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bearing Tyrant RAW - chapter (981)
방문 (9)
수백 척의 배들이 이리아니강을 가득 메우며 내륙 깊숙이 이동중이었다.
로즈 가문의 해군과 라프지아 왕실군이 탄 배들이었다.
11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실은 선단은 위풍당당했고, 가로 막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박살 낼 기세였다.
선두에서 함선들을 이끄는 거대 전함 로즈호 갑판엔 시니아스와 그의 신하들 수십여 명이 갑옷을 입은 채 도열해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시니아스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그의 시야에 강을 따라 길게 세워진 아리나 대요새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요새의 규모가 어찌나 큰지 마치 산처럼 보일 정도였다.
웅장한 아리나 대요새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로즈호 갑판 위로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영주님, 상륙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신하의 말에도 시니아스는 묵묵부답이었다.
갑판에 모여 있던 신하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이대로 계속 진군한다면 아리나 요새에 배치된 각종 원거리 무기들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전투대형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당할 수 있었다.
“대영주님, 지금 멈추지 않으면 상륙 지점을 지나치는 것은 물론 아군 전함들이 큰 피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파렐이 나서서 말을 하자 그때서야 시니아스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손짓을 했다.
“전함을 멈추고 강변에 병력을 상륙시켜라.”
“예, 대영주님!”
뒤에서 지켜보던 신하들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수천의 선발대가 본대에 한발앞서 강변에 상륙했다. 그들이 강변을 수색해 상륙 지점 일대의 안전을 확보하자, 본대의 하선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왕실 해군을 견제하고 배를 지킬 3만 병력을 남겨 두고 8만에 이르는 병력이 하선을 시작한 것이다.
왕실군의 신형 투석기와 비견되는 로즈 가문의 투석기들도 함선에서 육지로 조심스레 옮겨졌다.
분해된 상태로 옮겨지는 로즈 가문의 투석기들은 보넌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워 80기 정도만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80기에 이르는 투석기만으로도 내일 있을 요새 공격에 큰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가 됐다.
르셍타를 공격한 서부 연합군에겐 이 투석기가 20기 정도 배치되어 있었다.
운송하기가 어려워 적게 배치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 아리나 요새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그 정도 투석기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종종 예측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르셍타가 그렇게 격전지가 될 줄은 로즈 가문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수백 척의 배가 강변에 정박해 병사들과 말, 공성 무기들을 차례로 하역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니아스는 인근에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곳엔 당테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멀리 아리나 대요새를 깊은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당테는 시니아스가 다가와 자신의 옆에 서자 입을 뗐다.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심지어 가까이 상륙을 하는데도 말입니다.”
“요새에서 우리를 상대하는 게 더 유리하다 판단을 내린 게 아니겠습니까?”
시니아스의 대답에 당테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흰 수염을 훑어 내렸다.
잠시 말이 없던 당테가 물었다.
“요새 안으로는 아군이 침투해 들어갔습니까?”
“그렇습니다.”
“내일 그들의 활약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이 작전에 선뜻 동의한 건 그 한 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눈앞에 마주한 거대한 아리나 요새의 규모는 새삼 당테에게 많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수하들의 큰 희생이 예상됐다.
당테는 5만이나 되는 라프지아 왕실군을 헛되이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아시겠습니까, 대영주?”
당테가 강한 눈빛으로 말을 하자, 시니아스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요새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내일 검을 들고 참전을 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당테 경도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대영주가 직접 전장에 뛰어들겠다는 말입니까?”
당테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렇습니다. 설사 요새에 잠입해 있는 드반크 부대장이 성문을 열지 못해도 내가 직접 성벽을 타고 올라가 반드시 저 요새를 점령하겠습니다.”
시니아스는 내일 전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하하하!”
당테는 허리를 젖히며 껄껄 웃어 댔다. 그리고 서서히 웃음을 거두며 진중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지요. 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리나 요새엔 병사들의 병장기를 만들고 수리해 주는 대장간들이 있었다.
대장장이 보테트도 그 대장간 중 한 곳의 주인이었다.
원래는 요새 밖 아리나 도시에서 대장간을 운영했었는데, 왕실군과 계약을 맺고 요새 안 대장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는 병사들의 갑옷과 무기를 제작해 군에 납품하기도 한다.
최근엔 많은 양의 화살촉을 만들기도 했다.
“내일은 대장간 문을 닫게.”
“문을 닫으라고요?”
후끈한 열기가 가득한 대장간 안에서 보테트는 망치를 내려놓고, 보급 장교를 쳐다봤다.
“로즈 가문 녀석들이 지금 요새 밖에 와 있네. 상부에서는 저들이 내일 공격할 것으로 보고 있어.”
“아니,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 같은 대장장이들이 더 열심히 일을 해야지요. 왜 문을 닫고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란 말씀입니까?”
보테트의 용감한 말에 보급 장교는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아, 이 대장간은 성벽과 너무 가깝지 않나? 놈들도 사거리가 긴 투석기를 갖고 있다고 하니 이 대장간도 위험해 질 거야. 그러니 내 말대로 내일은 문을 닫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있게.”
“괜찮습니다, 보급 장교님. 전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어허, 이건 상부의 명령이네.”
보급 장교의 엄한 말에 보테트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보급 장교가 대장간을 떠나자 보테트는 뒤를 돌아봤다. 그의 두 아들들이 끓는 쇳물 앞에서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어쩌죠, 아버지?”
“별수 없잖느냐, 문을 닫아야지. 내일 대장간 문을 열고 있으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이다.”
“그럼 지하에 있는 사람들은요?”
“내일 싸움이 시작되면 요새가 난장판이 될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알아서들 움직여야지.”
보테트는 대장간 안쪽으로 걸어가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왕실군이 입는 갑옷과 투구가 들어 있었다.
“이것들을 지하로 옮겨라.”
대장간 지하실 문이 열리자 드반크는 위를 올려다봤다.
보테트의 자식들이 왕실군 갑옷과 투구 들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몸에 맞는 것을 하나씩 입으시면 됩니다.”
“고맙군.”
드반크는 보테트의 자식들이 지하실 바닥에 쌓아 놓은 갑옷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그와 함께 들어온 20명의 잠입조가 서 있었다.
해군 돌격 부대의 장교들과 로즈 가문의 가신들 중 무력이 출중한 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왕실군 병사의 옷을 입어 보겠나? 즐거운 마음으로 입게.”
드반크의 농담에 사람들이 웃으며 앞으로 나와 자신의 체형에 맞은 갑옷을 대충 골라 입기 시작했다.
투구까지 쓰니 영락없는 왕실군 병사였다.
“이거 왜 이리 안 빠져?”
방금 전 쓴 투구를 간신히 벗은 드반크는 손으로 투구를 잡고 좌우로 벌렸다.
“한결 편해졌군.”
헐렁해진 투구를 쓴 드반크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보테트를 쳐다봤다.
보테트는 막대한 돈을 받고 로즈 가문을 돕고 있었다. 드반크와 그 일행이 요새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보테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드반크 님, 로즈 가문의 병사들이 요새 밖에 도착했습니다.”
“음, 예정대로 대영주님이 오셨군.”
드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말인가?”
드반크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테트를 쏘아봤다. 그 눈빛에 움찔한 보테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보급 장교가 찾아와 내일 대장간 문을 닫으라고 했습니다. 성벽과 대장간이 가까워 위험하다면서 말입니다.”
보테트는 조금 전 대장간에서 보급 장교와 나눴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저희는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상부의 지시라며 닫으라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버티면 의심을 살 수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오늘 밤 대장간을 떠나야 합니다.”
“이 자식, 지금 수 쓰는 거 아니야?”
험상궂은 인상의 돌격대 장교가 인상을 쓰며 거칠게 말했다.
“저는 이미 당신들과 한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속이겠습니까?”
보테트가 불쾌하다는 듯 반박을 했다.
“그만하게. 돌발 상황이지 않나.”
드반크가 고개를 돌려 돌격대 장교에게 주의를 줬다.
“미안하네. 워낙 중요한 일이라 우리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어. 이해해 주게.”
드반크가 보테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과를 했다. 적지에서 유일한 아군은 눈앞의 보테트뿐이었다. 그를 의심하면 모든 게 흐트러진다.
“험, 아닙니다, 드반크 님. 아무튼 그래서 내일은 제 도움 없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알겠네. 그리하지.”
“그리고 여기, 말씀하신 요새 내부를 그린 지도입니다.”
보테트는 자신이 직접 종이에 그린 지도를 드반크에게 건넸다.
정밀하게 그려진 지도는 아니었지만 주요 건물과 성문으로 가는 지름길 등, 꼭 필요한 정보는 꼼꼼하게 담겨 있었다.
“고맙네. 많은 도움이 되겠어.”
지도를 살펴본 드반크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먹은 이안은 서재에서 여러 권의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톰이 책임자로 있는 인쇄소에서 발행한 5종의 책으로, 학교에 보급될 교과서였다.
인쇄소가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쇄소 사람들의 정성과 톰의 열정이 더해져 이른 시간에 교과서가 완성된 것이다.
톰이 필요한 내용을 취합해 첨삭하고 때론 직접 집필도 한 교과서는 이안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면 수천 권을 찍어 낼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교과서들은 꺄뮤 중앙학교와 올가을에 문을 열 지방학교에 보급된다.
적지 않은 돈이 소요되는 사업이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영지의 미래와 영지민들의 행복을 위한 작은 발걸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안은 앞으로도 톰을 계속해서 지원할 생각이었다.
“잘 만들었네. 역시 톰이야.”
내용도 좋았고, 책 상태도 아주 훌륭했다.
“합격.”
이안은 5종의 교과서 모두를 통과시켰다.
서재 책상에 교과서를 보기 좋게 쌓아 둔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어두운 밖을 한동안 내다보던 이안이 블란조르에게 말했다.
“경비대장은 고향이 진짜 그리워서 가려는 걸까?”
-갑자기 무슨 말이냐?
“아니, 그냥 좀 신경이 쓰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속내를 정말 읽기 힘든 사람이야.”
-잘랭이 걱정 되느냐?
이안은 몸을 돌려 블란조르를 바라봤다.
“잘랭은 내게 충성을 다한 사람이잖아.”
-이안의 부친을 죽였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으이그, 정말. 그걸 왜 봐서는.”
이안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그것을 블란조르가 목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해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잘랭과 이안의 부친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난 정말 궁금하다.
“나도 궁금해.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 일을 언급하는 순간, 고향으로 가겠다는 잘랭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끓고 있을 때 에딘이 서재로 들어왔다.
“왔냐?”
“하하하!”
에딘은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 댔다. 그 모습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서재에 있는 회의용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에딘네 집안과 브로나네 집안이 만나는 날이었다.
한쪽은 페르콘의 명문가였고, 다른 한쪽은 버섯과 작물을 키우는 평범한 집안이었다.
맺어지기 쉽지 않은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알렉시놀과 길레이나는 그런 것에 개방적인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됐어?”
이안이 묻자 에딘은 이안의 맞은편에 앉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잘됐어. 부모님은 브로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어.”
“그래? 결혼은?”
“1년 뒤에 앙렌리드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어. 그때 브로나네 친인척들도 모두 초대할 거야.”
“축하한다.”
이안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에딘은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고맙다. 나 이제 다시 열심히 운동도 하고 그러려고. 마법 핑계 대지 않고.”
“그 말 내가 기억하고 있을게. 지켜본다.”
이안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번 축하하고 가서 좀 쉬어라. 피곤해 보인다.”
“너랑 축하주 마셔야 하는데, 네 말대로 좀 피곤하네. 나중에 마시자.”
녹초가 된 에딘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에딘과 함께 서재 문으로 향하던 이안이 말했다.
“아, 그리고 말이야. 내일 아리나 요새에 가 보려고.”
“맞다! 시니아스 대영주가 군사를 이끌고 아리나 요새로 갔다고 그랬지?”
걸음을 멈춘 에딘이 이안을 바라봤다.
전쟁의 향배가 결정될 수도 있는 큰 싸움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