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powered Sword RAW novel - chapter 150
이윽고 눈꺼풀을 감은 하카펠의 숨 소리는 점점 가라앉아서,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엘시드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늙어버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모습이 그대 로 남아있는 얼굴을, 몇 번이나 거듭 해서 내려다보았다.
[•••바보가.]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씁쓸한 목소 리가 한낮의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흐트러졌다.
하카펠이 잠든 후, 레온과 바르그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동굴을 빠져 나왔다. 그들이 바위산의 정상, 그 중심에 세워진 막사로 돌아왔을 무 렵에는 이미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진 하늘.
서쪽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가라앉는
다.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 질 수밖에 없듯이, 떠오른 해 역시 언젠가 가라 앉을 수밖에 없다.
당연하기까지 한 사실이, 오늘따라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자네, 맞나?”
저녁놀을 바라보던 레온의 등 뒤에 서, 바르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의 본능은 이제 얌전했지만, 혹시 모 르는 일이었다.
레온은 그 반응을 보고 어색하게 미소지 었다.
“네, 접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이겠지.”
바르그는 순순히 인정하고는, 뒤이 어 흥분 반 경외 반으로 두 눈을 화 등잔처럼 부릅떴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네만, 방금 전까지 자네의 몸을 움직였던 사람은…혹시 ‘그분’이신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레온이 ‘그’를 홍내냈다고 한다면, 그쪽이 수십 배나 더 가능성 이 있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바르그의 감은 확신하고 있 었다.
그저 의식이 잠시 머물렀을 분인데, 절대적인 힘의 우열을 깨닫게 한 존 재가 ‘그’ 외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펜리르족의 몸속에서 흐르는 피와 〈천랑〉이 그렇게 주장했다.
“생각하신 게 맞을 겁니다.”
레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헛소리 를 긍정했다.
“성검의 힘으로 잠시 제 입을 빌렸 을 뿐입니다만, 틀림없는 성왕 로드 릭 입니다.”
“……그렇군.”
바르그가 한손으로 제 이마를 더듬 거리며 말했다.
“‘직전제자’라, 그 말의 참뜻을 이제 서야 알겠네.”
비록 레온을 종주라고 인정하기는 했으나, 그가 직전제자를 자칭했던 것은 납득하지 못했던 바르그였다.
300년도 더 전에 끊어진 무맥에서 어찌 직전제자가 나타날 수 있단 말 인가? 신뢰하고 말고를 떠나서 합리 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성왕 로드릭의 존재를 한 번 마주한 순간, 바르그는 직감적으 로 깨닫고 말았다.
직전제자(直傳弟 T).
레온은 문자 그대로 로드릭에게 직 접 배웠다는 뜻이라고!
“다시 한 번 사죄하지. 자네의 말을 신뢰하지 못한 것, 감히 종주에게 반 기를 든 것. 어느 쪽이든 변명의 여 지가 없네.”
그리고, 하고 뒷말을 이어붙인 바르 그가 말했다.
“고맙네. 조부님이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잠드시는 건, 내가 기억하기 로 무려 5년도 더 되었다네.”
“제가 받아야할 인사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바르그가 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분을 여기까지 모셔와준 것도, 순수한 호의로 내 앞까지 찾아왔던 것도 자네일세. 자격은 충분하고도 넘치지. 펜리르의 혈통에 걸고, 이 은혜는 반드시 몇 배로 돌려주겠네.”
수인족에게 있어서 제 핏줄이 걸린 맹세는 절대적이다.
심지어 그 지위가 족장이라면, 목숨 을 버려서라도 스스로가 한 말에 책 임져야할 정도였다. 수인족의 관습을 잘 모르는 레온은 상투적인 감사표 현으로 생각했지만 말이다.
이내 바르그는 한껏 수그렸던 고개 를 들어올리고, 목구멍에 걸려서 잘 나오지 않는 말을 토해냈다.
“으으음, 몰염치한 소리라는 것은 잘 아네만….”
한 번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 야기 였다.
“치료법은, 있는가?”
레온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내리 감았다. 그건 바르그보다 그가 먼저 엘시드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수왕 하카펠.
망가져버린 그의 정신을 되돌리는
게 가능한가?
그 대답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파천황(破天荒)의 대명사나 마찬가 지인 엘시드가, 나직하게 잠긴 목소 리로 희망을 부정했다.
하늘을 베어가르고 땅을 찢어발긴 다.
드래곤을 굴복시키고 마왕을 토막 쳐죽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역경과 난관 모두를 가분하게 때려부순 남자가, 하카펠은 이제 가망이 없다고 대답 했다.
[놈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방법은 모두 세 가지다.]
‘세 가지나 있어?’
[그래, 셋 중 무엇도 현실적이지 않 다는 것이 문제지만』
엘시드는 무미건조한 태도로 설명 했다.
[첫 번째 방법은 내가 직접 멍멍이 의 혼을 건드려서 망가진 부분을 절 제하고, 극미세단위에서 복원작업을 실행하는 거다. 나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
현 시대의 최강자, 카심이라고 해도 흉내낼 수 없는 곡예다. 마스터를 넘
어서 그랜드마스터, 그 다음의 다음 경지에 발을 들여놓아야 겨우 성공 할까 말까한 짓거리였다.
평범한 치매였다면 이 정도로 고생 하진 않는다.
그게 아니었기에, 엘시드조차 하카 펠의 치료를 포기하라며 넌지시 충 고하고 있는 것이다.
[놈이 망아(忘我)에 빠진 건, 순리를 거슬렀기 때문이다.]천명마저도 꿰뚫어볼 수 있는 엘시 드였기에 즉각 이해했다.
하카펠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그럼에도 살아숨쉬고 있기에. 몸과
정신이 어긋나서 자아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육체를 빠져나가려는 혼 백을 붙잡느라 심신이 전부 흐트러 진 셈이었다.
안 그래도 엘시드는 직접적으로 힘 을 쓸 수 없지만, 무리를 해서 치료 해봤자 곧 다시 망가질 분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그냥 죽음을 받아 들이는 거다. 이제 혼을 억지로 잡아 놓지 않으면 며칠 못 버티겠지만, 그 며칠 동안은 제정신일테니. 회광반조 (回光返照)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건….’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
자아를 잃어버린 하카펠에게 그들 의 말이 닿을 리도 없고, 바르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손자에게 할아버지 가 죽도록 그를 설득해달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도저히 고를 수 있는 방법이 아니 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다만, 이거야말 로 불가능한 소리다』
‘뭔데?’
[필멸자는 그 자신의 틀을 넘어서 는 경지를 이룩할수록 제 수명의 한 계치를 늘릴 수 있지. 멍멍이의 문제
는 수명이 다한 것뿐이니까. 그걸 늘 릴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잠깐만, 그 말은 설마?!’
[네 생각대로다.]엘시드가 한 치의 기대도 없이 중 얼거렸다.
[무인으로서 이 다음 경지에 진입 한다면 그 즉시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겠지.]레온이 그 말을 그대로 전달하자, 바르그의 시선이 땅에 뚝 떨어지면 서 깊은 좌절감을 품었다.
“•••불가능하다, 는 뜻이군.”
무(武)와 문(文)을 막론하고 이 세상 에 만연한 이치였다.
일정 수준을 벗어나면 그 다음 경 지로 진입하는데 어려움이 더해지고, 초심자보다 숙련자의 실력이 더 나 아지기 어려우며, 마스터의 벽을 마 주한 사람은 일평생을 갈고닦아도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부 지기 수였다.
그런데 하카펠은 그 마스터조차 넘 어서, 그랜드마스터를 몇 걸음 남겨 두고 있었던 초인이었다.
수백 년, 천 년을 수행해도 닿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경지를 저 상태
로 개척한다? 소꿉놀이를 하던 어린 애가 오러마스터로 거듭나는 쪽이 더 그럴 듯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이겨낼 수 있는 병이었다면, 조부님께서 이겨내 지 못할 리 없었을테니….”
바르그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레온 을 바라보았다.
“고맙네, 종주. 성왕께도 예를 전해 주시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위산 아래로 내려가면 하티가 기다리고 있을 걸세. 함께 숙소로 돌 아가서 푹 쉬게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의 이야기는 끝났다.
레온은 한층 더 피로해보이는 바르 그를 막사에 남겨둔 채, 바위산의 가 장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그 끄트머리에 앉아서 지 평선을 바라보았다.
서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점점 작아졌다.
작별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노을빛 이 어른거리고, 희미하던 별빛이 선 명해지기 시작한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의 끝. 그걸 가만히, 아무 말 없 이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드도 그랬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앉아있었 다.
* * *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대초원에서 얼마 안 되는 연례행사 중 하나, 부족장 회합이 시작되는 날 이 밝았다.
수인족을 대표하는 12부족의 장이 총집결하는 날.
이 회합에서 결정된 사안만큼은 각
부족의 족장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 다. 주화파라도 전쟁이 결정되면 꼭 참전해야하고, 주전파라도 화평이 결 정되면 창칼을 즉시 내려놓아야한다.
두둥! 두둥!
이름 모를 마수의 가죽으로 만들어 진 북이 울렸다.
12부족의 한 행렬이 들어올 때마다 끊임없이, 듣는 자들의 기분을 고양 시키는 북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그 규칙적인 리듬은 일체감과 소속 감을 느끼게 한다.
얼굴도 잘 모르는 이웃들과 어깨동 무를 하고, 처음 들어본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게 만드는 수단. 원시적인 음악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 었다.
“저게 타우르스족인가? 3미터는 가 볍게 넘어보이네.”
특등석에서 행렬을 구경하던 카렌 이 말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보 니 과연, 근육질 상반신에 소 머리를 지닌 수인들이 입구로 한창 들어서 는 중이었다.
3미터가 넘는 신장에 잔뜩 부풀어 오른 근육만 살펴봐도 그 육체능력 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타우르스족.
성체라면 맨손으로 트롤도 잡을 수 있는 강자들이었다.
“용사님.”
카렌과 다른 방향을 바라보던 엘라 한이 그의 옷깃을 가볍게 잡아당겼 다.
바스테 트족이 었다.
고양이처럼 살랑거리는 꼬리와 쫑 긋하게 솟은 귀, 유연하게 휘어진 몸 은 날렵하게도 보인다. 카렌에게 일 방적으로 작살난 부족이었지만, 그건 상대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지 그 들의 실력이 허접했던 것은 아니었 다.
“•••부족장이 없네?”
“네, 그리고 저희들이 연행해왔던 사람도 안 보이네요.”
“체면 때문에 회합에서 빠질 정도 로 사리분별을 못할 리는 없을 텐데, 어째서 지?”
“글쎄요.”
바스테트족의 장. 펠리스의 부재에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분이었다. 레온 일행이 눈여겨봐야할 부족은 그 외 에도 많았고, 12부족 행렬에는 펠리 스보다 인상적인 자들도 제법 있었 다.
티그리스족의 장, 우라칸.
하티나 스콜보다 더 강렬한 기세를 붐어내는 놈은 자연스레 주변 사람 들을 찍어눌렀다.
‘무예의 달인으로 보이지는 않아. 그런데 익스퍼트급보다 더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인간보다 짐승에 더 근접한 강함이 었다.
타고난 힘과 야성을 자연스럽게 휘 두르는, 포식자로 태어난 맹수의 강 함. 한 번도 상대해보지 못한 유형이 기에 레온은 알 수 없는 흥미를 느 꼈다.
인위적으로 가다듬은 동작은 효율
적이지만, 본능에 충실한 짐승들은 그 이상으로 효율적인 동작을 보여 줄 때도 있었다.
“와! 여우들은 엄청 이브네. 매혹술 을 잘 쓴다던데. 이유는 안 물어봐도 되겠어.”
“크흠.”
여우수인, 르나르족을 본 카렌이 감 탄성을 냈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본 레온은 민망 한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왜냐하면 르나르족은 그 구성원 대다수가 여 성이었고, 굉장히 선정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늘고 나긋나긋한 팔다리는 물론, 나른하게 휘어있는 눈은 한 번 마주 본 사람을 녹여버릴 것처럼 흐물거 렸다.
아주 먼 옛날,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르나르족이 나라를 몇 개 무너트렸 다는 설화가 진실성을 띨 정도였다.
‘족장으로 보이는 르나르의 꼬리는 일곱 개. 다른 사람들은 많아봐야 다 섯 개인데, 꼬리의 숫자에 뭔가 의미 가 있나?’
두 사람 몰래 곁눈질로 르나르족을 본 레온이 그 차이점을 깨닫고 궁금 해했다.
엘시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르나르족의 꼬리는 그 몸에 갖춰 져있는 주력(脫刀)과 삶을 증명하는 신체기관이다.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강하고 노회한 르나르라고 할 수 있 지.]‘최대 몇 개까지 늘어나는데?’
[9개던가? 내 앞에서 재롱부리다가 먼지나게 맞은 놈이 그 정도였는데, 어지간한 마스터급보다 더 세더라.]생각보다 더 강하다.
물론 엘시드의 생전에 비하자면 전 체적으로 열화된 느낌이 있었지만, 레온은 알게 모르게 과소평가했던
수인족의 전력을 몇 단계 상향조정 할 수밖에 없었다.
7위계 원시마법을 터득한 나가족의 족장 또한 그랬다.
대사막의 전력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떻게든 이 회합에서 전쟁을 막아 내야한다.’
안 그러면 대사막의 모래가 핏빛으 로 물들 것이다.
레온이 새삼스럽게 결의를 다지는 데, 어느샌가 모든 행렬이 마을 안쪽 으로 들어서면서 족장들이 걸어나왔 다.
공터 한복판에 설치해놓은 초대형 원탁.
그 주위로 넓게 설치되어있는 관객 석은 부족민들로 하여금 회합을 지 켜보고, 의사결정에 부정한 개입이 없음을 명확하게 증명하기 위함이었 다.
상석에는 당연히 수왕, 바르그가 앉 아있었다.
“앉으시오.”
회합장에 들어선 10명의 부족장들 을 향하여, 바르그는 인사 한 마디도 없이 착석을 권고했다.
시끌벅적하던 관객들이 일제히 침
묵한다.
허공을 지나가던 바람조차 멈줘세
우는 목소리.
수왕으로서의 권위를 증명하듯이, 바르그에게서 뿜어져나온 압력이 10 명의 족장들을 내리눌렀다. 이런 식 으로 압박당하는 것은 처음인지, 부 족장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러시오? 앉지들 않고.”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기 힘든 압력의 중심지에서, 그걸 만들어낸 남자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수왕 바르그.
세 번째로 대초원의 정점에 올라선 남자. 삼대(三代)가 모두 혈연으로 묶여있다보니 세습을 의심하기 쉽지 만. 인간과 달리 수인들은 혈통에 따 른 세습을 당연시하지 않았다.
씨족의 일원으로 대우하는 것과는 또 별개로, 부족 내에서 어떠한 직위
를 얻어내려면 직접 쟁탈하는 수밖 에 없었다.
대초원에서 누구보다 지고한 자. 수 왕.
하카펠로부터 떨어져나온 직위 또 한 마찬가지였다.
“긋!”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버린 타우르스의 족장, 불스가 분하다는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언제나 그의 기대에 보답했던 근육 들이 무색하게도. 본능은 절대적인 격차를 마주하고 얼어붙었다. 허리춤 에 걸린 도끼를 움켜쥐더라도 별 차
이는 없으리라.
바르그의 무력은 이미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50년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구나, 괴물 같은 놈…!’
기세만으로 마음이 꺾여버린 불스 가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