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lord in the Corner RAW novel - Chapter (437)
437화 -완-
태형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기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기쁜 그런 느낌?
그런 기분이 든 이유가 바로 저 앞에 있다.
“아빠!”
또렷한 발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는 저 별빛 머리카락 아이.
“놀러 갔다 올게!”
스텔라가 통보하듯 외치고 빠르게 휙 사라졌다. 태형은 그 뒷모습을 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또렷한 발음이라니…….”
스텔라가 컸다.
그리 많이 큰 건 아니다. 키가 조금 커지고, 힘도 조금 세진 정도다. 본체로는 더 힘차게 날갯짓을 할 수 있게 됐고, 마법도 더 강한 위력을 뽐내게 됐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저 발음이다.
이젠 스텔라도 비교적 또렷하게 발음할 줄 알게 됐다.
뀨뀨거리며 꼼지락거릴 때가 엊그제 같고, ‘빠빠’라며 혀짧은 발음을 할 때가 엊그제 같다. 그런데 저리도 또렷한 발음이라니!
‘당연하겠지. 언제까지고 멈춰 있을 순 없으니까.’
베르칸을 무찌른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많은 게 변했다.
오크들도, 환수들도, 페어리들도, 용계와 마계의 녀석들도 모두 몰라보게 성장했다. 세력도 더 커졌으며 힘도 더 강해졌고 더욱 성숙해졌다.
모두가 그렇듯, 스텔라 역시 성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건 태형도 잘 안다.
알긴 아는데…….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쩝.’
스텔라가 쑥쑥 커가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아이의 조그맣고 귀여운 모습을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이 큰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스텔라가 드래곤이라는 것.
보통 인간 아이였으면 진작 유치원을 보내니 초등학교를 보내니 했을 거다. 하지만 스텔라는 여전히 작다. 해츨링 특유의 느린 성장 속도 때문이다.
기나긴 수명만큼 영유아 기간도 긴 게 바로 드래곤. 스텔라는 앞으로도 꽤나 긴 시간을 이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정말 서서히 성장하겠지. 태형은 그 모든 순간 순간을 전부 남김없이 기록할 생각이었다.
‘역시 남는 건 사진과 영상뿐이야.’
현재 태형의 컴퓨터와 휴대폰엔 소환수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용량이 부족해 외장 하드도 샀을 정도였다.
그 많은 사진과 영상 중 절반을 차지하는 게 스텔라였을 정도니, 태형의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뭘 그리 아쉬워하나. 성장과 성숙이란 자연스러운 것인데 말일세.”
문득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태형의 집에 방문한 베르티온이었다. 태형은 피식 웃곤 베르티온에게 손을 흔들며 대꾸했다.
“그러는 베르티온이야 말로 더 아쉬운 표정인데요?”
“크흠.”
“뒤늦게 표정 관리할 생각하지 마십쇼. 딱 걸렸습니다.”
“자네는 역시 귀신같군. 사실 나도 아쉽네. 그거 아나? 스텔라가 이제 하부지라고 안 부르고 할아부지라고 부른단 말일세. 허어.”
베르티온이 땅이 꺼지듯 푹 한숨을 쉬었다. 태형은 키득키득 웃었다.
어째, 이 어르신이 자신보다 더 진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카인이 생각나는군. 우리 카인도 저렇게 귀여웠지. 지금은… 징그러워졌지만 말일세.”
베르티온의 친손자인 카인. 베르티온과의 첫 만남 당시, 사슬이가 구해 줬던 바로 그 남자아이.
그 아이 역시 스텔라처럼 아직 성년이 한참 남은 해츨링이었다. 드래곤 기준에 의하면, 애초에 스텔라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났다. 인간 식으로 따지면 2~3살 연상 오빠 정도?
한참 귀여울 나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리 반응이 다르다니.
“친손자한테 징그럽다뇨. 카인이 들으면 실망하겠는데요?”
“어휴. 말도 말게나. 그 녀석이 얼마나 사고뭉치인 줄 아는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하는 베르티온의 말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수긍하고 말았다.
베르티온은 한 번씩 카인을 대수림으로 데려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어린 해츨링 녀석이 난리란 난리는 잔뜩 치고 다닌 모습을 태형도 봤기 때문이다.
대수림에 산불을 내 버리질 않나, 대단위 창고동에 폭격 마법을 날려 버리질 않나.
하여튼 그 녀석은 정말 장난 아니었다. 스텔라도 나름대로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그 녀석에 비교하면 비교조차 못 될 정도였다.
아마도 사내 녀석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원래 사내 녀석이 훨씬 요란하게 크지 않나. 싸우고 대판 깨지면서 말이다.
“걔가 좀 말썽꾸러기이긴 하죠.”
“그렇다니까. 자네도 뭘 아는군. 정말 우리 일족의 최고 악동이라네. 미래에 뭐가 될지 모르겠군.”
“그리 사고뭉치이니, 아마 크게 될 겁니다. 커서는 사고 안 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태형은 미소 지었다.
악평투성이였지만, 그 악평 속엔 친손자를 향한 애정이 분명 듬뿍 담겨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네. 시간이 다 되었군. 가 보겠나?”
“예.”
베르티온이 태형을 방문한 건, 조금 후에 있을 큰 행사에 같이 참석하는 것.
그 큰 행사란, 바로 대관식이었다.
그동안 족장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카림이, 비로소 꿈에 그리던 오크 로드의 자리에 오르는 대관식.
* * *
카이센 대수림 남부의 대도시. 그 내부의 중앙 대광장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오크, 엘프, 드워프, 인간, 마족, 페어리, 어인족, 드래곤 등.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인파가 집중하는 곳은 딱 한 군데였다.
높은 단상 위에 홀로 우뚝 선 단 한 명. 드넓은 카이센 대수림과 그 너머의 드넓은 대지를 모두 다스리는 한 오크.
푸른도끼 부족의 지배자였고, 이젠 제국을 다스릴 로드가 될 사내.
“하이 오크 카림은 고개를 들어라.”
카림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 한 오크가 서 있었다.
그 사내는 주군을 제외하고 카림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사내이자 오늘 그에게 왕관을 씌워 줄 사내.
전대 족장이자 카림의 아버지. 카림 다음 가는 부족 최고의 전사 카리크였다.
이제 여기서 왕관을 씌워 줘야 하건만, 웬일인지 카리크는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아. 그거 아느냐? 난 이 순간이 꿈만 같다.”
“…아버지.”
“부족민들이 멸시하던 널 모른 척했던 내가, 널 매몰차게 추방했던 내가, 그런 내가 이렇게 네게 로드의 관을 씌워 주는 날이 오다니.”
카리크의 눈이 글썽거렸다. 그의 눈에 한 줄기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과거의 일 따위는 다 화해하고 이젠 부자지간에 허물조차 없었건만, 그런데도 아버지는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땐 아버지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몬스터가 득시글거렸던 그 위험한 대수림 환경에서 제 역할조차 못 하는 부족민은 쓸모가 없었지. 그런 부족민을 버리고 부족을 챙기는 건 지배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판단이었다.”
“…아들아.”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아버지의 냉철한 판단이 있었기에 부족이 존속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카림이 씩 웃었다. 카리크는 그런 카림의 눈을 보았다.
한치의 원망조차 없는 눈. 그 속엔 신뢰가 듬뿍 담겨 있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난 아버지가 좋다.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아버지도 그런 생각은 훌훌 털어 버려라. 우리, 앞으로도 함께 오래오래 제국을 이끌어 나가야 하지 않겠나?”
“…….”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이런 기쁜 순간에, 사내답지 않게 울어서야 되겠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부자는 눈빛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끄덕. 두 사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를 나누었다.
그것으로 카리크는 일말의 죄책감을 세상 밖으로 흩어 버렸다.
이내 눈물을 훔치곤, 왕관을 들었다.
그리곤 오러를 잔뜩 실어, 첫 입을 열었다.
“이거,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군. 내 아들 녀석은 대체 어떻게 이 많은 이들 앞에서 그렇게 유려하게 말을 꺼낼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카리크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광장 내 여기저기에 가벼운 웃음이 퍼졌다.
분위기는 그다지 엄숙하지 않았다. 대관식인데도 말이다. 오히려 여기저기 떠들고 장난치는 분위기였다.
그건 이들이 오크라서였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오크의 종족적인 특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카리크! 빨리해라! 나 똥 마렵다!”
“맞다! 나도 가서 빨리 족발 먹을 거다!”
“어차피 세상 인간들 모두가 우리 족장이 오크 로드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
“우우우!”
여기저기서 퍼지는 장난스러운 야유에 카리크가 알겠다는 듯 손짓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참 참을성도 없는 동족들이로군. 알겠다. 얼른 시작하지.”
카리크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딱히 형식은 없었다. 마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같은 연설이었다.
약 5분이 지나고, 지루한 건지 누군가가 꼼지락꼼지락 손장난을 치던 찰나, 카리크의 말이 끝났다.
“…위대하신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로드의 부활을 온 우주에 선포하는 바이다.”
카림이 고개를 숙였다.
카리크가 왕관을 씌웠다.
번쩍!
화려하게 장식된 왕관이 태양에 비춰 번쩍거렸고.
웅웅!
미리 설계된 왕관의 마나 회로가 반응하며 공명을 발한 찰나.
“와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광장 내에 떠들썩하게 울렸다.
천 년. 그 오랜 시간 동안 잊혔었던 모든 오크족의 지배자가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 * *
카림이 확장을 선포하고 첫발을 내디딘 지 5년이 훌쩍 지난 지금, 오크들의 나라는 어떤 인간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런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출현했으니 대륙이 떠들썩한 건 당연했다.
아프록시아 각지에서 로드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단이 방문했다. 마계와 용계, 탄타르 등. 태형의 다른 휘하 세력과 동맹들 역시 이 엄청난 사실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로 대수림에 방문했다.
카림은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이들과 소중한 동족들을 위해, 오늘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축제를 열 것을 선포했다.
천 년 만에 부활한 제국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 자그마치 열흘이나 계속되는 대규모 축제.
도시가 온통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대규모로 조성된 공연장에선 온갖 공연이 펼쳐졌고, 대연무장에선 결투 대회가 벌어졌다. 거리엔 노점상이 쫙 깔려 행인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했다.
모두가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태형은 카림과 함께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높디높은 언덕 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망할 것들은 정작 로드는 찾지 않고 자기들끼리 놀기에만 바쁘군. 젠장.”
“뭐 어때. 원래 다 그런 거잖아.”
툴툴거리는 카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태형이 웃었다.
이 축제의 주인공은 분명 카림이건만, 아무도 카림을 찾지 않는 아이러니라니. 서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카림의 치세가 훌륭하다는 증거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저 아래, 오크들의 표정을 보라. 어떠한 근심도 걱정도 없는 표정이지 않나.
행복하다는 뜻이다.
일자리는 많고 먹을 것 역시 풍족하다. 인간들은 이제 더는 오크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젠 오크는 대륙 어디든지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닐 수 있다.
그건 비단 아프록시아만이 아니다. 아프록시아에 새로 생겨난 대제국의 명성은 차원 너머의 지구에까지 퍼졌다.
그들이 지구에서 펼친 활약이 알려지며, 그 유명세는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있는 중.
이건 그야말로 오크들로선 꿈도 꿀 수 없던 환경. 그런 환경을 누가 만들었나?
바로 카림이다.
300명도 채 되지 않던 소규모 부족부터 제국에 이르기까지, 모두 카림의 손으로 만들었다.
그 모든 걸 오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굳이 생색낼 필요가 없는 거다.
자신들의 족장이, 아니 로드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미 알고 있기에. 굳이 찾아와서 축하한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오늘의 주인공이 카림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에.
어쩌면, 배려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오늘의 축제를 조용히 즐기도록 배려하기 위해서.
“어차피 이렇게 조용히 사색을 즐기는 것도 잠깐뿐이야. 너, 이따가 바빠질 거잖아.”
“그렇긴 하지.”
지금은 이렇게 태형과 여유를 즐기고 있지만.
그래도 일국의 군주라, 일정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여러 나라에서 방문해 온 사신단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연회도 베풀고 대접도 해줘야 한다. 그게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외교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찾아왔다.
“여기 있었군! 로드!”
“무슨 일이지?”
“쿠르파가 찾는다.”
“쳇.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카림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공식 일정을 소화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주군. 난 일이나 하러 가겠다.”
“그래. 수고해.”
이내 멀어진 카림. 그 뒷모습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많은 이들이 보인다. 그건 이전과 같다.
하지만 이전과 많은 차이가 있다면, 그건 색이다.
오크 특유의 초록으로만 물들어 있던 도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알록달록하다.
마족, 어인족, 페어리, 환수들, 드래곤,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까지.
다양한 종족들이 도시 속에 어우러져 있었으니, 그 색은 참으로 찬란히 빛나는 오색이었다.
그들 모두 태형이 아끼는 인연들이었다.
그 인연들이, 피땀 흘려 일군 대도시에 그림처럼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가슴이 온통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뿌듯해.’
그래. 뿌듯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태형은 문득 어깨를 간질이는 무언가를 꺼냈다. 꼬록이였다.
녀석은 아까부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후…….]이 앙큼한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일까?
[주인.]“응.”
[기분이 어떰?]“최고야.”
[후후후!]꼬록이가 활짝 웃었다.
‘꼬록이의 계획은 실로 성공적임!’
꼬록이의 최대 계획. 그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계획 ‘부강해지기 작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주인의 각 세력을 오가며, 그들에게 이로운 일을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구성 요소를 주입해 성장을 돕고, 환경을 조금씩 바꾸어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끔 몰래 도왔다. 마치 우렁각시처럼.
그 결과 오크들은 대제국을 형성했고, 마계는 놀랍도록 발전했다. 환수들은 더욱 강해졌고 요정계의 대자연은 더욱 아름답고 다채로워졌다. 멸망했던 용계는 문명의 꽃이 피어올랐으며, 탄타르의 바다 세계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꼬록이는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만족을 모르는 태고의 슬라임은 목표를 향해 앞으로도 계속 달려 나갈 것이다.
더욱 부강해져서 주인을 널리 이롭게 하자는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 것이다!
[후후후…….]그런 꼬록이의 음흉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형은 귀엽고 통통한 슬라임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때.
“여기에 있었군요!”
번쩍!
빛이 발하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 말론이었다.
“어우, 깜짝이야.”
“제가 놀라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하여튼, 이 녀석도 사람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정말 심장 멎는 줄 알았다.
“너, 대공하고 같이 있지 않았어?”
“그랬죠. 근데, 그 녀석은 재미가 없어서요. 알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베르칸이 죽은 후 5년, 그 시간 동안 말론에게 변화가 있었다면 그건 두 가지다.
첫째는, 녀석이 그간 공석이었던 천상의 천왕 후보에 올랐다는 것.
둘째는, 전대 마계 대공과 자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
남들이 보기에 천사와 악마가 같이 다니는 건 정말 이상한 장면이지만, 둘이 막역지우라는 걸 태형은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의 대축제에 녀석이 참석한 것도 대공과 함께 온 것이었다. 천사와 악마를 본 것도 놀라운데, 그 천사와 악마가 함께 어울려 다니는 걸 본 인간들의 표정은 더욱 놀라웠다.
그걸 카메라에 담았어야 했는데, 그게 아쉬울 따름이다.
“무슨 일이야?”
“태형 님, 아무래도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지구 인간들이 태형 님을 찾는데요?”
“아.”
“우주의 대혼란을 잠재우신 위대한 대군주! 당대 최고의 유명인! 그 이름도 유명한 차원 군주… 읍읍!”
“시끄러워. 듣기 싫어.”
태형은 말론의 입을 막았다. 마구 발버둥 치는 천사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피곤해.’
다 좋은데, 한가지 피곤한 점이 생겼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정체가 알려졌고 제법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인간 김태형의 신상 명세가 알려진 건 아니다. 다만, ‘차원 군주’가 지구인이고 한국인이며, 김태형이라는 이름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까진 알려졌다.
사실 그게 알려질 일은 없었다. 한 놈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루멘 교단의 성기사 랄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 독실한 인간.
그 녀석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한답시고 입을 떠벌리지만 않았으면, 영원히 뒤에서 흑막 행세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태형 님! 어서요! 이미 약조한 것이잖습니까?”
“아, 알았어. 간다고.”
태형은 안면 인식 저해 마법과 인지 왜곡 마법을 펼쳤다. 이것으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다.
요즘엔 이렇게 때때로 세상 밖에 나서야 할 때가 생겼다.
뭐, 하는 건 뻔하다. 인터뷰나, 방송 출연이나, 마물 소탕이나 그런 것들.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 보수가 꽤 짭짤하거든.
돈? 그것도 그거지만, 그것보단 부수적인 게 끌린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형 제작 장인이 만든 인형 세트를 준다는데, 그걸 스텔라가 무척 좋아한다.
그러니 별수 있나? 일하러 갔다 오는 수밖에.
이내 차원문을 열고 사라진 태형.
그 빈자리에 홀로 남은 꼬록이는, 땅에 착지한 채 홀로 음흉하게 웃었다.
[후후후. 역시 주인은 모름!]차원 군주라는 존재의 대략적인 정체를 알린 게 성기사 랄프라고 주인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그게 이 꼬록이 님의 짓이라는 걸 주인은 정말 까맣게 모르고 있다.
‘주인은 너무 출세욕이 없음!’
이렇게나 훌륭하고 대단하고 굉장한 주인의 활약을,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른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우리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세상 사람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꼬록이는 생각했다.
그래서다. 아주 조금, 정체를 흘렸을 뿐이었다.
이제 꼬록이의 ‘부강해지기 작전’ 다음 세부 목표를 시행할 차례다.
그건 바로, 주인 짝지어 주기!
‘우리 주인 성욕도 없는 것 같음! 대체 왜 그럼?’
카림도 곧 있으면 혼인을 할 것 같다. 이미 신부 후보가 물색 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손주를 보고 싶어하는 카리크가 힘을 쓴 덕에 부족 내에 카림의 신부 후보를 뽑는 행사가 크게 열렸고, 세 명 정도의 신부 후보가 최종적으로 선발된 상황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카림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까?
정작 카림과 묘한 분위기 띠었던 처자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셀레나였다.
예전에 카림이 구해 주었던 엘프. 엘프족을 다스리는 여왕의 셋째딸이자 키루나 숲의 순찰대장 셀레나.
그 엘프와 카림이 밀회를 즐기는 걸 꼬록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처음 그걸 봤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그때 주인에게 몰래 그 사실을 이야기하며 키득거렸던 건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셀레나는 주기적으로 대수림으로 찾아와 카림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아마 그러면서 친해진 모양.
만약 그 둘이 이어진다면 정말 엘프족과 오크족은 종족을 초월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놀라울 수가!
뭐, 꼬록이는 카림이 누구랑 결혼하든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누가 됐든 환영할 것이다. 주인이 소중하듯, 카림과 오크들 역시 꼬록이에게 소중하니까.
아무튼, 이젠 카림조차 제 짝을 찾았다.
근데, 카림의 주군인 주인이 짝이 없어서야 되겠나?
그것도 말이 안 된다!
꼬록이는 용납할 수 없었다!
‘평범한 인간은 현실적으로 수명 문제 때문에 힘듦. 그렇다면 맞는 짝을 찾아 줘야 함. 그게 고민임. 과연 누가 우리 주인의 짝이 될 수 있음?’
천사? 마족? 드래곤? 엘프? 오크? 아니면 그냥 인간?
인간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수명이야 늘려 주면 되는 것이니까.
아아.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꼬록이는 해내고 말 것이다.
꼬록이, 한다면 하는 슬라임이니까!
‘후후후.’
그렇게, 주인을 위하는 한 슬라임의 행복한 고민은 계속되고 있었다.
– 완결 –
[ 작가 후기 >작중 스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혹여라도 걸리시는 분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빈수박입니다.
437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태형의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이번 작품은 배운 것도 많고, 아쉬운 점도 많았으며, 만족스러웠던 점도 많았던 작품입니다. 비록 경력도 짧은 초보 작가지만, 그래도 ‘방구석 대군주’를 포함한 두 개의 유료작과 십수 개의 습작 중에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먼저, 그동안 굉장히 써보고 싶었던 소재인 ‘오크 소환수’로 완결까지 성공적으로, 휴재없이 끝마쳤다는 게 굉장히 기쁩니다.
조금은 모자란 겁쟁이 오크가 훌륭한 지배자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 그 오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며 언제나 옆에서 든든하게 힘이 되어주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과 소환수의 끈끈한 유대까지.
능력이 부족한 초보 작가인지라 전부는 아니지만,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독자님들께 조금이라도 보여드린 것 같아 참으로 기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습니다. 첫째는 태형과 아이들에게 정이 들어 제 캐릭터들을 떠나보내기 싫다는 감정이 들어 아쉬웠고, 둘째는 저의 능력 부족을 여실히 느꼈기 때문에 아쉬웠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를 돌아볼 때면 아쉬운 점이 눈에 밟힙니다. 이건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고, 저건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선 이런 방법으로 하고 저기선 저런 방법으로 하면 더 맛깔나게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들이 자꾸 떠오르곤 합니다.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태형과 소환수들이 성장했듯, 저 역시 성장했고 앞으로도 성장할 거라고 확신하니까요. 처음과 비교해 아쉬운 점도 조금은 줄었고, 앞으로 쓸 글들엔 아쉬운 점을 더 덜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나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만족스럽습니다.
앞서 말했듯, 전 기쁩니다. 쓰고 싶은 글을 썼기에 기쁘고, 배우고 깨달은 게 많아서 기쁘며, 제 글과 함께해 준 독자님들이 계셔서 기쁩니다. 아마 ‘방구석 대군주’는 제가 유료작이 더 많아지고 세월이 더 흐른다고 해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다시 한번 제 글을 봐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앞으로 더 좋은 글로 찾아뵙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별로 쉴 생각은 없어서 아마 차기작은 금방 시도해 볼 것 같습니다. 아마 판타지가 될 것 같아요.
누군가는 판타지 하면 기사도 혹은 검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마법이라 말한다면, 판타지에 대한 제 로망은 이종족입니다. 판타지 하면 이종족. 이종족 하면 판타지. 멋있지 않나요?
그래서 아마 차기작도 이종족이 많이 나오는 판타지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잘 될진 모르겠지만요.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한다면 또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믿습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제가 TMI기질이 좀 있는지라, 후기에 쓰고 싶은 게 많거든요. 제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독자님들에게도요. 아마 다 쓰면 한 편 분량을 아득히 넘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 좀 줄여야겠습니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습니다. 독자님들께서는 부디 건강하시고, 저는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