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powered Sword RAW novel - chapter 133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한 모험가와 용병.
광황제에게 숙청당하고 간신히 살 아남은 귀족들과 기사들, 뿔뿔이 흩 어졌던 그들도 리안 하나만을 보고 서 모여들었다.
‘패잔병도 긁어모으면 의외로 수가 되는군.’
의자 등받이에 한껏 몸을 기대면 서, 리안은 그가 끌어모은 전력의
규모를 계산해보았다.
머릿수로만 따지자면 아직 천인대 (T-人隊)에도 부족하지만, 능력과 재 능만을 보고 봅아서 그 수준만큼은 확실했다. 수도 방위군의 2할 정도 라면 감당할 수 있으리라.
그래봤자 기사단이나 마법사단이 몇 부대 출동하면 잠시도 못 버티고 박살나겠지만.
‘부족해.’
처음부터 전면전은 상정하지도 않 았다.
북부 최강의 대제국이 몇 세기에 걸쳐서 마련해놓은 전력을 한낱 유
격대로 상대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10배, 20배 전력을 지녔더 라도 승산이 없다.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 같은 비대 칭 전력을 다수 갖춘다면 또 모를 까, 대륙의 3할 가까이 점거하고 있 는 제국과 힘을 비교하려는 것 자체 가 어리석었다.
‘황제가 왜 지금처럼 행동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제왕학을 배운 리안으로서 현 황제 의 통치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변방 귀족들을 대놓고 천시하는 것 도 그렇고.
반란군이 될 게 뻔한 폭도들을 내 버려두는 것도 그렇고.
황제가 그저 어리석을 분이라면 그 또한 호재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전 혀 없었다. 선황제의 사생아로 태어 나서 외딴 궁 한복판에 버려져, 아 무것도 없는 몸으로 제위까지 찬탈 하는 데 성공한 자가 그토록 어리석 을 리가.
“후우.”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 어서, 리안은 긴 한숨과 함께 따끔
거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아카데미를 나설 무렵부터 항상 그 랬다.
몸도 마음도 단 한순간의 휴식을 만끽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 르겠다.
스스로가 용사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때부터.
‘•••용사라.’
두 눈을 내리감으면 아직도 생생하 게 떠올릴 수 있었다.
성녀 엘라한.
은발금안의 소녀가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당신은 클라이드 제국의 황제와 용사, 두 입장 중 하나만 선택하라 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리안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클라이드가 이 세상을 위협하는 악의 근원이라면?
—제국민과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일체 차등을 두지 않으실 수 있으십 니까?
—황위를 되찾는 것보다도 우선해
야할 일이 많다면?
어떠한 질문에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성녀를 볼 면목이 없어져서 두 눈만 질끈 내리감고 말았다.
하지만 엘라한은 그의 태도에 실망 하지 않았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실망마저 도 없었던 것이리라.
—폭군에게서 잃어버린 황위를 되 찾는 것도, 그 후에 제국의 태평성 대를 이룩하는 것도 분명히 선한 일 이겠지요.
그러나, 하고 등돌린 엘라한의 말 이 여전히 또렷했다.
—그건 용사가 할 일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용사로서 기대받아온 리안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몇 년을 애타게 기다려왔던 성인식 의 날, 성검은 그의 손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찾아오지 않은 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꺾고 떠나가버린 사람의 손아귀를 찾았다.
‘레온 형.’
잊어버릴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은둔 외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
던 아카데미에서의 생활, 리안은 그 곳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레온과 클로에.
황족으로 살 때는 만나볼 수 없었 던 동년배들.
—리안 너도 철자를 ‘LEON’이라고 써? 레온이랑 똑같네!
사심없는 미소를 띤 채로 다가와주 는 소녀도.
—이번에는, 절대로 안 진다…!
몇백 번을 꺾이면서도 포기하지 않 는 소년도.
한 사람은 연인이자 가신으로서 곁
에 남았지만, 한 사람은 쓰디쓴 첫 패배를 안겨주고 멀리 떠나버렸다.
처음이었다.
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는 지. 무의 재능은 물론이고, 기억도 안 나는 시절부터 매 끼 챙겨먹어온 영약만 해도 그러했다. 그를 가르친 자들은 하나같이 이름 높은 명사였 으며, 제 몸에 닿았던 물건들 중에 싸구려라고는 한 종류도 없었다.
영약은커녕 제대로 된 가르침도 하 나 없이, 무식하게 몸을 혹사시켜온 레온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내가 이겼다, 리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것은 그였 다.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나서, 가진 것 없는 자에게 패배했다.
—지금은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으 니까, 필요한 게 생각나면 그때 가 서 말하지 뭐. 그래도 상관없지?
질 리가 없는 싸움에서 패배해 그 자리에 굳어버린 자신을 내버려둔 채, 레온은 홀가분하게 등을 돌렸다.
3년을 거듭해온 승부의 첫 승리임 에도 별 감흥도 없이.
만회할 기회조차 남겨두지 않고 아 카데미를 떠나버렸다.
그걸 알았을 때, 리안은 후회했다.
‘그날밤의 승부가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내가 순순히 패배를 받 아들일 수 있었더라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같은 소리는 안 했으리라.
스스로의 승리를 당연시했기 때문 에 시야가 좁아져, 마음을 터놓고서 이야기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승리자 에 대한 찬사와 존중도, 설욕전을 약속하는 말도 한 마디 건네지 못했 다.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레온으로서는 한 점의 미련도 없 이, 리안으로서는 가슴속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남겨둔 채로.
바로 그때였다.
둔탁한 노크소리에 리안의 두 눈이 깜빡였다.
“•••누구지? 회의시간은 아직 멀었 다.”
깊은 상념을 방해받았기 때문일까.
리안의 목소리가 절로 불퉁해졌다.
그 질문에 답하듯이 문이 열리고, 두 잔의 커피를 올려놓은 트레이와 함께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섰다.
금발벽안.
리안과 깔맞춤을 한 듯한 색상의 아름다운 소녀, 클로에가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물러갈까요, 전하?”
장난스러운 말투에 픽 웃은 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들어와.”
그나마 클로에와 단둘이 있을 때만 은 좀 편안해진다.
아카데미 시절이 떠올라서일까?
그 무렵이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평온했던 시기였다. 황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때보다 더.
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오늘은 좀 쓰네.”
그리고는 평소와 같은 커피맛을 핑 계로 쓰게 웃었다.
* * *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제법 길어졌다.
리안이〈벌처스〉를 조직하고 난 후 로, 단둘이 시간을 보낼 여유가 사 라졌기 때문이었다.
인재를 포섭하거나, 대륙 정세를 알아보거나.
스스로의 무예도 수련해야했고, 조 직원의 기분이나 상태도 꾸준히 살 펴봐야했다. 몸이 열 개였어도 부족 한 일을 혼자서 떠맡다보니 연인과 느긋하게 보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짬짬이 틈을 내야 지만 사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정도 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는 들
었어?”
클로에가 두 손을 가볍게 맞부딪히 면서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데?”
다 비운 잔을 내려놓으며, 리안이 제 목을 기울였다.
커피의 효과가 벌써부터 들기 시작 했는지, 흐리멍덩했던 두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두 어깨를 으쓱였다.
“레온 말이야, 레온! 어제 막 들어 온 소식인데, 유겐트에서 원정대의 1등 공신으로 뽑힌 모험가의 이름이
레온이더라고. 생김새도 그렇고, 연 령도 그렇고. 아무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레온이 맞는 것 같아.”
“레온 형이 유겐트에…?”
“응. 게다가 이번 활약으로 A랭크 가 된 모양이더라. 어쩌면 제국으로 올 수도 있으니까, 우리랑 마주칠지 도?”
리안은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기대 감을 품었다.
클로에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레 온은 이제 황족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용사(Brave).
신성교단을 상징하는 무력집단, 성 철쇄기사단과 성녀를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 리안이 괜히 용 사로서 광황제를 타도하려던 게 아 니다. 만약 용사만 될 수 있었더라 면, 부족한 힘은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으니 용사가 될 수 없었겠지.’
굳게 다물었던 입가에 쓴웃음이 배 어나온다.
성녀가 한 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 고 미련을 못 버리다니, 리안은 제 꼴이 우스워서 남몰래 키득거렸다.
그래도 다 내려놓지는 못한 채, 기 대하고 말았다.
한 번 끊어져버린 인연을 되돌이킬 기회를.
‘지금의 레온 형이라면 또 괜찮지 않을까?’
‘황자’라는 신분을 드러내고도 대등 하게 접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성 립하지 않을까? 하고.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클로에.”
그래서 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레온 형이 용사라고 한다면 어떨 것 같아?”
“뭐? 레온이?”
“그래.”
클로에는 그 뜬금없는 소리에 잠시 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곰곰이 생각 해보고 대답했다.
리안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 이었다.
“안 어울리긴 하는데… 다시 생각 해보면 어울리는 느낌?”
“뭐야, 그게.”
아리송한 대답에 그가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레온은 뭔가 화려하다는 느낌은 없으니까. 그런데 몇 번을 넘어지고 굴러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가 불가 능하다고 말하는 일을 결국 성공시 키는 사람이잖아?”
“옛날부터 자주 생각했던 일이야. 정말로 특별했던 건, 내가 아니라 레온이라고.”
옛 추억을 회상하는 클로에의 눈이 아련해졌다.
가까운 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
만,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소꿉친구의 힘이 떠올랐다.
알게 모르게 경원시했던 레온의 성 실함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레온은 항 상 산에 올라가서 양손이 다 터질 때까지 검을 휘둘렀는걸.”
“그랬었지.”
“그분만이 아니야. 구토해도 나올 게 없어서 헛구역질을 할 때까지 달 렸고, 매일 찢어지고 으깨진 손바닥 에는 손금이 한 줄도 남아있지 않 아. 난… 레온 말고는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몰라.”
리안은 반사적으로 제 손바닥을 내 려다보았다.
검 자루의 형상으로 일그러져있는 굳은살, 그럼에도 손금은 몇 군데만 뭉개졌을 뿐이고 쉽게 알아볼 수 있 었다.
수만, 수십만 번을 휘둘렀는데 이 정도였다.
그렇다면 레온은 대체 몇 번이나 휘둘렀을까.
오싹.
그 수를 어림해본 리안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적어도 300만 번 이상.
기본기의 반복훈련에 의미는 없다. 그러나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을 그 렇게까지 거듭할 수 있는 자가 존재 한다는 현실에, 리안은 약한 전율마 저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인정했다.
불굴의 정신력이 곧 용사의 자질이 라면, 레온보다 더 나은 인간은 이 대륙 어디에도 없으리라고.
“과연.”
리안은 그 말에 납득하고서 커피잔 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클로에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레온한테 마지막으로 진 게 그렇 게 분했어?”
“응?”
“갑자기 레온이 용사였으면, 이라 니. 처음에는 농담인 줄만 알았는데, 표정은 진지해보였거든.”
“뭐, 진지했으니까.”
클로에의 벙찐 얼굴을 본 리안이 실소하면서 말했다.
“레온 형이 용사라면 내가 황제가 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
이니까.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서로 터놓고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 드 ”
“정말로 그게 다야?”
“…한 번 갚아주고 싶기는 하지.”
“아하하하!”
속마음을 들킨 리안이 눈을 돌려버 리자, 클로에는 그 드문 감정표현에 눈물나게 웃었다.
그리고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면서 말했다.
“아하, 하, 의외로 둘이 닭았다니 까.”
“ 누가?”
넘어가기 힘든 말에 리안이 되묻 자,
“레온이랑 너밖에 더 있겠어? 지기 싫어하는 점도 그렇고, 본심을 꼭꼭 숨겨놓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다음 에 누가 이기든지 또 싸우겠다고 할 것 같아서 불안한걸?”
“내가 그렇게 어린애로 보여?”
“ O ”
’O”.
“후우, 한 살 많다고 유세 부리기 느 ”
그 직후, 클로에의 호수 같았던 눈
이 빙하처럼 얼어붙었다.
“•••나이 들먹이지 말랬지.”
“미안.”
“다음에는 안 넘어갈 거야.”
진지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둘은 그동안 미루고 미룬 이야기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똑똑.
마침내〈벌처스〉의 회의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와, 길버트가 방문을 두 드리러올 때까지.
두 번 짧게 노크한 길버트가 나직 하게 말했다.
“전하, 회의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리안이 웃음기를 지웠다.
충성심을 확신하지 못한 부하들 앞 에서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누 구도 기어오를 수 없도록, 카리스마 를 확실히 내보일 필요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