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bearing Tyrant RAW - chapter (1095)
샬렌교(6)
“율법사자 도네오다! 와아아아!”
매럿 교주가 추천한 도네오가 광장으로 걸어오자 많은 신도들이 환호했다.
그의 뒤를 이어 클로에가 모습을 보이자 이번엔 12성탑에서 온 사람들과 비교주파 세력들이 기쁨에 찬 환호성을 질렀다.
“메리나 대신관님의 제자 클로에 사제다.”
공교롭게도 수십 년간 대립해 왔던 교주파와 비교주파의 양대 후보들이 남은 것이다.
광장에 모인 신도들의 열렬한 환호에도 도네오와 클로에는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앞서 걸어가는 이안과 교리연구회 장로들을 따라 묵묵히 이동했다.
광장에 설치된 높은 단상으로 올라간 그들은 성화의 불꽃을 형상화한 두 개의 거대한 청동 향로 뒤편에서 멈춰 섰다.
“영주님, 이제 마지막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대장로는 단상에 서 있는 매럿 교주가 아닌 이안에게 말했다. 교주 선출 과정은 교리연구회의 독립된 권한이었고 현교주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대장로는 오로지 성화의 주인인 이안에게만 허락을 구할 뿐이었다.
‘힘든 시험이 되겠군.’
이안은 두 개의 청동 향로 앞에 서 있는 클로에와 도네오의 뒷모습을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꼬박 하루를 불의 마법진에서 힘을 소비한 두 사람은 그들을 각기 지지하는 신도들 앞에서 공개적인 심판을 받아야 한다.
시험을 거쳐 여기까지 온 것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나, 둘 중 한 사람은 만인 앞에서 패배의 쓴맛을 봐야 한다.
도네오와 클로에 두 사람 모두를 잘 알고 있는 이안은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대장로에게 말했다.
“시작하십시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로는 성화의 불꽃 모양으로 제작된 거대한 청동 향로 앞에 서 있는 클로에와 도네오에게 말했다.
“향로에 불의 기운을 주입해 성화의 불꽃을 밝히시오! 더 찬란하게 빛나는 불꽃이 다음 대 교주가 될 것이오!”
대장로의 말이 떨어지자 호흡을 조절하며 서 있던 도네오와 클로에는 각자의 향로로 다가가 양손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평생 닦아 온 불의 기운을 밀어 넣었다.
고오오오오!
향로가 서서히 달아오르더니 잠시 후엔 펑 소리가 나며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향로를 바라보며 신도들이 격렬한 함성을 내질렀다.
“황금색 불꽃이다!”
다음 대 교주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영주님, 그래서 둘 중에 누가 교주가 된 것입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이안이 말을 멈추자 재무관이 서둘러 물었다. 집무실 회의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도 궁금했는지 귀를 열고 이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단상의 의자에 앉아서 신하들을 내려다보던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누구일 것 같아?”
“도네오가 된 것입니까?”
재무관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클로에 사제가 샬렌교의 차기 교주로 선출됐어.”
“그렇군요. 결국 도네오는 안 된 것이군요.”
이안이 결과를 알려 주자 집무실의 신하들은 궁금증이 풀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 사제는 내년 봄에 정식으로 교주 직에 오르게 될 거야.”
“영주님의 결혼식 시기와 비슷하군요.”
재무관이 공교롭다는 듯 말을 하자 이안은 집무실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맞아, 클로에 사제가 교주 직에 취임할 때 나는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야. 그래서 그녀에게 미리 말해 뒀어, 내년 봄에 내가 결혼식이 있어서 교주 취임식에는 참석하기 어려울 거라고.”
“아쉬워했겠습니다. 클로에 사제는 영주님과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서인지 많이 아쉬워하더라고.”
차기 교주로 확정된 후 기뻐하던 클로에는 이안의 결혼 소식을 접하는 순간 얼어붙은 얼굴이 됐었다.
이안은 그때 본 클로에의 표정이 머릿속에 남아 왠지 신경이 쓰였다.
집무실 창밖을 바라보던 이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 겨울이야. 새해는 얼마 남지 않았고. 올 한 해 열심히 해 줘서 고맙고, 마무리 잘하자고.”
“예, 영주님.”
봄 그리고 반가운 만남들 ⑴
코페나 항구에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으, 추워라. 따뜻한 해적 군도가 좋았지.’
청상어 해적단의 선장 샤비치는 두툼한 외투의 옷깃을 여몄다.
새해를 맞이한 지 두 달이 지난 알베른은 여전히 겨울 속에 있었다.
그나마 코페나 항구는 알베른의 다른 지역에 비해 추위가 덜하고 눈이 적게 오는 편이었다.
“태워 줘서 고맙소. 나중에 좋은 물건 생기면 싸게 넘기겠소.”
샤비치는 배에서 내리기 전에 코페나까지 자신을 태워 준 친분이 있는 암상인에게 말했다. 갑판 위의 암상인은 자신의 배에서 코페나 항구의 전경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요즘 자네 해적질이 영 시원찮다던데 내게 넘길 물건이 생길지 모르겠군?”
“거, 무슨 개소리요? 나 아직 안 죽었소.”
큰소리를 친 샤비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둥근 털모자를 머리에 깊게 눌러썼다.
“어떻소? 바로 앞에 현상금 수배 전단이 있어도 나인지 못 알아볼 것 같지 않소?”
“눈빛만 조금 죽이면 자네 변장도 그럴듯해 보이는군. 한데 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꺄뮤에 가려는 건가?”
“내 친구가 봄에 결혼식이 있소. 그래서 축하해 주려고 가는 거요.”
“아니, 봄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 축하를 해 주러 간다는 말인가?”
암상인이 의아해하자 샤비치는 일부러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내 친구는 명성이 높은 사람이오. 나 같은 해적이 결혼식 날 주변에 얼쩡거려서 좋을 게 뭐 있겠소?”
“그래서 일찌감치 가서 축하해 주려고 하는 것이군.”
“그렇소. 아무튼 오늘 일은 나중에 꼭 보답하겠소.”
배에서 성큼성큼 내린 샤비치는 코페나 항구 마을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은 뒤 꺄뮤로 가는 여객 마차에 몸을 실었
‘영주님이 결혼을 하신다니. 정말 잘됐어. 흐흐.’
샤비치는 이안의 결혼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영주님과 결혼하시는 분은 분명 좋은 분이시겠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하던 샤비치는 여객 마차에 다른 승객들이 타려 하자 미소를 지우며 책을 보는 척했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나리, 마차에 오르시죠.”
마차 문을 연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사각턱의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사각턱의 남자는 마차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샤비치를 슬쩍 쳐다보고는 몸을 약간 숙여 마차에 올랐다.
사각턱의 남자가 샤비치 맞은편에 앉자 그의 뒤를 이어 입가에 점이 있는 젊은 여자가 마차에 올라 그 남자 옆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문을 열었던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샤비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들은 조셉 왕자와 그를 섬기는 막테로, 시얀이었다.
책을 보는 척하며 마차에 탄 세 사람을 훔쳐본 샤비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 하는 놈들이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좁은 마차 안에서 이들과 함께 꺄뮤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샤비치는 은근히 불편했다.
‘다른 마차를 탈까?’
샤비치가 고민하는 사이 여객 마차를 모는 마부가 소리쳤다.
“꺄뮤로 출발하겠습니다!”
샤비치가 내릴 틈도 없이 마차가 힘차게 출발 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조용히 마차를 타고 가는 수밖에.’
샤비치는 옆에 앉은 막테로가 철퇴를 들고 탄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차는 얼마 후 코페나 항구 마을을 벗어나 황량한 황무지의 관도를 따라 내달렸다.
눈발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나리, 아까 식당에서 들으니 이안 영주님이 이 거친 황무지를 푸른 숲과 곡식이 자라는 땅으로 만들겠다고 했답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막테로의 말에 조셉은 마차 창밖을 담담히 응시했다. 굵은 눈발 사이로 척박해 보이는 땅이 빠르게 지나쳐 가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결국엔 해내는 사람이 있다. 이안 영주가 그리 말했다면 나는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안 영주님은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조셉 옆에 앉아 있던 시얀이 이안을 떠올리며 말했다.
세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게 된 샤비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들은 이안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으로 말을 하고있었다.
‘대체 이들은 누구지?’
샤비치가 의아해할 때 창밖을 바라보던 조셉이 고개를 돌려 샤비치를 쳐다봤다.
“책을 참 좋아하시는가 보구려.”
“예?”
샤비치는 조셉이 말을 걸어오자 무시할 수 없어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마차를 타는 내내 책만 봐서 말이오.”
“아, 예. 어렸을 때부터 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샤비치의 말에 조셉과 시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구려.”
그때 샤비치 옆에 앉아 있던 막테로가 껄껄 웃었다.
“이봐, 책을 즐겨 읽는다면서 왜 그 책은 거꾸로 들고 있는 거야? 희한한 독서 법이군.”
막테로의 면박에 샤비치는 당황하며 서둘러 책을 바로잡았다. 조셉은 샤비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한동안 마차를 같이 타고 갈 사이인데, 인사나 나눕시다. 나는 조셉이고, 여기 이 사람들은 막테로와 시얀이오.”
조셉이 일행을 소개하자 샤비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나는 아라달이라고 합니다.”
샤비치는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가 없어서 죽은 아라달의 이름을 사용했다.
“알베른분 같지는 않은데 꺄뮤는 여행을 가는 것입니까?”
“함, 아닙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친구요?”
“네. 결혼을 앞둔 친구가 있어서 축하해 주려고 가는 길입니다.”
샤비치의 대답에 조셉과 시얀, 막테로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샤비치는 조셉 일행의 눈치가 이상하자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시얀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꺄뮤로 가는 이유가 우리와 비슷해 놀라서 그랬어요. 우리도 결혼을 앞둔 지인이 있어서 꺄뮤로 가는 길이거든요.”
샤비치는 설마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시군요. 어느 분이신지 몰라도 축하드릴 일이군요.”
“아라달 님도요.”
* * *
에딘은 가느다란 집게로 파랗게 빛나는 골렘의 핵을 집었다. 마법 증폭 장치를 활용해 만든 골렘의 핵은 미완의 바위 골렘을 인간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존재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안과 케인, 조쉬가 바라보는 가운데 에딘은 긴장된 손길로 케인이 만든 손바닥만 한 미완의 바위 골렘의 몸에 골렘의 핵을 떨어트렸다.
물방울처럼 떨어진 파랗게 빛나는 골렘의 핵이 바위 골렘의 몸속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단단한 철제 상자 안에서 흉포하게 행동하던 바위 골렘이 우뚝 멈춰섰다.
에딘은 바위 골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앉아.”
에딘의 지시를 받은 바위 골렘이 천천히 다리를 굽히며 바닥에 앉았다.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던 케인과 조쉬는 뛸 듯이 기뻐했다.
“골렘이 지시대로 움직였어요!”
조쉬가 큰 소리로 말을 하며 기뻐하는 순간이었다. 바닥에 앉아 있던 바위 골렘이 갑자기 붉은 빛에 휩싸이더니 폭발을해버렸다.
쾅
이안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돌 조각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부서진 돌 조각은 발갛게 달궈져 있었다.
이안은 차분한 눈빛으로 손안의 돌 조각들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자 주위에 모여서 바위 골렘의 변화를 지켜보던 에딘과 케인, 조쉬가 실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미안하다, 이안. 기대를 많이 하고 왔을텐데.”
에딘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하자 이안은 피식 웃었다.
“괜찮아, 그래도 처음으로 인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잖아. 우리 모두 그 모습을 봤고. 안그래?”
이안은 에딘에 이어 케인과 조쉬를 둘러봤다.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한 오늘의 실험인 만큼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다들 수고했어. 비록 아쉬움이 남겠지만 나는 엄청난 진보를 이뤘다고 생각해. 이 경험들이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 앞에서 자랑스럽게 말할 날이 올 거야. 그러니 힘들내.”
이안의 따뜻한 격려에 케인과 조쉬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당분간 푹 쉬도록 해. 고생했어.”
이안은 에딘과 함께 케인의 실험실을 나왔다. 성안은 횐 눈으로 덮여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골렘의 핵에 너무 많은 마력이 들어갔나 봐.”
에딘은 손에 든 빨갛게 타 버린 바위 골렘의 잔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딘과 함께 정원을 걷던 이안이 담담히 말했다.
“에딘, 네가 올여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 때문에 더 쫓기듯 연구하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마.”
걸음을 멈춘 이안은 에딘을 바라봤다.
“나도 케인도 조쉬도, 너의 마음이 편하길 바라고 있어.”
“……내가 그랬었나?”
잠시 생각하던 에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에딘은 이안의 결혼 선물로 바위 골렘을 완성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다.
“영주님.”
한쪽에서 성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보고를 받은 론도가 이안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영주님, 조셉 왕자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봄 그리고 반가운 만남들⑵
“어서 오십시오, 조셉 경.”
영주관 입구에서 조셉 일행을 기다리던 이안은 그들이 영주관에 도착하자 앞으로 걸어 나가며 크게 반겼다.
조셉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건물 밖까지 마중 나와 환대하는 이안의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명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는데도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대해 주는구나.’
몰락한 핀델슨 왕가의 왕자 츨신인 조셉을 이안은 만날 때마다 극진하게 대우해 주고 있었다.
“이안 영주, 오랜만이오.”
꼬박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얼싸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잘 지내셨습니까?”
조셉을 웃으며 맞이한 이안이 물었다.
“물론이오. 영주는 어떠셨소?”
“저도 별일 없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답한 이안은 옆으로 시선을 돌려 막테로와 시얀을 바라봤다.
조셉을 끝까지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신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도 다시 보니 반갑군.”
“저희도 그렇습니다, 영주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시얀과 막테로는 공손하게 이안에게 머리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이안과 조셉 일행의 인사가 끝나자 뒤에서 기다리던 에딘이 뒤이어 그들과 인사를나눴다.
“잘오셨습니다, 조셉경.”
“반갑소, 에딘 경. 에딘 경도 알베른성에 계실 줄 몰랐소.”
다들 아는 사이기에 누구 하나 반갑게 인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짧게 안부를 물은 그들은 영주관 안으로 들어갔다.
* * *
“에딘님, 언제 이렇게 살을 또 빼셨습니까?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정말 몰라 뵙겠습니다.”
막테로가 놀랐다는 듯이 말을 하자 차를 마시던 에딘이 흐뭇하게 웃었다.
“하하하, 조금 빠진 정도인데요, 뭘.”
“아닙니다. 정말 많이 빠지셨습니다. 그러니 다시 살을 더 찌우셔야 합니다. 전 예전의 후덕한 모습의 에딘 님이 그립습니다.”
막테로의 농담에 접견실에 모여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조셉은 웃지 않고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에딘 경에게 무례하게 굴려면 밖으로 나가서 눈이나 치워라.”
“죄송합니다. 에딘 님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막테로가 눈치를 보자 에딘이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조셉 경, 저는 괜찮으니 너무 뭐라 하지 마십시오. 막테로 님, 오늘 밤에 지난번처럼 카드놀이로 벌주 마시기를 하는 게 어떨까요?”
“흐, 좋지요.”
막테로는 밤송이처럼 뻣뻣한 자신의 수염을 흝으며 좋아했다.
“코페나 항구를 통해 오셨습니까?”
미소를 띤 채 사람들의 대화를 듣던 이안이 찻잔을 내려놓고 조셉에게 물었다.
이안이 말문을 열자 방금 전까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에딘과 막테로가 조용해졌다.
“그렇소, 소문대로 정말 잘 만들어진 항구라서 몇 번이나 항구의 풍경을 보며 감탄을 했소. 왕국 제일의 항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영지를 이렇게 바꾸어 놓다니. 하긴 그때 본 영주의 눈빛은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조셉은 과거를 회상하듯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수산에서 말이오.”
“아, 호수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몇 년 전 이안은 서부 영지의 대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호수산 정상의 물을 끌어다 사용했다.
그 일을 위해 호수산 정상의 별장에서 지내고 있던 조셉 왕자에게 허락을 구한 적이 있었다.
호수산은 엄연히 알베른의 영지 내에 있었지만 문제는 왕실 별장이 위치해 있어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때 조셉 왕자가 내 부탁을 거절했다면 서부 영지는 비가 올 때까지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이안이 조셉 왕자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도 사실 그 일 때문이기도 했다.
이안의 부탁을 그 자리에서 선뜻 허락하고 더 나아가 영지의 가뭄이 하루빨리 해소되기를 바란다며 진심으로 위로까지 해 주었다.
이안이 잠시 과거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조셉이 처음으로 그때의 속내를 밝혔다.
“호수산에서 만난 이안 영주의 눈빛은 뭐라고 할까……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의 원석처럼 빛나고 있었소. 조금만 세공하면 모두가 놀랄 만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그런 잠재력이 담겨 있는.”
담담하게 말을 하던 조셉이 이안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니 지금의 결과는 이미 그때부터 예견된 것이오. 그 시작점을 운 좋게 내가 먼저 알아본 것이었고. 하하하!”
조셉이 껄껄 웃자 이안도 마주 웃었다.
서로 어려운 시기에 호수산에서 만났고, 그들은 변치 않는 우정을 이어 오고 있었다.
소중한 인연이었다.
“이안 영주, 우리가 온 것은 영주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어서요.”
“다른 이유라면……?”
“봄에 결혼을 한다고 들었소. 진심으로 축하드리오.”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앉아 있던 막테로와 시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을 향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세 사람의 밝은 축하 인사에 이안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안은 조셉에게 결혼식 초대장을 보내고 싶었으나 보내지 않았다. 벨로린 왕국의 일을 잊고 베니뇽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그를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은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멀리서 이렇게 찾아와 준 것이다. 두 번 다시 벨로린 왕국의 땅을 밟지 않을 것처럼 말을 했던 그가 말이다.
자신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이안은 조셉이 얼마나 어려운 발걸음을 했는지 짐작이 됐다.
“감사합니다. 제 결혼을 축하해 주시려고 먼 길을 일부러 와 주셨군요.”
“마음 같아서는 봄에 있을 결혼식 때 참석하고 싶지만 과거 왕실의 인물이었던 내가 나타나면 지금의 왕실과 영주들이 많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말이오. 나도 불편하고. 아무튼 미안하오,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해서.”
“천만에요. 이렇게 오셔서 축하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젠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꺄뮤를 구경했군.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완전히 떨어지겠어.’
해 질 무렵 알베른성을 향해 걸어가던 샤비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꺄뮤에 도착한 것은 대낮이었다.
그러나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조셉 일행이 이안을 만나러 온 것을 감지한 샤비치는 그들이 알베른성으로 향하자 겹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늦게 가려 했다.
하지만 발전한 꺄뮤를 둘러보는 재미에 빠져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몰랐고, 지금에서야 허겁지겁 성으로 가는 중이었다.
‘영주님께서 저녁 식사를 하시기 전에 만나야 해. 그래야 저녁을 얻어먹지.’
샤비치는 허기진 몸으로 뛰기 시작했다.
녹지 않은 눈길을 뛰다 몇 번은 넘어진 샤비치는 마침내 알베른성과 이어진 언덕길에 도착했다.
‘거의 다왔어.’
샤비치는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경사진 언덕길을 계속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니 언덕길 중간쯤에서 눈길에 크게 미끄러지며 휘청거렸다.
뒤로 넘어질 뻔한 그의 등을 누군가 뒤에서 손으로 지지해 주었다.
샤비치는 중심을 잡은 뒤 자신을 도와 준 사람을 쳐다봤다. 고급스러운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인상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산도적질을 하다가 왔나? 나만큼이나 인상이 더럽군.’
샤비치는 자신을 도와준 사내의 외모가 자신과 비슷해 보이자 본능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며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소.”
“별말씀을.”
콰딘은 털모자 아래로 보이는 샤비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인상이 보통 험상궂은 게 아니었다.
“조심하시오. 경사가 있어서 그리 뛰다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오.”
“험, 고맙소.”
그러잖아도 멀리서부터 쉬지 않고 뛰어온 터라 샤비치는 숨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걸어가려 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언덕길을 함께 걸어 올라가는 처지가 됐다.
“꺄뮤분이시오?”
콰딘이 묻자 털모자를 고쳐 쓰던 샤비치가 대답했다.
“아니오. 다른 지역에서 왔소.”
“다른 지역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저기 멀리 바다에 있는 섬이오.”
“섬사람이었구려.”
콰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샤비치가 물었다.
“그쪽은 꺄뮤분 이시오?”
“나도 아니오. 나는 벨로린 왕성에서 왔소.”
“그렇구려. 왕성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오?”
샤비치가 은근슬쩍 물었다.
“벨로린 은행이라고 들어 보셨소?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소.”
콰딘이 자랑하듯 말을 하자 샤비치는 깜짝놀랐다.
‘생긴 것과 달리 합법적인 일을 하는군. 역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돼. 나와 같은 부류인 줄 알았는데.’
“대단하시오, 은행에서 일을 하다니. 나는 숫자에 약해서 은행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오.”
콰딘은 점점 가까워지는 성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쉽지 않았소. 한데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시오?”
“나 말이오?”
샤비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냥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소.”
“열심히 사는구려.”
“먹고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수백의 해적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청상어 해적단의 선장 샤비치는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누구나 그렇소. 힘내시오.”
“고맙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성문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동시에 말했다.
“영주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 * *
접견실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던 이안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론도를 따라 콰딘과 샤비치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안을 함께 만나는 것이 서로 신경이 쓰이는 듯 두 사람 간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콰딘과 샤비치는 접견실에 들어오자마자 경쟁하듯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이안과 친분이 깊고 가깝지만 이곳은 영주성이었다.
보는 눈도 있었기 때문에 격식에 맞춰 예를 차려야 했다.
“론도는 나가봐.”
“예, 영주님.”
론도는 접견실을 나가기 전, 콰딘과 샤비치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봤다.
두 사람에 대해선 이안에게 몇 차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전혀 낯설지 않았다.
론도가 문을 닫고 나가자 이안은 차가 준비되어 있는 탁자로 걸어가 앉았다.
콰딘과 샤비치는 서로를 의식하며 뻘쭘하게 서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보네. 두 사람도 이쪽으로 와서 앉아.”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손짓을 했다.
콰딘과 샤비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언덕길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콰딘의 대답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인사해. 일전에 내가 말한 샤비치가 바로 이 친구야.”
“예에?”
콰딘이 크게 놀라며 옆에 앉아 있는 샤비치를 바라봤다.
‘이자가 해적 대가리 샤비치였다니. 어쩐지 느낌이 그쪽이다 했어.’
놀람도 잠시 콰딘은 무게를 잡으며 샤비치에게 점잖게 말했다.
“샤비치 선장이었구려. 정식으로 인사하겠소. 나는 왕성의 콰딘이오. 영주님께 말씀은 들었소.”
샤비치는 뚱한 표정으로 콰딘을 쳐다봤다.
‘쳇, 언제는 내 앞에서 은행가 노릇을 하더니. 건달두목이었잖아.’
샤비치 역시 왕성의 암흑가 두목 콰딘에 대해 이안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은 만나고 싶었는데 그날이 오늘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갑소, 콰딘. 나는 푸른 바다의 기상을 타고난 청상어 해적단의 대선장 샤비치요.”
거창하게 소개를 하는 샤비치를 콰딘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내 밑에 있었으면 하루에 몇 번씩 쥐어 터질 인간이.’
‘바다에서 해적질을 했으면 한 달도 못 버티고 상어 밥이 될 인간이.’
서로를 냉랭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의 이마에 벼락이 떨어졌다.
따닥!
이안이 딱밤을 날린 것이다.
“크아아악!”
“흐어어억!”
콰딘과 샤비치는 손으로 이마를 미친듯이 비비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들의 눈가엔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디서 기 싸움을 하고 있어? 내 앞에서 싸우려고 왔어?”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정신이 번쩍 든 두 사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얌전하게 이안을 바라봤다.
피식 웃은 이안은 차를 따라 두 사람에게 건넸다.
“마셔, 날도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