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powered Sword RAW novel - chapter 89
옛 고사에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이름난 연주자가 그의 친우를 두고 한 말인데, 진정 자신의 소리를 알아 주는 사람은 오직 그 친구밖에 없다 고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그리고 카심에게 있어서 그 지음은
바로 레온이었다.
“여신께서도 참으로 무심하셨지. 왜 우리 종족의 선도자로 그 망종을 선 택하셨을까! 이보게, 사제. 내 가슴 팍에 있는 ‘X’자 흉터가 왜 생겨났는 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는데요.”
“허어! 내가 매일같이 떠들고 다녔 는데도 기록하지 않다니, 역사는 승 자만의 기록이라더니 과연 그 말대 로구나!”
다시 한 번 레온을 집어던진 카심 이 크게 한탄했다.
“30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최초의 타이탄, 그가 여신에게 자비 를 구걸하여 동족들에게 지혜의 축 복을 내려받았을 쯤이었다.
여신은 그에게 ‘카심’이라는 이름과 함께 신탁을 전달했다.
—카심, 내 대리자가 이끄는대로 그 사명을 행하세요.
고작 한 문장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카심은 그 신탁을 혼에 새기겠다며 다짐하고서 여신의 대리자를 기다렸 다.
자비로운 여신의 말대로 ‘그’는 곧 타이탄족을 찾아왔다.
태양처럼 밝고 화사한 머리카락과
두 눈동자.
내가 용사요, 하고 선전하는 듯한 풍모의 청년이었다.
로드릭이 말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누가 대장 이냐, 하고 물었지.”
그 말에 카심은 나다, 하고 당당하 게 나섰더란다.
이제 막 지혜를 받은 동족들의 정 신은 어린애나 다름없어서 그 외에 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자 로드릭은 잠시 카심을 홅어 보다가, 툭 말했다.
—다 비슷하게 생겨서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카심은 어리둥 절했다.
인간에 비해서 타이탄족의 외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었 지만,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 기에.
로드릭의 의도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직후였다.
—크아아악! 어, 어째서…?! 너는, 여신께서 보내주신, 우리 타이탄족을 이끌어줄 대리자가 아닌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피하고 막고 할 틈도 없었다.
로드릭은 그 당시에 이미 소드마스 터조차 초월한 상태였고, 카심은 지 금보다 한참 더 약했다. 가슴팍에 X 자 상처를 새긴 후, 나동그라진 그를 짓밟고 선 로드릭은 말했다.
—너는 왜 초면에 반말질이야, 건방 지게.
—아, 아니, 너도 초면부터 반말 했….
—나는 그래도 돼.
하암, 하고 하품까지 한 그가 카심
의 턱을 걷어찼다. 그리고 의식을 잃 어가는 카심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 렸다고.
—말대답하는 거 보니까 깡은 좋네. 제대로 굴려볼까?
카심의 지옥행이 결정된 순간이었 다.
이야기하면서 그 당시를 떠올렸는 지, 카심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부들부들 떨었다.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기세가 주변 공간을 왜곡시킨다.
레온조차 위로 한 마디 못하고 허 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야,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었냐?’
엘시드도 여기서 뻔뻔해질 순 없었 는지 말을 돌렸다.
[•••후, 나도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게 있었지.]‘질풍노도가 아니라 평지풍파겠지! 생전에도 막 나갔을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 당시라면 너보다도 어렸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애들은 원래 싸우면 서 성장한다고 하잖냐.]‘아니, 나보다 어렸다고?!’
[저놈하고 처음 만났을 때면 17살인가 그랬을걸?]
레온은 이게 사람새끼가 맞나, 하는 얼굴로 성검을 보았다. 열다섯에 마 스터의 벽을 뚫었다는 게 사실이었 다고?
‘그리고 싸움은 서로 맞고 때리면서 하는 건데, 넌 때리기만 했을 거 아 냐. 그게 뭔 싸움이야, 일방폭행이 지.’
[그건 그렇네』‘납득하지 말고 반성하라고!’
몇 분만에 진이 다 빠진 레온이었 다.
카심은 분을 삭이느라 씩씩거렸고,
그는 그 뒤를 따르면서 300살 더 먹은 사형의 과거를 애도했다. 그렇 게까지 당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줬 다니, 그동안 쌓인 원한이 곪아터지 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나마 레온이 추임새도 좀 넣고, 로드릭의 욕에 맞장구도 좀 쳐주니 표정이 나아지는 게 보였다.
“후우, 네 덕분에 속이 좀 풀렸구 나. 고맙다, 사제.”
“•••언제든지 말만 하세요, 사형.”
시대를 뛰어넘은 공감대를 형성한 인간과 타이탄이 서로의 주먹을 한 번 맞부딪혔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거의 다 왔군. 이쪽이다.”
폭포수 뒤쪽에 숨겨져있던 동굴, 그 안으로 들어선 카심이 레온에게 손 짓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나농도가 크게 치솟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범하게 호흡하 기가 힘들 정도다.
“로드릭의 유산이라면 이 안에 있 는 게 전부겠지. 언제 한 번 오겠다 더니 죽을 때까지 안 찾아오더군.”
“뭐, 그놈이 헛소리하는 게 하루이 틀이에요?”
“크하하하! 맞아, 입만 열었다하면 헛소리 였지!”
거인왕에게 접선을 시도했던 자들 이 본다면 크게 후회하지 않을까. 로 드릭의 험담만 잘 늘어놨어도 친분 정도는 쌓을 수 있었을 게 분명했다.
빠르게 친밀해진 두 사람이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와…!”
그 풍경을 눈에 담은 레온의 두 눈 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굴 내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천장이 뻥 뚫려있는 광장 전역에 환 상적인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무지개색의 잎새를 흩날리는 꽃.
황금처럼 누런 사과가 주렁주렁 열 려있는 나무.
그 이외에도 온갖 영초와 영목들이 한가득이 었다.
“그놈이 몸 보신한다고 심어놓은 영초들이다. 300년이나 더 묵었으니 그 시절에 먹는 것보다는 효험이 있 을테지.”
[아, 까먹고 있었다.]“영약 말고도 더 있다. 그놈이 대충 써갈기고서 버리고 간 무예서와 오
러연공법, 강체술에 관련된 이론서 같은 것들이지. 우리들은 습득할 수 없지만, 참고할 만한 점은 꽤 있다.”
[그런 것도 있었지. 별로 중요한 것 도 아니지만.]카심의 설명에 한 마디씩 덧붙이는 엘시드의 말에, 레온은 의문스러운 점이 생겼다.
영약도 무예서도 까먹고 있었다면, 진짜 유산은 무엇인가?
그 이전에 ‘잊어버렸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을까?
어째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치밀어올랐다.
‘야, 마검.’
[왜?]‘영약도 무예서도 다 까먹고 있었다 면, 진짜 유산은 뭔데? 예전에 잊어 버렸다고 한 말도 다 뻥이었지?’
엘시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픽 웃었 다.
[이런, 들켰나?]평소와는 또 다른 반응이었다.
그래서 레온은 한층 더 긴장했다. 평소에도 숱한 장난질로 그를 괴롭 혔지만, 이 거짓말에 무슨 의미가 있 겠는가. 유산이 뭔지 감춰봤자 결국
에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 다.
그렇다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시 기를 늦추는 게 엘시드가 한 거짓말 의 목적은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다 들은 모양이로군.”
카심 역시 그 사정을 짐작했는지,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그를 돌아 보았다.
두 눈동자에 한껏 담겨있는 감정은 하나분이었다.
연민 (’隊慰).
그가 한 번 경험했던 고통을 겪게 될 사제에 대한, 진심이 가득 우러나
온 동정심이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 음질을 친 레온의 허리춤에서 목소 리가 울렸다.
성검의 진동으로 음성을 재현하는, 엘시드의 묘기.
《야, 덩어리. 잘할 수 있겠냐?》
“해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군. 그 래도 최선을 다하겠다.”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살려낼 수 있으니까, 힘 조절만이라도 잘 해 봐. 머리하고 심장은 노리지 말고.》
“ 명심하지.”
섬뜩하기까지 한 이야기에 레온이 말을 떨었다.
“자, 잠깐만. 이게 뭔 소리야?”
《그게 말이지….》
엘시드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꼬리 를 흐렸다.
그로부터 시작된 설명은 더욱 어처 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안법〉과〈보법〉으로 기본기를 마 련하고,〈칠성검〉과 같은 상승검술로 몸을 다루는 방법도 숙련했다. 여기 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 과정 이었다.
《지금부터 너는 ‘염력(念方)’을 단련 하게 될 거야.》
염동력과는 전혀 다르다. 정신이 몸 을 초월해서 물질세계에 간섭하는 힘, 그것이 바로 염력이었다. 오러마 스터의 영역에 도달하면 쓸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스터가 된 후에 깨닫는 염력은 반쪽짜리야. 그걸 모르면 마 스터의 다음 경지를 볼 수 없어. 평 생 자기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도 모르고 살다가 늙어죽겠지.》
“아니, 염력이고 뭐고 다 좋은 데….”
식은땀을 닦아낸 레온이 자꾸 돌아 가는 말을 되짚었다.
“그걸 왜 숨겼냐고. 수련방법이 위 험하기라도 해?”
《끙, 덩어리. 니가 좀 설명해봐.》
“ 썩을놈.”
엘시드의 부름에 답한 카심이 투덜 거렸다.
그래도 설명은 할 생각인지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사제, 염력은 순수하기까지 한 정 신의 힘이다. 신체능력도 오러도 무 의미한, 정신만으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지. 하나 물질세계의 생명체가 염력을 터득하는 것은 어렵다. 마스 터가 된 후에는 몸과 정신이 물질세
계를 초월하기에 쉬운 것이지, 그 전 에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 다.”
“불가능에 가깝다면, 가능하기는 한 거군요.”
“저 괴물은 자력으로 터득했지만, 독학으로 일깨울 수 있는 방법은 없 다. 그래서 날 찾아가라고 한 모양인 데….”
후우, 하고 한숨까지 쉰 카심이 진 실을 털어놓았다.
“염력의 수련법은 단 하나. 체력과 오러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쓰 게 한 후, 극한상황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반복하여 염력의 개화를 유도 한다. 그게 전부다.”
“…좀 더 쉽게 말하면요?”
“염력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죽기 일보 직전으로 만든다. 그 방법이 단 하나분인 염력수련법이다.”
선 채로 얼어붙은 레온의 머릿속으 로, 엘시드의 텔레파시가 쿡쿡 찔러 들어왔다.
웃음기는 없었지만 얄밉기 그지없 는 목소리였다.
[내가 왜 유산이 뭔지 안 가르쳐줬 을까?][솔직하게 다 말해주면 안 가겠다 고 할 거 같아서 그랬어. 그래도 너 좋으라고 한 일이니까 너무 원망하 진 말고.]
[미안]
“…이 썩을 마검새끼가!”
인내심이 뚝 끊어진 레온이 성검을 땅에 집어던졌다.
‘이대로는 안 돼.’
카렌은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관지기〉라는 이름으로 악명 을 떨쳐, 블레인의 슬럼에 군림했던 게 그녀다.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그 녀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최강으로 이름 높은 칸조차 그녀와 직접 싸우는 것만큼은 회피하려고
했다.
특급 암살자.
동급이라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으 며, 한 수 위의 상대라도 감당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정정당당한 싸움판으로 끌고 나온 다면 모를까,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암살자만큼 강한 자들도 없었다. 카 렌 역시 자신의 실력에 나름대로 자 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지.’
그러나 용사, 레온과 여정을 함께하 면서 그녀는 곧 깨달을 수밖에 없었 다. 이 세상의 운명을 인도하는 자,
용사의 앞길에 특급 암살자쯤은 별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블레인의 토벌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1인2역까지 하면서 제법 활 약했지만, 마지막에 나온 괴물을 쓰 러트린 건 레온이었다. 진정으로 강 대한 적 앞에서 암살기교는 결국 잔 재주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해.’
안 그러면 용사의 여정에서 낙오당 한다. 죽든 크게 다치든,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떠안게 될 것이다.
레온의 성장속도는 엄청나게 빠르 다.
블레인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는 1 분 내로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였지 만, 지금이라면 생사투가 된다. 오러 속성의 상성이 안 좋은 탓도 있겠지 만, 실력 차이도 크게 좁혀지고 있었 다.
이 마을에서 선대용사의 유산을 계 승하고 난 후에는 더더욱 강해지리 라.
그녀가 더 이상 필요없을 정도로 강해질지도 모른다.
‘싫어.’
여기에서 끝나고 싶지 않았다.〈관 지기〉가 아닌 카렌으로서 제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녀를 슬럼가에 버린 부모의 귓구멍 에도 들릴 정도로 유명해지고 싶었 다.
‘강해져야해.’
특급 암살자가 된 후로는 단련하지 않았다. 아니, 단련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신체능력은 이미 한계까지 개발된 후였고, 오러의 양과 질은 하 루아침에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전검술이나 오러연공법 을 새로 배울 기회는 또 없어서, 할
줄 아는 것들을 점검하는 게 전부였 다.
암살자로서 키워진 자의 한계였다.
스스로 강해지는 법을 모른다.
“카렌!”
그렇게 힘을 목말라할 때. 그녀에게 처음으로 빛을 보여준 사람이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낡은 서적과 풀떼기를 가져온 레온 이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선물 을 받아들었다. 로드릭이 직접 저술 한 무예서에 300년 이상 숙성된 영 약이라니?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
다보니 전혀 실감나는 게 없었다. 거 인왕과 그가 사형제 관계였다는 것 또한 그러했다.
“나는 당분간 사형하고 틀어박히게 될 것 같아.”
평상시보다 좀 창백해진 얼굴로, 그 는 그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안겨주고 등을 돌렸다.
용사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특훈이 라도 있는 것일까.
카렌은 멍한 얼굴로 그를 전송하고, 제 품에 안겨있는 것을 내려다보았 다. 영초 특유의 향기와 낡아빠진 종 이의 냄새, 그 가벼운 무게만이 현실
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강해질 수 있었다.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강 해지고 싶었다.
“…〈어둑서니의 윤무〉.”
몇 장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 다.
그녀를 위한 무예서였다.
어둠이나 그림자 속성을 지닌 무인 들에게 적합하며, 빠르고 은밀한 움 직임과 허를 찌르는 기술들이 주를 이룬다. 카렌은 그 서술을 읽기만 해 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카렌 역시도 암살의 천재였기에, 이 책을 저술한 로드릭의 터무니없는 역량을 짐작했던 것이다.
‘이 무예서의 절반만 터득할 수 있 어도…!’
마스터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
확신을 품은 카렌의 두 눈동자가 날을 세웠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 주는데 노력하지 못하면 죽는 게 나 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