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powered Sword RAW novel - chapter 11
“옆에 앉아도 될까?”
“마음대로 해.”
레온의 허락을 받은 클로에가 그 옆에 걸터앉았다.
손바닥으로 한 뼘쯤일까.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감에 할 말 을 잃는다. 이렇게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당연
했던 일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괜히 입맛이 썼다.
그게 전부였다.
이전과 달리 레온을 지배하던 열등 감이나 질투심은 초라한 잔불만 남 겨놓고서 꺼진 지 오래였다. 그는 그 사실을 클로에 본인과 마주하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그녀가 싫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 다. 연정(織情)이 식었을 분, 오랫동 안 함께한 친구로서의 정은 그대로 였다.
이제서야 그는 클로에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레온은 좀 부드러워진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이면 너희 반은 아직 연금술 수업일 텐데, 혹시 땡땡이라도 쳤어?”
“ 뭐‘?”
그 말에 클로에의 두 눈이 휘둥그 레졌다.
아마도 레온이 한 말 때문만은 아 니겠지.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얼마 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리라. 그녀는 멍한 얼굴
로 침묵하다가, 곧 언제나와 같은 미 소로 맞받아쳤다.
“바보야? 한 번이라도 무단결석을 하면 장학금이 취소인데, 내가 네 얼 굴을 보자고 땡땡이를 치겠어?”
“그럼?”
“연금술 선생님이 아프시대서 오늘 휴강이야. 때마침 네가 퇴실했다고 해서 찾아와본 거지. 목발도 없이 돌 아다니는 걸 보니 다 나았나보네.”
레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사나홀쯤은 더 쉬려고. 진도는 미리 빼뒀으니까
성적에 별 문제도 없고.”
“흥, 내가 쉬라고 할 때는 귓등으로 도 안 듣더니.”
클로에는 이럴 줄 알았다면서 입술 을 비죽였다.
몇 년이나 그녀의 말을 무시해온 레온은 할 말이 없다보니 뒤통수만 긁었고,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얼음판 같았던 전과 달리 따뜻한 침묵이 었다.
레온은 그 분위기에 안주하면서 눈 을 깜박였다.
‘나,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 했구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저 포기할 수 없다는 아집만이 남아, 제 살을 깎으 면서 피를 흘렸다.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과 고통으로 이 세상을 원망하 려고 했다.
그 마음은 과연 클로에에 대한 사 랑이었을까?
아니면 리안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 투였을까?
스스로가 특별하지 않다는 열등감 에 사로잡혀, 자신을 계속 상처입히 는 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네가 날 불렀다, 레온.
그런데 그 비명소리에 대답해준 검 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말을 증명할 기회를 주마.
불합리한 운명에 맞설 기회를 준 검이 있었다.
성검 엘시드.
왼손등에 깃들어있는, 성격 나쁜 영 웅의 검. 그가 있었기에 레온은 몇 년째 멈춰있었던 걸음을 옮길 수 있 었다. 바닥없는 수렁으로부터 단숨에
구원받았다.
세상을 구원하는 게 용사라면, 그를 구원한 건 엘시드였다. 레온은 새삼 벅차오르는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 용사가 되어주겠어.’
입으로 말할 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는 다짐했다.
엘시드가 바라고 있는, 그 기대를 뛰어넘는 용사가 된다고. 성검의 주 인으로 부족하지 않은, 오히려 그 명 성을 드높이는 용사가 되어주겠다고 말이다.
레온의 두 눈동자가 순간 황금색으
로 빛났다.
근처에 앉은 클로에가 알 수 없을 정도의 찰나였지만, 진짜 태양처럼 밝게 타오르는 빛으로.
[뭐, 뭐야? 왜 갑자기 성장하는데?!]레온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엘시드조차 당황해서 그 이유를 알 아내려고 허둥거렸다.
태어날 때부터 완벽했던 그는 알 수 없었다
I HA 人人 I •
마음가짐을 제대로 다잡기만 해도, 인간은 한층 더 나아질 수 있는 존 재라는 것을. 안 그래도 강인했던 레 온의 의지력은 이제 초인에 가까워
졌다.
하지만 엘시드를 제외한 둘은 그 변화를 몰랐다.
클로에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소문이 엄청나 던데, 혹시 들었어?”
“의무실에서 방금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부터 내 주변이 자꾸 소란스럽던데, 그 탓이려나.”
“아마?”
레온은 그 설명을 독촉하듯이 짧게 턱짓했다.
하루이틀 알고 지냈던 사이도 아니 다. 그녀가 일부러 뜸을 들인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제 속셈을 들킨 클로에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좀 길다?”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레온의 미간 이 점점 찌푸려졌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초월했다.
지나가던 소드마스터가 제자로 받 았다는 것은 그렇다쳐도, 왕가의 비 밀병기로 몰래 키워졌다는 것은 어 처구니가 없었다. 비록 웃자고 한 이
야기라도 왕실모독 아닌가?
몇 가지의 소문은 그냥 우스꽝스러 웠고, 몇 가지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 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했으며, 몇 가 지는 소문을 낸 학생들의 지능을 의 심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진실에 근접한 것은 있 었지만 말이다.
‘뒷산에서 마검을 주워왔다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야, 마검 아니라고.]레온은 그 반발을 무시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수십 가지의 소문이 퍼졌음에도 불
구하고 성검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만큼 성검이라는 말이 가 지고 있는 힘과 무게가 막중하다는 뜻이리라.
성검에 선택받는 자, 세상을 구할 용사가 되리라.
여신교전(女神敎典)에 기록되어있는 문구다.
농담으로 할 말이 아니었기에, 아직 철이 덜 든 학생들조차 말을 삼갔다. 레온이 짊어져야할 짐은 그렇게나 무거웠다.
‘나라면 할 수 있어.’
엘시드가 그를 믿었다.
그 믿음이야말로 확신의 증거였다.
레온은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믿음에 부응하는 것 또한 용사의 덕목 중 하나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용사로서 한 걸음을 내 디뎠다.
그때 레온의 얼굴을 본 클로에가 미소지 었다.
“역시, 달라졌구나.”
“ 응?”
“예전보다 좋은 얼굴이 됐어. 초조 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먼 곳을 바라 본다는 느낌? 리안하고 비슷하면서
도 좀 달라. 위를 보는 사람과 앞을 보는 사람의 차이일려나.”
클로에는 조금 아깝네 하고 중얼거 리면서 일어섰다.
어느새 다음 수업시간이 가까워진 듯했다.
매년 장학금을 놓치지 않은 그녀에 게 있어, 무단결석은 한 번도 있어서 는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지 그를 돌아봤다.
“ 레온.”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회갈색과 푸른색.
조금도 닮지 않은 색깔이었다.
클로에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술만 달싹이더니, 이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리안과 이야 기해줄래? 너 말고는 그 학급에서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어보였거든.”
레온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 를 끄덕거렸다.
“뭐, 가능한 노력해볼게.”
“고마워. 그럼 다음에 봐.”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떠나간
다.
레온이 점점 멀어지는 클로에의 등 을 보면서 말했다. 그가 끝까지 내뱉 지 않고 삼켜버린 말이었다.
“•••불가능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 는 법이지.”
그녀에게는 미안해도 그 부탁은 이 루어질 수 없었다.
다음 승부를 마지막으로 그는 리안 을, 이 아카데미를 떠날 생각이었으 니까.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리안도 친구 한두 명쯤은 생겼겠지.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
으켰다.
재활운동을 할 생각으로 나온 참이 다.
하루라도 빨리 리안과 겨룰 수 있 도록, 왼허벅지의 상태를 만전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리안!’
열등감이 사라진 눈에 호승심이 불 타오른다.
건전한 의지로 발을 내디디며. 레온 은 얼마 안 남은 결전의 때를 생각 하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름과 생일도 모자라서 운명까지 교차해버린 둘.
그들의 첫 대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우직!
허공을 가른 목검이 갑작스럽게 뚝 부러졌다.
급가속에 의한 부담을 이겨내지 못 한 것이다.
그러나 레온과 엘시드는 그 결과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고 시험 해본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목검으로는 완전한 상태에서도 한
번을 못 버티나? 기술의 숙련도를 떠나서 검에 부담이 큰 기술이구만. 가검은 대체로 진검보다 약한 편이 니까 조심해야겠다.]
“한 번만 제대로 성공해도 층분해.”
뻣뻣해진 손목을 주무르던 레온이 그렇게 단언했다.
비장의 패는 한 번 보여주고 끝내 는 법.
하물며 리안 같은 천재에게 똑같은 기술을 여러 번 썼다간 반격기를 맞 을 게 뻔하다. 이번만큼은 순수한 기 량을 넘어, 그 심리까지 읽어내야만 승리할 수 있을 터였다.
며칠 전에 본 리안의 상태창은 그 토록 무시무시했다.
이름: 리안
칭호&직업: “재능과 혈통밖에 없는” 검사
레벨: 25
근력 140(D) / 체력 122(D) / 민첩
141(D) / 오러 253(C)
보유스킬
〈소드 마스터리(하) Lv.MAX〉
〈소드 마스터리(중) Lv.5>
〈비전검술어???) Lv.4>
〈순신법(麻身法) Lv.2>
〈오러사용자(중급) Lv.1>
〈선천성 무골(2단계)〉
레온은 거기 적혀있는 내용의 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엘시드의 설 명에 곧 기겁해야만 했다.
〈소드 마스터리(중)〉은 오러의 운용 을 전제로 한 검술이며.〈순신법〉은 특수한 체술로 ‘액셀’과 비슷한 가속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선천성 무골〉에 이르러서는 말할 것도 없었 다. 엘시드가 직접 뜯어고친 레온의 몸과 다르게 날 때부터 그냥 무골이
었다는 뜻이니까.
그 정도로도 충분히 대단했건만, 〈오러사용자(중급)〉은 더 말이 안 되 는 수준이었다.
“검기(Sword Aura)를 쓸 수 있는 경지라고?!”
[어, 1레벨이니까 안개처럼 좀 홀러 나오고 말겠지만. 몸의 바깥으로 오 러를 형상화할 수 있는 단계다.]“이미 웬만한 교관보다 더 세잖아!”
실제로도 레온이 한 말대로였다.
헬무트 교관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 면, 아카데미의 교관들은 대부분 선 임기사 수준이었다. 비전검술이나 순
신법 같은 것을 감안하자면, 1대1로 는 리안에게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재능 있는 기사들도 30대에나 겨우 도달하는 경지를,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녀석이 넘어섰다.
왜 아카데미에 들어왔는지 모를 정 도의 강함이다.
레온과 싸울 때는 오러를 봉할 테 니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기본 능력 치와〈순신법〉만 해도 까마득한 벽 이었다.
“힘과 속도에서는 밀리지만 체력만 은 약간 위…. 그리고 그〈순신법〉이 라는 거, 오러가 필요없는 체술이라
도 ‘액셀’처럼 몸에 부담이 좀 되겠 지?”
[당연하지. 그런 계열의 기술들은 혈류나 근신경계에 간섭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약점이 체력 소모다. 몸은 발라져도 호흡은 그대 로니까 금방 지치게 되지.]“오.”
참고할 만한 조언이었다. 레온은 엘 시드가 한 말을 토대로 대(對)리안전 의 전술을 구축해나갔다.
틀림없는 난적이지만 못 이길 상대 는 아니다.
오러를 쓰던 엘몬트보다 좀 더 강
한 정도일까. 물론 리안이 오러까지 쓴다면 승부 자체가 성립하지 않겠 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온은 잠시 침묵 하다가,
“엘시드? 만약의, 아주 만약의 이야 기인데….”
공포가 아닌, 순수한 의문으로 그 질문을 입에 담았다.
“내가 리안에게 진다면 그 다음부 터는 어쩔 셈이야?”
[흠.]엘시드는 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레온이 지금 언급한 만약이란, 그가 리안에게 패배해서 그 가신이 될 경 우를 말했다. 세상을 구원해야할 임 무를 짊어진 용사가 누군가의 부하 가 될 수 있는가?
성검 엘시드가 아니면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할 문제였다.
하지만 그가 돌려준 대답은 레온의 예상 밖이었다.
[대답해주지 않겠다.]“ 어째서‘?”
엘시드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가 없 는 태도로 말했다.
[이건 내 나름의 시험이다. 처음부 터 말했지? 기회보다 큰 시련을 감 당해야할 거라고.]“첫 시험부터 너무 난이도가 높은 데.”
[이번 대결은 네 운명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레온, 네가 리안을 이 긴다면 그 후에 남김없이 설명해주 마. 아마도 듣고 난 다음에는 너 역 시 납득할 거다.]레온도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 다.
엘시드가 그를 놀리거나 괴롭힌 적 은 있어도, 진지하게 한 말이 거짓된
적은 없었다. 미리 알아서는 안 될 이유가, 혹은 알게 된다면 마음가짐 이 흔들릴 만한 이야기라는 뜻이겠 지.
그래서 그는 더 묻지 않고 새 목검 을 들어올렸다.
아직 리안을 상대하려면 불완전한 부분이 많았다.
우직!
그 둔탁한 파열음은 한밤중까지 끊 임없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