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bearing Tyrant RAW - chapter (490)
사신 (3)
해가 뜨기도 전, 아침 일찍 일어난 이안은 운동을 하기 앞서 고대어를 공부했다.
기본 고대어를 이미 다 습득을 한 이안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상급 고대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하는 고대어 공부였지만 이안은 공부하는 시간만큼은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학습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왕실 대도서관에 소장된 어려운 고대어로 된 책 제목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더 효과적으로 책을 골라 올 수 있겠지.”
-단순한 녀석. 정말 그 목적으로 고대어를 공부하다니. 너 같은 녀석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또 있으면 그게 이상하지. 그건 나도 싫다고.”
이안은 씨익 웃으며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대어를 많이 알고 있는 블란조르의 지도를 받아 이안은 상급 고대어도 무난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진정한 고대어 전문가는 바위골렘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 케인이었지만, 그를 방해하기는 싫었다. 새로운 신약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린다의 시간을 빼앗기도 미안했고.
“나는 블란조르가 세상에서 제일 좋더라. 내게 아낌없이 모두 베풀잖아. 검술 가르쳐 줘, 고대어도 가르쳐 줘.”
이안의 칭찬이 싫지는 않은지 블란조르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를 만나 운이 트인 것이다.
“인정할게. 블란조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영지를 운영하지도 못했을 거야. 내 자신이 강해질 수 없었을 테니까. 나와 알베른 영지는 블란조르에게 큰 빚이 있는 거야. 고마워.”
-낯설게 왜 이러는 것이냐? 그냥 평소대로 행동해라.
“진지하게 말을 하고 싶으니까.”
블란조르는 이안의 얼굴을 물꼬러미 바라보았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작년 이 시기와 비교해 그 밝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물고기 별자리와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제국 황실 점성술사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진다면, 그의 소멸 시간이 눈에 띄게 가까워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블란조르는 이안이 무슨 행동을 하든 곁에서 바라보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말이 없던 블란조르가 목소리를 일부러 높여 말했다.
-내가 소멸되기 전 황제의 검술은 꼭 알려 주고 갈 테니 걱정마라.
“그것 때문이 아닌 거 잘 알면서.”
-알긴 뭘 알아, 이 녀석아.
블란조르의 역정에 이안은 그저 웃으며 침실 한쪽에 놓아둔 수련용 갑옷으로 걸어갔다.
이안의 요구대로 특수 제작된 수련용 갑옷은 일반인들이 견딜 수 없는 엄청난 무게의 쇳덩이 갑옷이었다.
쇳덩이 갑옷을 제작해 영주의 침실에 가져다 놓을 때도 건장한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어 고생을 해야만 했다.
철컥. 철컥.
상체와 하체 부위로 나뉜 쇳덩이 갑옷을 몸에 걸친 이안은 마지막으로 무거운 투구를 머리에 썼다.
“오늘도 힘차게 시작해 볼까.”
이안은 무거운 갑옷을 걸친 채로 침실에서 기공권을 수련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육체적인 근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팔을 내뻗으며 좌우로 움직이는 이안의 몸놀림은 민첩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무거운 쇳덩이 갑옷을 입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폭발적인 운동량을 소화한 이안은 쉼없이 움직이던 몸을 멈춰 세웠다.
이미 그의 몸은 땀이 흥건한 상태였다.
“하아, 하아.”
다른 날보다 더 격렬하게 기공권을 사용한 이안은 그 자리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몸은, 몸 자체가 날카로운 검처럼 단련이 되어 있었다.
침실 문을 열고 나간 그는 복도를 쿵쿵 울리며 걸어갔다.
“하르몬드, 야간 근무 하느라 피곤할 텐데 앞으로 아침 운동에는 따라올 필요 없다. 다른 병사들도.”
“아닙니다, 영주님. 저와 호위대는 이 시간이 즐겁습니다. 영주님과 함께 운동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안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야간 호위조인 하르몬드와 병사들은 이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처럼 힘든 기색 없이 표정이 밝아 보였다.
“기회를 줘도 마다하네. 좋아, 오늘은 더 빠르게 성벽 위를 달릴 테니까, 각오들 해.”
“예! 영주님!”
영주관을 나선 이안은 바로 구보를 시작했다. 그의 뒤를 하르몬드와 호위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달렸다.
쿵쿵!
이안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땅이 은은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잠을 깬 에딘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무슨 생각인지 후다닥 옷을 걸쳐 입고 이안의 뒤를 쫓아갔다.
“이안!”
에딘의 집을 지나쳐 성벽 방향으로 뛰어가던 이안은 구보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에딘이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그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안 앞에 도착해 숨을 돌리던 에딘은 이안이 가려는 성벽을 가리 켰다.
“오늘부터 너 따라서 아침 운동을 하려고.”
“너도?”
이안은 의아한 눈빛으로 친구를 쳐다봤다.
에딘은 마법사가 된 후, 검 수련도 중단하고 운동도 하지 않았었다.
“갑자기 왜?”
“어, 그게 말이야. 나중에 말해줄게.”
에딘은 뒤에 서 있는 하르몬드와 병사들이 의식됐는지 대충 얼버무렸다.
에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이안은 머리에 쓰고 있던 무거운 투구를 벗어 에딘에게 내밀었다.
“이거 들고 따라와.”
별생각 없이 이안의 투구를 손에 받아 든 순간, 에딘은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그의 예상보다 투구는 훨씬 더 무거웠다.
“그동안 이걸 머리에 쓰고 아침 운동을 했던 거야? 머리가 멀쩡해?”
눈이 커진 에딘은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운 투구를 양손으로 들며 이안을 괴물 보듯 쳐다봤다.
“처음엔 힘들었지 하루 종일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고. 지금은 단련이 돼서 괜찮아. 자, 갈까?”
“이건?”
에딘은 무거운 투구를 흔들어 보였다.
“당연히 네가 들고 뛰어야지. 그걸 들고 달리면 훨씬 운동 효과가 좋을 거야.”
이안이 성벽을 향해 뛰기 시작하자 에딘은 길게 생각할 틈 없이 무거운 투구를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이안은 옆을 힐끔 쳐다봤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에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의 곁에서 보조를 맞춰 달리려 애를 쓰고 있었다.
“힘들면 그만해.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 없잖아.”
“헉, 헉, 아니야. 그동안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 같아. 마법사가 됐다고 말이야. 네 앞에서 마법이 있으니 살이 쪄도 괜찮다는 둥 운동은 안 해도 된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놨잖아.”
“너 갑자기 왜 그래? 어제 그 여자와 만나서 잘 안된 거야?”
빙빙 주변에서 돌지 말고 그 여자에게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부딪쳐 물어보라고 한 자신의 조언이 혹시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낸 건 아닌지 이안은 은근히 신경 쓰였다.
“하아, 하아, 네 말대로 하길 잘했어. 브로나에게 물어봤는데, 같이 있었던 남자는 그냥 친구라고 했어. 내가 멍청하게 오해한 거야.”
“다행이네. 그런데 넌 왜 이래, 실연당한 사람처럼?”
구보를 멈춘 이안이 에딘을 보며 물었다. 투구를 들고 숨을 돌리던 에딘은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그녀가 나보고 마법사가 되기 전에 몸 관리 먼저 하래. 살이 너무 쪄서 건강이 걱정된다고 말이야.”
“하하하!”
이안이 웃자 에딘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웃지 마. 나는 심각하니까.”
“그래서 이러는 거야?”
“브로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그냥 지낼 수가 있겠냐.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이안은 에딘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며 대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너, 대단하다, 고백까지 하다니.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그래서 그녀가 뭐래?”
“그냥 한번 웃더니 내가 준 사탕을 먹으며 맛있다고 했어.”
“그게 전부야?”
“어, 내가 장난치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아.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는 고백이었으니까. 사탕 선물을 주며 고백을 하다니, 이런 미친 인간.”
에딘은 손에 들고 있던 투구에 이마를 대고 좌우로 비벼 대며 자신의 성급했던 고백을 자책했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정신으로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꺼냈는지 모르겠다.
“널 진짜 싫어했으면 사탕도 받지 않았을 거야. 자, 숨 좀 돌렸으니 이제 다시 뛰자.”
“정말 그럴까?”
“내 말 믿어.”
이안의 격려에 에딘은 다시 힘이 난 듯 출렁이는 뱃살을 빼기 위해 열심히 성벽 위를 달렸다.
퉁퉁퉁!
꺄뮤 상점 거리에 있는 작은 가죽 공방 안에서 쾰벤은 망치를 두드려 가죽 장화를 만들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던 작은 못을 가죽장화 밑창에 댄 그는 옆에 놔둔 망치를 다시 들어 못을 밑창에 박아 넣었다.
왕성 가죽 공방에서 일을 하며 배운 숙련된 신발 제작 기술은 그가 꺄뮤에 쉽게 정착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 주고 있었다.
“쉬엄쉬엄 하게.”
공방의 주인인 나이 든 노인이 쾰벤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했다.
사람들은 쾰벤이 미샹크 가문의 직계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점심 먹기 전에 예약된 이 신발을 완성하려고요.”
누런 앞치마를 두른 쾰벤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정말 부지런하군. 나는 옆 가게에 좀 다녀오겠네. 가지고 올 게 있어서 말이야.”
“다녀오십시오.”
노인에게 인사를 한 쾰벤은 다시 가죽 장화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다 공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웬 사내가 공방 입구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저를 몰라보겠습니까?”
“누구신지……”
말끝을 흐리던 쾰벤의 눈이 커졌다.
“아니, 너는!”
“오랜만입니다, 쾰벤 형님. 저 파렐입니다.”
“그래, 파렐! 너였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쾰벤이 파렐을 반갑게 맞았다.
“미안하다. 하도 오랜만이어서 순간 네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수 있죠. 마지막으로 본게 10년도 훨씬 넘었으니 말입니다.”
파렐보다 서너 살 나이가 많은 쾰벤은 십수 년 전 미샹크 가문에 놀러 온 어린 파렐과 죽이 제법 맞아 그와 함께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바다에서 수영도 하며 즐겁게 지내던 때가 있었다.
그 뒤로도 가문의 행사 때 종종 만나 친하게 어울려 다녔었다.
하지만 쾰벤이 10여 년 전 미샹크 가문에서 쫓겨난 뒤로는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사라졌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백부님의 사신으로 알베른에 왔습니다.”
“사신으로?”
쾰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 쾰츠 형님 문제로 온 거냐? 그렇다면 나는 너를 반갑게 맞이할 수가 없다. 알베른 영주님은 나와 가족들을 위기에서 구해 주신 분이다.”
“오해하지 마세요. 백부님은 알베른과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십니다. 쾰츠 형님이 죽은 건 안타깝지만, 누구도 그를 편들어 줄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쾰벤은 안도하며 기뻐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일을 하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알베른 영주가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때 공방 안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잠깐만 기다려라. 금방 오마.”
쾰벤이 손님을 상대하는 것을 한쪽에 서서 지켜보던 파렐은 속으로 탄식을 했다.
과거 신분 높은 고위 귀족이었던 그가 때 묻은 작업용 앞치마를 입고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이며 물건을 파는 것이 보기 안쓰러웠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보다 형님,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의미심장한 그의 질문에 쾰벤은 자신이 만들다 만 가죽 장화에 시선을 두며 밝게 답했다.
“10년 전으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다. 내 아내와 결혼을 하고 지금의 아이들을 둘 거야. 그게 내 삶의 가장 큰 행복이다.”
“그렇습니까?”
“언제 돌아가냐?”
“내일 갈 생각입니다.”
“그럼, 오늘 저녁때 다시 보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함께해야지.”
잠시 말이 없던 파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집으로 가겠습니다. 형님이 미샹크 가문을 버리고 선택한 그 행복을 저도 만나 보고 싶습니다.”
몽페르도 ⑴
‘오늘도 저 괴상한 갑옷을 입고 성벽을 따라 달리는군.’
성내 별관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파렐은 멀리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성벽 위를 달리고 있는 이안의 모습을 관심 깊게 응시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알베른 영주는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거워 보이는 중갑을 걸치고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정말 부지런해. 평소에는 저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거군.’
꺄뮤에 도착한 지 3일째가 되어가는 파렐은 팔짱을 끼고 깊은 눈빛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성벽 위의 이안을 바라봤다.
알베른 영주는 자기 관리에 정말 철저한 사람 같았다.
며칠 사이에 알베른 영주의 진면목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에 대해 알아 갈수록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런데 투구를 들고 뛰는 저 뚱뚱한 자는 누구지?’
어제오늘 영주 곁에서 죽어라 뛰는 남자의 정체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며칠 더 머물다 가시지 그러시오.”
이안의 말에 파렐은 웃는 낯으로 정중히 대답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부님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영주관 앞 분수대에 걸터앉아 파렐과 얘기를 주고받던 이안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끈적거리는 날씨는 아니었다.
“그럼 어쩔 수 없겠소. 론도.”
이안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론도가 들고 있던 서신을 이안에게 건넸다.
이안이 어젯밤에 작성한 에뉴딘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내 마음이 이 서신에 담겨 있으니, 가서 에뉴딘 대영주께 잘전해 주시오.”
“예.”
파렐은 이안이 직접 손으로 건네는 서신을 받았다.
“그래, 사촌은 만나 보셨소?”
“예, 어제저녁에 그의 집을 방문해 저녁도 함께했습니다. 아주 좋은 자리였습니다.”
파렐은 쾰벤 가족의 단란한 모습에 자신이 생각해 왔듯 쾰벤이 불행한 게 아니라 느꼈다.
솔직히 파렐은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을 선택할 자신은 없었다.
자신이 높은 경지에 오른 강자라 해도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쾰벤은 돈과 권력, 신분, 명예를 모두 내팽개치고 오직 사랑을 선택해 과감하게 나아갔다.
그야말로 진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사촌과 사촌 가족은 영주님께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사촌을 배려해 주시는 영주님의 넓은 마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쾰벤을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 꺄뮤를 방문해 주시오.”
“그러겠습니다, 영주님.”
“그리고 이건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신 에뉴딘 대영주님께 보내는 내 작은 성의요.”
병사들이 알베른 신약이 든 상자 다섯 개를 가지고 왔다.
“요즘 인기 있는 그 약이군요. 감사합니다, 영주님.”
“약을 마차에 실어라.”
론도가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분수대 뒤편 길 위엔 파렐이 코페나 항구까지 타고 갈 마차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영주님의 따뜻한 환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분수대 턱에 걸터앉아 있던 이안이 땅으로 내려와 두 다리로 섰다.
그는 파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가시오, 또 봅시다.”
“예, 영주님.”
뒷걸음으로 몇 걸음 물러난 파렐은 곧 분수대 뒤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이안은 영주관으로 향하다 걸음을 멈췄다.
경비대장이 영주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안은 잠시 기다렸다가 경비대장이 앞에 당도하자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영주님, 모멩 영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오, 그래? 말을 공급해 주겠대?”
이안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송구하오나, 모멩 영주 측도 말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있던 말들은 보넌 대영주가 모두 구입했고 말입니다.”
“보넌 대영주가?”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웃돈을 주고라도 모멩 영주에게서 킬라센종 전투마를 구입하고 싶었지만 어렵게 됐다.
“아예 말이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을 구입하려면 2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강력한 기병을 육성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경비대장은 아쉬운 표정으로 답했다.
‘젠장. 보넌 대영주는 자체 말목장도 있으면서 왜 말을 다 사가는 거야?’
속으로 투덜대던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 경비대장에게 말을 했다.
“내일 몽페르도 가문에 다녀와야겠어.”
‘여긴 여전하군. 코페나 황무지보다 조금 나은 정도야.’
숲과 강이 적은 척박한 땅으로 이뤄진 테니마르 가문의 영지에 발을 디딘 이안은 먼지바람을 피해 술집으로 들어갔다.
일전에도 이 술집에 들러 배를 채우고 테니마르성으로 갔었다.
“간단히 먹을 음식을 부탁드립니다.”
“으깬 감자와 염소 고기밖에 없습니다.”
“그걸로 주십시오. 술도 하나 주시고요.”
생각해 보니 그때 주문해 먹은 음식도 같은 음식들이었다.
먼저 나온 싸구려 술을 따라 마시던 이안은 등 뒤에서 사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우리 영주님이 영지를 위기에서 구해 내실 줄 알았어.”
“언제는 상인에게 속은 어리석은 영주라고 욕을 했으면서, 이제 와 다른 소리인가?”
“내가 언제? 아무튼 우리 영주님은 대단해. 스롯 금광에서 금을 캐내 여러 마을을 도와주시다니 말이야.”
“하늘이 도운 거야. 폐광된 지 2백 년이나 된 금광에서 금맥이 다시 발견되다니. 이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라고.”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스롯 금광이 폐쇄된 게 금이 안 나와서가 아니라 그곳에 무서운 언데드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라는 말을 내가 어렸을 때 얼핏들은 적이 있었어. 어쩌면 영주님이 그 언데드들을 물리치신 건지도 몰라.”
“그거 다 헛소문이야. 언데드들은 2백 년 전에 모두 사라졌잖아.”
“맞아. 그런 불길한 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언데드를 만든 지카롤 영주 때문에 우리 영지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또 언데드야?”
두 사람은 언데드 이야기를 꺼낸 남자를 타박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테니마르 사람들에겐 그 일이 현재에도 영향을 주는 아픈 과거였다.
다른 영지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차별을 받는 일.
이 모든 시작이 지카롤과 언데드였다.
“자, 건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가축 돌봐야 돼.”
“알았네.”
“자, 영주님을 위해! 스롯 금광을 위해!”
세 사내는 한목소리로 외치며 건배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을 나갔다.
조용해진 술집에서 이안은 유일한 손님으로 남아 묵묵히 술을 곁들인 음식을 비워 갔다.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스롯 금광 하나로 테니마르가 되살아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잘됐어.’
이안이 몽페르도로 가는 길에 테니마르에 들른 이유는 카리올 영주에게 마르체로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술과 음식을 깨끗이 비운 이안은 술집을 나와 테니마르성이 있는 곳을 향해 워프를 발휘했다.
카리올 영주의 아들 밀로는 어렸을 때 마법사가 키우는 벌에 쏘인 이후로 두 팔이 무쇠처럼 단단하게 변했다.
마음먹기에 따라 두 팔이 허벅지보다 굵게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밀로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두 팔을 십자로 교차해 위에서 떨어지는 적의 포스검을 막아 냈다.
콰앙!
몸이 뒤로 밀려 나갔지만 상대의 포스검은 그의 단단한 팔에 가로막혔다.
“빌어먹을!”
밀로를 공격한 중년인은 자신의 검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끼던 검이 밀로의 강철 같은 팔과 충돌한 후 검신이 부러져 버렸다.
“조심해!”
뒤에서 형제들이 경고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중년인이 앞을 쳐다봤다.
저만치 뒤로 밀려 났던 밀로가 어느새 코앞에서 거대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번개처럼 빠른 몸놀림이었다.
“이놈이!”
첸칼로토 형제 강도단의 여섯째는 옆으로 고개를 틀어 밀로의 강력한 주먹을 피한 후 부러진 검으로 밀로의 옆구리를 찌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보다 밀로의 움직임이 반 박자 빨랐다.
퍽!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강도단의 여섯째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쿵!
형제들이 늘어서 있는 발밑에 처박힌 그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밀로의 주먹 한 방에 숨이 끊어진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싸움을 지켜봤던 첸칼로토 형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하며 살기가 짙게 피어 올랐다.
“자! 약속을 지켜! 이제 이곳에서 나가!”
밀로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영주관으로 침입한 첸칼로토 형제들에게 외쳤다.
왕국의 악명 높은 강도단 중 하나인 첸칼로토 형제들은 저 마다 무기를 꺼냈다.
“너를 죽이고 네 뒤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네놈의 쌍둥이 동생들도 죽이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스롯 금광에서 일을 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네놈의 거지 같은 아비 카리올도 사지를 잘라 죽이겠다. 그것이 네놈이 우리 형제를 죽인 대가다.”
첸칼로토 형제 강도단은 우연찮게 테니마르 근처를 지나다 돈 냄새를 맡고 이곳으로 왔다.
테니마르가 별 볼 일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손쉽게 스롯 금광에서 나온 금괴들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제를 한 명 잃고 말았다.
“내가 저자와 싸워 이기면 순순히 물러간다고 했잖아!”
밀로는 죽은 여섯째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빠, 악당들이 약속 지키는 것 봤어?”
“넌 조용히 해!”
뒤를 돌아보며 쌍둥이 여동생들에게 소리를 친 밀로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스롯으로 구경 가겠다고 하던 동생들을 자신이 억지로 말리는 바람에 동생들도 목숨이 위험하게 됐다.
자신의 잘못이다.
남은 다섯 명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저들은 개개인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오빠, 우린 걱정 마. 죽어도 나비가 되어서 이 세상을 날아다닐 테니까.”
“응, 맞아. 우린 그럴 거야.”
“바보들. 죽으면 그냥 죽는 거야. 나비가 되는 게 아니야.”
이를 악문 밀로는 고개를 돌려 첸칼로토 형제들을 노려봤다.
“좋아! 금고 열쇠를 줄게. 금괴를 가지고 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만약 내 동생의 털끝 하나 건드린다면, 그놈은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늦었다. 내 형제가 죽은 순간, 너희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동생들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나던 밀로의 등에 동생들의 손이 닿았다.
“오빠,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막혔어.”
뒤를 돌아보니 응접실의 막다른 벽이었다.
“내가 이들을 막고 있을 테니까, 저기 창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쳐.”
오른쪽 측면에 창문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의도를 읽은 듯, 강도단 중 하나가 창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애송아, 세상의 쓴맛을 보여 주마.”
첸칼로토 형제들이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포스검도 막는 밀로의 통나무처럼 굵은 팔과 주먹의 무서움을 이미 한번 봤기 때문에 떼로 공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창문 앞을 지키는 한 명을 제외한 네 명의 험상궂게 생긴 자들이 검을 휘두르자, 응접실 전체가 칼바람에 휩싸였다.
“이거나 처먹어!”
등 뒤 화분에 있던 흙을 은밀히 손에 쥐고 있던 밀로는 제일 앞서 오는 자의 눈을 향해 고운 흙을 뿌렸다.
“이런 얍삽한 자식!”
눈에 흙이 들어간 둘째가 주춤 거릴 때 나머지 세 명이 밀로의 목과 가슴을 노리고 검을 찔렀다.
채채챙!
이안에게 배운 보법을 밟으며 번개처럼 세 명의 검을 주먹으로 튕겨 낸 밀로는 제일 가까운 자의 사타구니를 발등으로 걷어찼다.
“컥!”
인상을 일그러트리는 그의 얼굴을 밀로가 주먹으로 후려쳤다.
“꺼져, 이 새끼야!”
콰앙!
머리가 수박처럼 부서진 넷째가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 모습에 남은 자들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놀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한번 해볼 만해. 아니, 무조건 이겨야 해!’
이안이 알려 준 보법을 발휘해 순간의 위기를 넘긴 밀로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