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bearing Tyrant RAW - chapter (587)
12성탑 (5)
꽃 농장을 나와 12성탑으로 향하던 이안은 12성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잠시 멈춰 섰다.
밤을 잊은 듯, 많은 순례자들이 언덕에 모여 분지에서 어둠을 밝히는 12성탑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밤에 보니 또 다른 느낌이군.’
탑 상층부에서 피어오르는 열두개의 거대한 불꽃은 장엄했다.
낮보다 그 불길이 몇 배는 더 커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밤과 낮에 불길의 세기를 조절하는 것 같았다.
‘저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나 돌보지.’
거대한 불길을 매일 유지하기 위해 드는 기름값만 해도 엄청날것 같았다.
어쩌면 순례자들에게 받은 고가의 입장비로 탑의 기름값을 충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안은 언덕 위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는 수많은 순례자들을 돌아봤다.
‘하긴 저들은 이런 것을 보기 위해 왔을지도.’
성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돈과 시간을 들여 일부러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 12성탑으로 가 볼까.’
언덕 위에서 12성탑이 내뿜는 불빛을 잠시 감상하던 이안이 워프를 발휘하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이 뒤돌아보니 멀리서 횃불을 든 기병들이 마차를 호위하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길을 막지 말고 옆으로 비켜라!”
언덕길까지 막으며 좌우로 길게 늘어선 채 기도를 드리던 순례자들은 거친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다급히 옆으로 길을 터줬다.
횃불을 든 10여 명의 기병들이 마차를 호위하며 바람처럼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두두두두..
언덕 정상을 지나 12성탑이 자리한 분지를 향해 빠르게 내려가는 마차 행렬을 보며 이안은 턱을 매만졌다.
‘마차에 누가 타고 있는 거지?’
* * *
낮에 사람으로 북적이던 12성탑 경내는 샬렌교 무사들만이 간간이 보일 뿐 텅 비어 있었다.
야간에는 순례자의 12성탑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조용한 곳을 두 사람이 산책하듯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대신관 메리나와 검사 코웨인이었다.
허리에 고풍스러운 검을 차고 있는 나이 지긋한 백발의 코웨인은 베니뇽 왕실의 왕자 데이브의 검술 스승이었다.
그는 장엄하게 타오르는 탑의 불길을 바라보다가 감탄을 터트렸다.
“150년간 이 탑의 불길이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탑의 불을 볼 때마다 경건한 마음이 드는군요.”
“그렇습니까?”
메리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코웨인은 아련한 눈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불길을 올려다봤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메리나 대신관님이 이곳의 대신관으로 부임되어 오시기 전에 우연찮게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생각나는군요. 젊고 패기 넘치던 제가 말입니다.”
“코웨인 경은 지금도 젊으십니다.”
“제가요?”
60이 훌쩍 넘은 코웨인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외견상으로는 자신이 메리나보다 더 늙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20살은 더 많았다.
그러니 그녀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녀 기준으로 보면 자신은 아직 괜찮은 나이였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탑의 옆을 걷던 코웨인이 서서히 웃음기를 거두고 차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 말입니까?”
“대신관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 왕실이 어떤지.”
“음.”
메리나의 눈빛이 깊어졌다.
현재 베니뇽 왕실은 디오빈 왕과 데이브 왕자 간의 갈등으로 인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욕심 많은 디오빈 왕은 왕위를 자식에게 양위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데이브 왕자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전하는 지금 우리 왕자님을 왕관을 찬탈해 가려는 역적처럼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베니뇽 왕실은 아무리 왕이 훌륭해도 왕실 법도에 따라 왕의 재위 기간을 정해 놓고 있습니다.”
걸음을 멈춘 코웨인은 메리나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전하를 만나 양위를 설득해 주십시오.”
메리나가 놀란 눈으로 코웨인을 바라봤다.
“경은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왕실 일에 제가 어떻게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12성탑의 대신관이 아닙니까? 150년 전 모디보엥 왕 이후로 역대 왕들은 샬렌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면 12성탑의 대신관에게 조언을 구해 왔습니다. 샬렌교 교주도 아닌 바로 12성탑의 대신관에게 말입니다.”
베니뇽 왕실은 과거의 인연으로 인해 샬렌교 교주보다 12성탑의 대신관과 더 가까운 관계였다.
코웨인은 간곡하게 거듭 부탁을 했다.
“전하를 설득하지 못하면 이웃 왕국인 벨로린처럼 왕국이 갈라져 큰 전쟁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왕자님은 그렇게까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데이브 왕자는 이미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면 왕국의 반이 일어서게 된다.
왕이라 해도 그것은 막기 힘들 정도의 힘이었다.
코웨인은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데이브 왕자님이 보낸 서신입니다.”
메리나는 서신을 받아 그 자리에서 읽어 내려갔다.
왕을 설득해 왕좌에서 내려오게 한다면, 데이브 왕자가 샬렌교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이 담긴 서신이었다.
150년 전 모디보엥 왕 이후로 왕으로서는 두 번째로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에 메리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실 디오빈 왕은 왕실 연회에 메리나를 꾸준히 초대할 만큼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데이브 왕자가 이런 서신을 보낸 것이다.
“왕자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전하만 설득하면 됩니다. 그럼 모든 게 평화로워집니다.”
마차를 탄 코웨인이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12성탑을 떠나자 메리나가 코웃음을 쳤다.
“설득하다 12성탑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구나.”
서신을 불태워 버린 그녀는 사원으로 돌아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코웨인과 대화를 나눴던 탑 뒤편의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웬 놈이냐!”
샬렌교 무사들이 검을 뽑자 메리나가 손을 뻗어 막았다.
“물러나라. 내 손님이다.”
미간을 찌푸린 메리나는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봤다.
주변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눈치를 못 챘다. 코웨인과 나눈 대화를 이안이 모두 엿들었을지도 모른다.
“낮에 보고 또 보는군요. 여기가 순례자 마을인가요?”
가시 돋친 그녀의 말에 이안은 담담히 대꾸했다.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일이 생겨서 절차를 따져 들어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이곳은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리죠. 하지만 제 말을 들으신다면 제 이런 행동을 조금은 이해해 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이안은 감정의 동요 없이 차분히 말했다.
‘이자의 분위기가 낮과는 사뭇 다르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동안 말없이 이안을 바라보던 그녀는 코웨인과 밀담을 나누기 위해 뒤로 물렸었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안과 단둘이 된 메리나는 가까운 탑 안으로 이안을 데리고 들어갔다.
탑 내부 벽면은 샬렌을 추앙하는 성스러운 그림과 조각 들이 어우러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안쪽에는 돌을 다듬어 만든 기다란 제단이 보였다.
제단 위에는 낮에 순례자들이 놓고 간 듯한 꽃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낮에 둘러보지 못했던 탑 내부를 의도치 않게 마주한 이안은 주변을 가볍게 돌아보다가 제단으로 다가가 꽃을 한 송이 들어 냄새를 맡아 봤다.
“제단에 헌화된 꽃은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됩니다.”
“샬렌님께서는 헌화된 꽃의 정성을 이미 다 받지 않았을까요? 시간도 많이 지났는데요.”
“그것은 교와 상관없는 외부인이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근엄한 메리나의 말투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외부인이 판단해선 안 되는군요. 제가 주제넘었나 봅니다.”
이안은 꽃 농장에서 자랐을지도 모르는 붉은 튤립을 다시 그 자리에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메리나는 제단 앞에 서 있는 이안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12성탑 상층부에서 불타는 불길이 얼마나 밝은지 탑 외벽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불빛이 두 사람이 서 있는 탑 내부를 환히 밝혀 주고 있었다.
“화가 나 있군요.”
후드를 벗은 이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메리나가 말했다.
이안은 제단에 엉덩이를 걸쳤다.
“네, 상당히 화가 나 있습니다.
지금 많이 참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성탑의 제단에서는 엉덩이를 떼는 게 좋을 겁니다.”
“싫다면요?”
이안의 말에 메리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런 경우없는 짓을 할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경우라. 그럼 12성탑에 버려진 어린애들을 노예처럼 길러 죽도록 일을 시키다가 마음에 안 들면 가축처럼 그냥 죽여 버리는 건 무슨 경우입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순례자 마을에 꽃 농장을 운영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지금 제가 말한 그런 짓을 벌이고 있더군요.”
이안은 꽃 농장에서 벌어진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12성탑에 버려진 아이들이 꽃농장에서 학대받으며 성장해 노예처럼 일을 했고, 순례자 마을에서 꽃을 팔았다는 말에 메리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오늘 내가 그 아이들을 돕지 않았다면, 아마 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제단 위에 쌓여 있는 꽃들을 쳐다봤다.
저 꽃들 중에 이안이 말한 꽃농장에서 들어온 꽃들도 있을 것이다.
“비키세요.”
차갑게 말을 한 메리나는 이안이 제단에서 비켜서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감히 그런 더러운 꽃들을 올려놓다니!”
제단 위의 꽃들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에 의해 재로 변해 갔다.
불타는 꽃들을 노려보던 메리나는 이안을 돌아봤다.
“그놈은 어디 있습니까? 감히 순례자 마을에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내 손에 이미 죽었습니다.”
이안은 꽃 농장 얘기에 분노하는 메리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만약 그녀도 관련되어 있었다면 이안은 메리나까지 손을 볼 생각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꽃이 타 불씨만 날라다니는 제단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부끄럽군요. 12성탑 바로 옆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그 꽃 농장에 사람을 보내 아이들을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손볼 자가 또 있습니다.”
“누가 또 있다는 겁니까? 죽였다면서요?”
이안은 메리나 앞에 섰다.
“그 꽃 농장 주인이 그런 짓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12성탑의 고위 사제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리가.”
메리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바라봤다.
“그자가 누군지 말해 보세요. 어느 놈이 감히!”
“마드노 대사제입니다.”
* * *
대신관인 메리나는 12성탑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성지의 자잘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 일을 대신하는 실무자가 마드노 대사제였다.
그는 순례자 마을도 관리한다.
따라서 순례자 마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대신관 메리나가 아닌 마드노 대사제였다.
“이놈들! 감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잠을 자다 끌려온 마드노는 마차 안에서 굴러떨어졌다.
안에 타고 있던 샬렌교 무사가 발로 그의 등을 걷어찬 것이다.
“어이쿠!”
바닥에 처박힌 마드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끌려온 장소를 뒤늦게 확인했다.
이곳은 조카가 운영하는 꽃 농장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백여 명이 넘는 샬렌교 무사들이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한 손에는 검을 비스듬히 내려든 채 길을 따라 2열로 늘어서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마드노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몽그론 그놈의 일이 발각됐구나.’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샬렌교 무사들 사이를 힘없이 걸어갔다.
그 끝엔 대신관 메리나와 후드를 쓴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한쪽엔 몽그론이 학대하던 여러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모여 있었다.
“대, 대신관님, 뭔가 오해가
“닥쳐라! 여기 있는 아이들로부터 모든 얘기를 다 들었다!”
메리나는 르잔을 비롯한 아이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네놈이 여기서 학대받아 죽은 아이들의 일을 덮어 주고 환각제까지 만들도록 부추겼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대신관님! 아닙니다! 저것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충성스러운 샬렌교의 종입니다.”
배가 축 늘어진 마드노는 무릎걸음으로 메리나에게 기어갔다.
“저는 오랫동안 대신관님을 위해 12성탑에서 헌신을 다했습니다. 이것은 음모입니다. 부디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향주머니 ⑴
“이 꽃 농장 주인은 네 조카가 아니더냐?”
메리나는 무릎걸음으로 기어오고 있는 마드노에게 차갑게 물었다.
“마, 맞습니다, 몽그론은 제 조카입니다.”
“저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한데 무엇이 음모란 말이냐! 모든 것이 일치하는데! 네가 이 지옥 같은 꽃 농장을 유지하도록 몽그론을 뒤에서 도운 게 아니더냐!”
메리나가 서릿발 같은 기세로 호통을 쳤다.
‘빌어먹을.’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한 마드노는 르잔과 아이들이 서 있는 방향을 힐끔 쳐다봤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던 그는 몽그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대신관님! 제 조카와 대면시켜주십시오! 이 자리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메리나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무릎걸음으로 기어 온 마드노는 바닥에 엎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메리나는 옆에 서 있던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이 몽그론을 죽여서 그를 대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 해서 네 죄가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관님! 억울합니다. 제가 이 꽃 농장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것은 몽그론입니다. 저는 결단코 그를 도운 일이 없습니다.”
“그럼 아이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냐?”
“아이들이 오해하도록 몽그론이 평소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저는 꽃 농장을 몇 차례 방문해 저 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수차례 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저 아이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듣고 있던 르잔이 소리쳤다.
“아니에요! 다 거짓말이에요!
대사제는 우리를 더러운 짐승이라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어요!”
“요 어린것이 겁도 없구나! 감히 대신관님 앞에서 남을 모함하다니! 거짓말을 하면 샬렌님이 만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영원토록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어서 바른말을 하거라! 내가 몽그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너희들이 지어낸 얘기라고!”
마드노가 벌떡 일어나 르잔을 무섭게 나무라자 잠자코 지켜보던 이안이 뚜벅뚜벅 걸어 나와 마드노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평범해 보이는 귀싸대기였지만 맞은 사람은 망치로 얼굴을 맞은 듯한 강한 충격에 오줌을 지릴 정도의 무서운 귀싸대기였다.
뺨을 감싸며 땅에 처박힌 마드노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때린 이안을 올려다봤다.
“다, 당신은 누군데 나를 때리는 것이오?”
이안은 대답 대신 또 때릴 것처럼 손을 위로 올렸다.
뺨을 한 대만 더 맞으면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마드노는 다급히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에 이안은 위로 올렸던 손을 다시 밑으로 내렸다.
“너 같은 놈이 12성탑의 고위사제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이 새끼야.”
이안의 말을 뒤에서 듣고 있던 메리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이 꼭 12성탑의 책임자인 자신까지 꾸짖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안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후 메리나에게 작게 말했다.
“참을 수 없어서 뺨을 한 대 때리고 왔습니다. 이제는 나서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십시오.”
“고맙군요.”
이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메리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마드노에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마드노는 퉁퉁 부은 얼굴로 눈물을 쏟고 있었다.
“대신관님! 어찌 어린아이들의 말만 믿으시고 수십 년을 12성탑에 몸 바쳐 온 제 말은 믿지 않으시려는 것입니까? 흐흑!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샬렌님께서 제 무고함을 증명해 주실 겁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마드노를 봤다면 생사람을 잡는 것으로 보일 만큼 그는 크게 억울해했다.
“다 말했느냐?”
“예에?”
눈물을 흘리던 마드노는 차가운 메리나의 시선에 눈물이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네 거짓말도 구별하지 못할 만큼 내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였느냐?”
“대, 대신관님.”
“너는 샬렌교의 명예와 12성탑의 명예를 더럽혔다. 회개치 않는 네놈에게 벌을 내리겠다. 저놈을 화형대에 묶어라.”
“예! 대신관님!”
샬렌교 무사들이 마드노의 양쪽 팔을 붙잡고 꽃 농장 공터에 나무를 쌓아 만들어 놓은 화형대로 끌고 갔다.
마드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 안 돼. 나는 고위 사제야! 나를 죽이려면 교주님의 명령을 얻어 와라! 이거 놔!”
마드노는 몸부림치며 반항했지만, 결국 잠시 후 십자가 모양의 나무틀에 사지가 쇠사슬로 묶여 고정된 신세가 됐다.
그의 발밑 주변에는 기름이 뿌려진 나무들이 가득했다.
절망에 빠진 마드노는 화형대로 다가온 메리나에게 애원했다.
“대신관님, 죄, 죄를 인정하겠습니다. 몽그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제 죄를 인정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늦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마드노의 애원을 듣던 메리나가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진 작은 불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더니 기름이 뿌려진 나무에 내려앉았다.
잠시 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화르르르.
마드노의 발아래 쌓아 놓았던 나무들이 삽시간에 불이 붙어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으아아아! 뜨거워!”
십자가 틀에 몸이 묶인 채 살점이 타들어 가던 마드노가 목청껏 비명을 내질렀다.
그 끔직한 모습에 지켜보던 르잔과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메리나! 이 늙은 것아! 지옥에서 네년을 기다리겠다! 크아아아아!”
메리나에게 저주를 퍼붓던 마드노의 얼굴에 불길이 솟구쳤다.
입을 벌린 채 그는 숨이 끊어졌고, 불길은 그의 몸을 휘감으며 육신을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불길에 휩싸인 마드노를 노려보던 메리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이안에게 다가갔다.
“성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내 불찰입니다.”
“맞습니다. 아랫사람들에게만 일을 맡겨 놓지 마시고 가끔은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이안의 말에 메리나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말에 설마 이런 식으로 대꾸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어서 그녀는 뭐라 내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잘못을 알고 바로 시정하는 건 잘하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안은 그녀의 시원한 일 처리에 만족하며 그녀를 칭찬했다.
메리나는 자기네 식구인 대사제를 감싸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형이라는 극형으로 일을 끝내 버렸다.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던 메리나는 이안의 칭찬에 슬며시 표정을 풀고 헛기침을 했다.
“늙은이를 들었다 놨다 하는군요.”
“만약 대신관님이 이번 일을 가볍게 처리하고 지나치려 했다면, 저는 무척 실망했을 겁니다.”
“그런 일이 없어 다행이군요.”
이안과 메리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꽃 농장 주인이 죽기 전에 이곳의 모든 것을 저 아이들에게 남기고 갔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제게 죽기 전에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안은 르잔과 아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아이들은 이안이 메리나 대신관과 함께 나타난 이후로 몸이 굳은 채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들에게 12성탑의 메리나는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꽃 농장 아이들이 잘 지내도록 뒤에서 보살펴 주겠습니다.”
메리나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기뻐할 겁니다.”
사람의 목숨은 의외로 질기다.
분명 죽어 마땅한 큰 부상이나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왕 불가사의한 생존력을 선보인다.
어깨뼈와 다리뼈가 일부 뽑혀 몸 밖으로 삐죽이 드러난 몽그론은 새벽 비를 맞으며 절벽 정상 위에 누워 있었다.
처참한 몰골의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놈은 대체 누구지? 샬렌이 보낸 악마인가?’
성지와 가까운 곳에서 그동안 많은 아이들을 죽였다. 다 큰 아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젖먹이 아기들이었다.
그나마 그가 방치했는데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남은 게 지금의 꽃 농장 아이들이었다.
‘목이 말랐는데 비가 와 다행이야.’
피가 엉겨 붙은 입술로 그는 내리는 새벽 비를 받아 마시기 위해 힘겹게 입술을 벌렸다.
“이런, 비가 내리네.”
유령처럼 나타난 이안이 몽그론 얼굴 위로 손바닥을 펴 그가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게 비를 막았다.
혀를 내뻗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받아 마시려 했던 몽그론은 이안의 손바닥 때문에 물 한방울 마시지 못하게 되자 이안에게 애원했다.
“제, 제발 그만해. 너무 고통스러워. 물이라도 마시게 해줘.”
“내가 기회를 줬잖아.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빌라고. 그걸 거부한 건 너야.”
이안은 몽그론을 단순히 죽이는 것에서 끝을 내려 하지 않았다.
몽그론 손에 학대받으며 큰 꽃농장 아이들의 영혼이 치유가 되도록 몽그론이 진심으로 그 아이들에게 사죄하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몽그론은 끝내 그것을 거부했고, 이에 이안은 그의 목숨을 부지시키며 계속 고통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알았어. 아이들에게 사죄하겠다. 그러니 그만 나를 죽여 줘, 크아아악!”
절벽 위의 커다란 개미들이 빗물도 무서워하지 않고 몽그론의 몸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피부 밖으로 드러난 어깨뼈를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는 개미들의 긴 행렬을 본 몽그론은 몸을 덜덜 떨며 괴로워했다.
“비가 그쳤네.”
새벽 비는 금세 멈췄고 이안은 수통을 꺼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사죄를 하겠다고! 그러니 나를 죽여 달라고, 이 망할 자식아!”
“늦었어. 꽃 농장은 아이들이 운영할 것이다. 걱정말고 최대한 버텨 봐. 혹시 아나, 누군가 이곳을 지나갈지?”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한 이안은 절벽 끝에 섰다.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붉은 태양이 구름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은 아주 장관이었다.
찬란한 황금빛이 절벽 위에 서 있는 이안의 얼굴을 밝게 비췄다.
“아 참, 이곳이 어딘지 말을 안해 줬군. 베니뇽 사람들은 이곳을 블렌 협곡이라 부르더군.”
이안의 말에 몽그론의 표정이 굳어졌다.
블렌 협곡은 수직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수많은 바위 암벽들이 밀집된 곳을 말했다.
지형이 험해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을뿐더러 미치지 않고서야 블렌 협곡의 위험천만한 절벽 위를 기어오르지도 않는다.
이안의 말대로 누군가 우연히라도 자신을 발견해 구해 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몽그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 이곳이 블렌 협곡일 리 없다.”
12성탑과 멀리 떨어진 블렌 협곡에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한 몽그론은 그럴 리 없다는 듯 턱을 좌우로 흔들었다.
기절한 몽그론을 절벽 위에 던져 놓았었던 이안은 피식 웃으며 뒤돌아섰다.
“사람 말을 왜 이렇게 못 믿냐?”
몽그론의 목을 강철 같은 손으로 움켜잡은 이안은 그를 공깃돌처럼 가볍게 들어 절벽 끝으로 걸어갔다.
이안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몽그론의 몸이 갈대처럼 힘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잘 봐, 이 새끼야. 너 같은 놈에게 보여 주기 싫은 일출 광경이니까.”
절벽 끝에서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을 취한 듯 잠시 바라보던 몽그론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직 절벽 아래 지상이 까마득하게 보였고, 이런 높이의 절벽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황량해 보이는 절벽들의 밀집지역.
“브, 블렌 협곡.”
몽그론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믿지 않았는데 실제로 이곳은 블렌 협곡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말을 타도 12성탑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며칠이나 걸릴 거리인데.”
거리도 거리였지만 기절한 자신을 데리고 어떻게 이 높은 절벽 정상까지 올라왔는지도 의문이었다.
“몽그론, 지옥에 가면 내가 보낸 새끼들이 널 반겨 줄 거다.”
“자, 잠깐만. 날 두고 간다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이안은 몽그론을 절벽 허공을 향해 던져 버렸다.
“으아아아악!”
새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가던 몽그론은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끝없이 추락을 했다.
잠시 후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가 절벽 아래쪽 깊은 곳에서 은은하게 들려왔다.
-왜 죽인 것이냐? 절벽 위에서 더 고통을 받게 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블란조르의 말에 이안은 일출을 감상하다 답했다.
“그냥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더 통쾌해서.”
-잔인한 녀석.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해 줘.”
한동안 일출을 감상하던 이안이 절벽 끝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