스터와 똑같이 생긴 나진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녹록지 않은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어디 보자, 노트북이 여기에 있었지?”
이현은 한때 자신의 던전 속 히든 던전이었던 코에스몰에 내려섰다.
새로운 지구를 다시 만들 때 당연히 이현의 던전도 포함되었다.
크라쉬의 던전 구역이었던 곳은 전혀 다른 행성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빼야 했지만, 지구였던 구역은 모두 새로운 지구에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한때 서울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었던 코에스몰도 새로운 지구에 다시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아, 보스!”
코에스몰의 관리자 혜인이 오랜만에 보는 이현의 모습에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서는 한때 고재성의 매니저였던 민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들 잘 지냈어요? 민수 씨는 그동안 격이 많이 올랐네.”
“덕분입니다.”
민수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현의 말대로 그는 놀랍도록 성장해 있었다.
한때, 이현의 도움으로 겨우 구울이 되었던 민수가 이제는 좀비 로드도 아닌 데스나이트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초창기 던전 사람들 모두 상격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혜인이 입을 삐죽였다.
“민수 오빠만 매번 앞서 나간다니까요. 나도 한 번 죽었다 살아나야 하나 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절대 안 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아무래도 살아 있는 채로 격을 쌓아야 하는 혜인의 입장으로서는 힘든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그런 혜인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아코스한테 넥타르 좀 더 만들어 놓으라고 얘기할게요.”
“정말요? 그래 주시면 저야 언제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장난스럽게 경례를 올려붙이는 혜인을 보며 키득대던 이현은 이곳으로 온 목적을 밝혔다.
“노트북 좀 쓸게요. 규격 외의 신이 되어도 USB는 확인을 못 하네요.”
“이런 걸 두고 인류의 승리라고 해야 하나요? 여기요.”
이현은 혜인이 농담과 함께 건네준 업무용 노트북에 이길수에게 전해 받은 USB를 꽂았다.
다행히 평행 세계인 지구-1과 지구-2의 노트북과 USB는 문제없이 잘 호환되었다.
“흠. 괜찮네.”
노트북 화면엔 이현이 황충 길드에 의뢰한 아주 중요한 정보들이 떠올라 있었다.
* * *
이현이 새로운 지구에 왔다는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나진만큼 이현을 기다리고 있던 이아코스가 코에스몰에 도착한 것도 금방이었다.
“현이 왔다면서?”
“네. 저기 계세요.”
“고마워!”
이아코스는 알려준 혜인에게 손을 흔들고는 코에스몰 카페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는 이현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날아들 듯 그를 와락 껴안았다.
“현! 오랜만이야!”
“어이쿠, 심장 떨어지겠다, 이놈아.”
이현은 아이처럼 자신에게 매달리는 이아코스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려 준 다음 그를 떼어냈다.
“너도 이제 위대한 신인데 체통을 지켜야지?”
“에이, 더 위대한 존재가 눈앞에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헤헤.”
이아코스가 배시시 웃더니 이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 노트북은 뭐고?”
1년간 새로운 지구에 익숙해진 이아코스는 노트북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이현은 그런 이아코스의 발전에 피식 웃으며 화면을 그를 향해 돌려주었다.
지구-2의 성이경과 윤나진이 이길수를 통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건네준 USB의 내용은 다름 아닌 1억 명의 인적 정보였다.
“음? 다 여기 사람들이네?”
“정확히는 여기 사람들과 같은 데 다른 사람들이지.”
이현은 필멸자 시절, 지구-2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평행 세계인 두 행성에는 같은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사람이 공존했다.
나진과 윤나진, 그 둘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현은 새로운 지구에 존재하는 옛 지구의 생존자 1억 명과 동일한 지구-2의 사람들의 정보를 황충 길드에 조사해달라고 의뢰했었다.
성이경이 황충 길드의 다른 업무를 1년간 중지시키고 전력을 다해 모은 정보가 바로 이길수가 들고 온 USB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정보들은 왜 필요한 건데?”
어느새 카페에서 넥타르가 섞인 녹차 프라푸치노를 가져온 빨대로 쪼옥 들이켜며 이아코스가 물었다.
이현은 노트북 화면을 톡톡 건드리며 히죽 웃었다.
“우리 귀환자들의 새로운 신분이 될 사람들이거든.”
1만 명의 귀환자.
새로운 지구와 지구-2에 새로운 변화가 생길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