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bearing Tyrant RAW - chapter (588)
향주머니 (2)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웠다.
꽃 농장의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농장 앞으로 난 길까지 퍼져 나갔다.
꽃 농장은 길과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꽃 향은 거리를 무시하고 날아왔다.
“꽃 향이 좋군.”
순례자 마을을 거치지 않고 외곽의 좁은 길을 따라 12성탑으로 향하던 중년인은 말을 멈춰 세웠다.
백색 망토를 걸친 그는 샬렌교 율법사자 라논이었다.
코를 벌름거리며 오랜만에 신선한 꽃향기에 취해 있던 그는 길옆 꽃 농장을 바라봤다.
아이들 몇이 꽃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밝은 웃음소리도 들리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농장 집 자식들인가?”
잠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던 라논은 말을 출발시켰다.
얼마 뒤 그의 눈앞에 12성탑이 나타났다.
“빌어먹을. 이곳은 오기 싫었는데.”
교주의 말도 은근히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성깔 더러운 대신관 메리나를 떠올리던 라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의 허리를 찼다.
백색 망토를 휘날리며 언덕 아래로 빠르게 내려간 그는 성지를 지키는 샬렌교 무사들에게 말했다.
“율법사자 라논이다. 대신관님께 안내해라.”
사원 내부에 있는 대신관의 방으로 들어선 라논은 단 위의 의자에 앉아 있는 메리나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대신관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말없이 라논의 얼굴을 바라보던 메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다. 너는 어떠하냐, 잘지냈느냐?”
“저야 제 할 일을 하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율법사자는 늘 바쁜 법이지.
그래, 날 싫어하는 네가 여긴 무슨일로 온 것이냐?”
직설적인 그녀의 화법에 라논은 헛기침을 가볍게 했다.
“교주님의 명을 받고 토머스 대신관의 실종을 조사 중입니다. 그 일 때문에 몇 가지 확인코자 왔습니다.”
토머스의 실종을 조사하고 추적하는 일에 도네오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율법사자들이 동원된 상태였다.
라논도 그중 한 명이었다.
“토머스 대신관의 실종은 나도 궁금했던 일이다. 하루빨리 그를 찾아내야겠지.”
“그럼 협조를 해 주시겠습니까?”
“협조?”
눈빛이 차가워진 메리나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그래, 협조를 해 줘야지. 묻고 싶은 게 무엇이냐?”
라논은 품 안에서 도네오가 가지고 있었던 그림과 똑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이것을 봐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토머스 대신관을 습격한 범인의 인상착의입니다.”
메리나가 손짓을 하자 방 안에 있던 여사제가 라논에게 다가가 그림을 받아 왔다.
둘둘 말려 있는 그림을 펼쳐 보던 메리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라논을 쳐다봤다.
“이건 그저 후드를 입은 자가 아니더냐?”
범인의 인상착의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라논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노출된 범인의 모습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혹 생각나는 자가 있으십니까?”
라논은 그림을 든 메리나의 표정을 날카롭게 살폈다.
“너는 이것을 보고 후드로 가려진 사람의 얼굴을 알 수 있겠느냐?”
“저는 조사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 그림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놀리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따위 그림이나 들고 다니니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지. 가져가거라. 나는 모르겠다.”
메리나는 짜증 섞인 얼굴로 라논에게 그림을 돌려줬다.
‘토머스 그자 때문에 손가락 수정이 사라진 거야. 어리석은 자 같으니라고.’
사실 그녀는 트리시아 상단의 부단주 마르체로와 손가락 수정을 두고 가격을 협상하고 있었다.
한데 중간에 토머스가 개입해 마르체로가 손가락 수정을 숨겨 둔 곳을 찾아내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이후 토머스는 손가락 수정을 소지하고 있다가 의문의 사내에게 당해 실종되었다.
아마 그는 죽고 손가락 수정도 범인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대체 누구의 짓일까?’
미간을 찌푸린 채 앉아 있는 메리나에게 라논이 물었다.
“마르체로가 가지고 있었던 손가락 수정 때문에 대신관님과 토머스 대신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범인을 찾는 데 그 이야기가 왜 필요한 것이냐?”
“이번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폭넓게 조사 중입니다.”
“재밌구나. 교주가 나를 범인으로 몰라고 하더냐? 그래서 뒤늦게 나를 찾아온 것이냐?”
“예?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갑자기 교주 얘기가 나오자 중후한 목소리로 나름의 조사를 시작하려던 라논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한동안 물끄러미 라논을 바라보던 메리나가 말문을 열었다.
“궁금하다니 말을 해 주겠다. 마르체로는 손가락 수정의 가격협상을 질질 끌며 최대한 많은 돈을 받아 내려 했다. 마지막으로 그와 말로 오간 가격은 15만 금화였다. 이에 토머스 대신관이 나를 찾아와 마르체로를 죽이고 수정을 빼앗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그것은 교의 성물이고 잠시 남의 손에 들어간 격이니 말이다.”
“허락을 하셨습니까?”
“거절했다. 교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 게다가 아직 찾아야 할 초대 교주의 손가락 수정이 두 개나 더 남았는데, 만약 강제로 빼앗은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어느 누가 우리에게 수정을 팔겠다고 연락을 해오겠느냐?”
그녀의 말에 라논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해적 군도에 찾아가서 돈을 주고 해적들로부터 손가락 수정을 정당하게 구입하려 했던 것도 바로 메리나가 말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보이지 않는군.’
라논은 단 아래 서 있는 몇몇 사제들을 바라봤다.
해적 군도에서 그를 농락하며 손가락 수정을 가로채 간 메리나의 제자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그는 우연찮게 해적 군도의 청상어 해적단 두목에게 손가락 수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급히 돈을 마련해 거래를 하러 갔었다.
일이 잘만 풀리면 교주에게 큰 칭찬을 받고 교단에서 자신의 입지가 올라갈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교주의 지시로 간 것도 아니어서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었다.
‘그 빌어먹을 해적 놈만 아니었어도.’
라논은 검은 안대를 차고 있던 젊은 해적을 떠올렸다.
해적선장도 그의 눈치를 볼 정도로 아주 기세가 만만찮은 녀석이었다.
그자만 아니었다면 메리나의 제자에게 손가락 수정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라논이 떠올린 젊은 해적은 바로 이안이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이냐?”
과거 생각에 빠져 있던 라논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단 위를 바라봤다.
메리나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험, 듣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된 일인데, 토머스 대신관이 결국 힘으로 일을 처리하려다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가 만약 섣부른 행동만 하지 않았어도 교의 성물은 교로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아쉬움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라논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마르체로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들었다. 벨로린에서 어느 영주에게 죽었다고 하던데……”
메리나는 바로 생각이 안 났는지 뒷말을 흐렸다.
“알베른 영지의 이안 알베른입니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구나.”
라논은 그 뒤로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후 메리나 대신관에 대한 조사를 끝마쳤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돌아가서 교주에게 전하거라. 교주파인 토머스 대신관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라고.”
율법사자 앞에서 이렇게 교주를 쉽게 입에 담으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메리나밖에 없을 것이다.
가볍게 기침을 한 라논은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하루 쉬었다 가도 좋다.”
“말씀은 감사하나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라논이 이곳에 온 것은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그도 메리나가 이번 일을 벌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불편한 그녀 앞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한데 도네오는 조사해 봤느냐?”
“예?”
라논은 동료 율법사자인 도네오가 언급되자 의아한 얼굴로 메리 나를 바라봤다.
“토머스 대신관과 함께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비웠다. 그런 만큼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것도 필요치 않느냐는 말이다.”
순간 말문이 막힌 라논은 눈만 껌뻑 였다.
하지만 곧 정색하며 답했다.
“율법사자는 교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자존심만 높아서.”
혀를 차던 메리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단을 내려왔다.
“도네오는 지금 어디 있느냐?”
“아마 지금쯤 벨로린 왕국의 알베른 영지에 가 있을 것입니다.”
“알베른? 마르체로가 죽은 곳 말이냐?”
라논 앞에 선 메리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단서가 워낙 없다 보니 마르체로의 최후 행적까지 조사 중입니다. 혹시 모르니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메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만 물러가거라.”
라논은 조용히 대신관의 방을 나갔고, 메리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한동안 손가락에 낀 대신관의 반지를 다른 손으로 어루만지던 그녀는 몸을 돌려 지시를 내렸다.
“꽃 농장에 가서 현성에게 전해라. 오늘 저녁을 함께하자고 말이다.”
몽그론이 사라지자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꽃 농장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일이었다.
매일 일만 하던 아이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꿀맛처럼 달콤했다.
벌써 몇 시간 동안 땀을 뻘뻘흘리며 뛰어놀고 있었지만 다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삐꺽. 삐꺽.
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흔들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렇게 좋을까?”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이안에게 블란조르가 말했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그렇지? 아이들이 언제 저렇게 마음껏 뛰어놀았겠어. 걸어 다닐 나이가 됐을 때부터 소처럼 일만 했다던데.”
-아이들 말고, 너 말이다.
이안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블란조르를 쳐다봤다.
“내가?”
-그래, 너 말이다. 처음 너를 봤을 땐 네가 미소를 지어도 미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소 뒤에 웃지 않는 네 진짜 얼굴이 난 보였거든. 지구에서의 일이 영향을 미쳤겠지. 그런데 지금은 진짜 미소를 짓고 있다. 행복해 보이는.
“참나, 쑥스럽게 뭘 또 그렇게 자세히 봤어. 자기나 진짜 미소를 짓지.”
퉁명스럽게 대꾸한 이안은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뒀다.
아무래도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미소에 자신이 동화된 것 같았다.
흔들의자 옆에 놔둔 술병을 든 이안은 술을 한 모금 했다. 그리고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
“행복해져야지. 그래야 하고.”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블란조르도. 우리 모두 행복해 지자고.”
이안이 마치 건배하듯 블란조르 앞에서 술병을 들어 보였다.
“아저씨!”
술을 마시던 이안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놨다.
아이들과 뛰어놀던 르잔이 땀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이 신발 진짜 편해요!”
“아까도 그 말 한것 같은데?”
“또 말하고 싶었어요.”
숨을 헐떡이며 말을 하던 르잔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이안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들도 신발이 좋아서 다들 저렇게 계속 뛰어놀고 있어요.”
이안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서 놓아주지 않는 르잔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 말도 아까 한 것 같은데?”
“계속 말해도 지겹지 않아요. 그런데 이건 꿈이 아니죠?”
르잔의 말에 이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꿈 아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꿈이라면 이렇게 길게 꿀 수가 없거든요.”
이안의 품에서 벗어난 르잔은 질긴 가죽 장화를 신고서 돌이 굴러다니는 꽃 농장 앞마당을 마구 뛰어다녔다.
그녀를 괴롭혔던 돌 조각의 날카로움이 그녀의 신발 바닥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아저씨가 사 준 이 신발이 있으니까요!”
햇살 가득한 마당에서 르잔은 이안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