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powered Sword RAW novel - chapter 96
《본래대로라면 이 장소에 서있어야 할 사람은 레온, 당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말에 레온은 저도 모르게 어금 니를 악물었다.
‘리안, 또 너라는 거냐?’
주인공다운 외모와 태생, 재능까지 타고난 동명이인.
엘시드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성검 과 용사라는 직함마저 제 손에 넣었 을, 이 세상에서 가장 선택받은 남 자.
아직까지도 그의 가슴 안쪽에 남아 있던 열등감이 진득하게 끓어올랐다. 만약 이 자리에서 여신이 그의 성검 을 회수하여 리안에게 준다면, 냉정 하게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까?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
《레온.》
여신이 그 번뇌를 다독이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용사는 그 화려한 일생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지만,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살아간 자는 몇 없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소유했기에 그 이
상의 짐을 짊어져야하며, 소소한 삶 에 만족하고 평온을 누리는 것마저 도 불가능하지요.》
숙명(宿命)이란, 그런 것이다.
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다.
한 번 시작되면 끝까지 계속 나아 가는 것만이 정답. 그 외의 길들은 모두 낭떠러지로 이어진 오답이다.
《다섯 머리의 마룡을 쓰러트렸지만, 모든 동료를 잃고 그 자신도 병상에 서 일어나지 못한 용사가 있었습니 다.》
성법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었다.
신의 영역에 근접하는 힘, 마의 심
연에 존재하는 힘 중에는 여신조차 손댈 수 없는 권능이 존재했다. 그러 한 것에 당하면 그 승패와 무관하게 죽거나 후유증을 앓게 된다.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을 구했음에 도 고향 마을의 가족을 구해내지 못 한 용사가 있었습니다.》
용사는 대국적으로 행동해야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는 그 정 의를 실현할 수 없다. 제 혈육일지라 도 우선시하면 안 되고, 제 친우라고 해서 전선에 공백을 만들 수도 없었 다.
《모두를 인도하는 빛을 위해서, 용
사는 그 누구보다 깊은 어둠을 마주 해야합니다. 죄를, 악을. 상상도 하 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몇 번이나.》
죄악을 타도한다는 것은 그 현장을 마주한다는 것.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그 참 혹한 기억으로 오랫동안 고통받듯이, 용사 또한 스스로가 맞서고 쓰러트 려온 악인들이 만든 참상에 고통받 아야했다.
사람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을 믿 으면서도, 그 그림자에서 암약하고 있는 악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당신이 감당해야할 짐이 다.》 아닙니
여신에게서 흘러나온 빛이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레온을
《당신이 감당해야할 업이 다.》 아닙니
그녀는 진심으로, 가시밭길을 스스 로 걷겠다고 한 아이에게 마지막 기 회를 줄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면, 내게 말해주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본래 살아가야했을, 행복하고 평온한 삶의 궤적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어요.》
그곳에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적들도, 누군가의 고통을 양식으로 삼는 악인들도 몇 없을 것이다.
적어도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을 만 들 정도는 아니리라.
여신의 목소리는 그 사실을 적나라 하게 전달했다.
너는 지금처럼 치열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손아귀에 넣은 힘으로 제 잇속만을 챙겨도, 누군가가 대신 세상을 구원 해줄 거라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싶더라 니.’
레온은 1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면 서 피식 실소했다.
—네가 그 리안이라는 도련님을 이 기고 싶다면, 내가 약간의 힘을 보태 주마. 성검의 주인으로서 짊어지게 될 의무는 다른 이에게 떠넘기고, 네 소원을 이루는 거다. 운명을 좀 거역 하는 대가로 이 세상을 구원하라니, 수지가 안 맞지 않나?
엘시드의 말에, 그는 뭐라고 대답했 던가.
“여신님.”
그날밤과 같이 레온은 한 걸음 앞 으로 내디뎠다.
“그건, 비겁합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거기에서 끝나 지 않았다.
그날밤에 할 수 있었던 대답은 그 게 최선이었지만, 지금의 레온이라면 몇 마디를 더 붙일 수 있었다.
“여신님, 저는 특별하고 싶었습니 다.”
노골적이기까지 한 욕망의 폭로였 다.
“평범하지 않은 색깔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멋진 외모로 아름 다운 연인을 얻고 싶었습니다. 비극 이라도 좋으니 그럴 듯한 출신으로
태어나, 노력하면 그 이상으로 보답 받는 일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바란다고 이루어지면 이 세상에 불 가능은 없겠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불행은, 그가 소원했던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눈앞 에 나타나버렸다는 점이었다.
리안.
금발벽안의 잘생긴 외모, 클라이드 제국의 황족이라는 신분, 그의 첫사 랑이었던 클로에, 나중에 알게 된 사 실이지만 본래 용사가 될 운명이었 다는 것까지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줄은 몰랐습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도전하고 패했 다.
이길 수 없으리라고 알면서도 계속 덤볐고,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이 화 강암처럼 굳을 때까지 목검을 휘둘 렀다.
그 노력이 무가치할지라도, 무의미 하진 않으리라 믿고서.
그리고 그 발악과도 같은 노력을 인정해준 자가 있었다.
“엘시드만이.”
목이 멘 레온이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엘시드 한 명만이 저의 가능성을 인정해줬습니다.”
메말라서 쩍쩍 갈라지고 있었던 자 존감에 홍수가 쏟아졌다. 용사는 잘 난 혈통과 가문 따위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며, 너는 고결하다고 외치면서 그 힘을 빌려주었다.
그 순간, 레온은 다시 태어났다.
3년의 방황으로 일그러졌던 마음을 곧게 펴, 접쇠로 단조한 칼날처럼 곧 고 단단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신님.”
레온은 그저 솔직하면서도 당당하 게 입을 열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열 등감에 사로잡혀서 같은 자리를 맴 돌았던 애송이였고, 그때보다 많이 성장한 지금조차 용사로서는 미숙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볼품없는 내용과 달리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저는 그 누구보다도 엘시 드를 믿고 있습니다.”
성왕 로드릭.
인류사 최대최고의 업적을 남긴 대 영웅이면서, 그의 한계를 쳐부수고 오늘날까지 이끌어준 은인이자 스승.
그 대영웅이 말한 것이다.
너는 내 제자라고, 충분히 할 수 있는 녀석이라고.
“여신님, 저를 용사로 남겨주십시 오.”
그때, 레온은 결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절 인정해준 엘 시드를 위해서, 이 생을 바쳐서라도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겠습니 다.”
여신을 앞에 두었음에도 그 결의에 는 전혀 흔들림이 없어, 내면의 각오 를 몇 배나 두텁게 만들었다.
언령까지 갈 것도 없이 말에는 힘 이 실린다.
하물며 신 앞에서 다짐하는 말은 일종의 맹세(Vow)가 되며, 그 화자 를 구속하는 것과 동시에 힘을 제공 한다. 여신마저도 살짝 놀랐을 만큼 레온이 한 맹세는 강력했다.
《•••후후,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그의 진정성을 안 여신이 상냥하게 미소지 었다.
《좋습니다. 레온, 당신을 내 대행자 로 인정하겠습니다. 그 긍지를 저버 리지 않고, 정의와 선을 위해서 검을 휘두른다면. 이 세상의 빛을 인도한 다는 역할을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기꺼이 그 뜻을 받들겠습니다.”
여신은 그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 이더니,
《나의 대행자에게 축복을 내리겠습 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빛 기둥을 뿜어내 서 레온을 휘감았다.
《수호자(Guardian)의 성흔을.》
레온의 심장 어림에 직사각형을 닮 은 성흔이 새겨진다.
‘세계의 적’을 상대할 때에 그 힘 을 더해주고, 햇빛과 달빛 모두를 받아들여서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가호다.
성철쇄기사 중에서도 몇몇만 가지 고 있는 힘이었다.
《정화자(Purifier)의 성흔을.》
레온의 쇄골 아래에 불길과도 같은 성흔이 새겨진다.
권능급에 못 미치는 독을 무효화하 고, 저주와 오염 일체에 절대적인 힘 을 발휘하는 가호다.
힘을 집중시키면 성화(聖火)를 만들 어낼 수 있었다.
《기원자(Prayer)의 성흔을.》
레온의 이마 중앙에 반투명한 성흔
이 새겨진다.
정신간섭을 무효화하고 의지력을 강화하며, 정신력 자체를 몇 배나 증 폭시키는 가호였다. 염력 역시 몇 배 로 강해졌기에, 이전보다 더 여유롭 게 힘을 사용할 수 있을 터다.
성법의 힘을 증가시키는 효과도 존 재했다.
《마지막으로 주시자 (Observer) 의
성흔을.》
레온의 두 눈동자가 완전히 황금색 으로 물들었다.
이제 그 색깔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세계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
한 눈. ‘불균형’이나 ‘균열’을 파악하 고 간섭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가호 였다.
정체를 위장한〈외적〉들을 꿰뚫어 보는 것도 가능했다.
네 개의 성흔으로 모든 가호를 베 풀어주고, 간섭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한 여신이 손을 흔들었다.
《거친 풍랑에도 무릎꿇을 줄 모르 는 나의 검, 레온. 당신의 앞날에 좋 은 인연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나는 언제나 이 하늘 위에서 당신들을 지 켜보고 있겠습니다.》
레온이 그 작별인사에 답하려는 찰
나, 세계가 뒤집혔다.
* * *
빛의 기둥이 사라진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순식 간이었다. 입을 벌렸다가 닫기도 전 에, 그는 동굴 안으로 돌아와있었다.
동굴에 남아있었던 엘시드가 그를 맞이했다.
[오, 그럴 듯한데? 푼수녀가 꽤 크 게 썼나보구만.]“뭐라고? 그게 뭔….”
엘시드의 뜬금없는 소리에 의아해 하다가, 레온은 곧 자신의 몸 주위로 넘쳐흐르는 힘을 인식했다.
성력분만이 아니었다.
두 주먹을 움켜쥐니 몇 배로 늘어 난 악력이 손바닥을 감싸, 혈관에서 홀러넘친 오러가 황금빛으로 타오른 다. 오러의 순환 역시도 몇 배나 원 활하면서 신속하다. 체내의 불순물이 전부 사라져버린 게 느껴졌다.
‘정화자의 성흔!’
아무래도 성흔이 새겨지면서 그 힘 의 여파가 불순물까지 다 태워버린 모양이었다.
환골탈태나 다름없는 변화다.
성흔을 받기 전과 비교하자면 전투 력이 서너 배, 어쩌면 그 이상으로 늘어났을지도 몰랐다. 터무니없는 변 화에 현실감이 없어. 레온은 몇 번씩 이나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만약 이 상태로〈칠성검〉을 휘두른 다면…?
‘어마어마한 위력이 나오겠군.’
혈거인을 토벌할 때의 파괴력쯤은 재현할 수 있으리라.
[어이, 만족하는 건 좋은데 나도 좀 살펴보지?]“응? 아!”
레온은 그제서야 성검을 뽑아, 봉인 이 다 풀려나간 상태가 어떻게 다른 지를 두 눈으로 살펴보았다.
주시자의 성흔.
황금색 눈동자가 보통 사람의 시각 에는 노출되지 않는 힘의 파동과 공 간의 흔들림을 읽는다. 성검을 중심 으로 한 에너지, 그 규모만 봐도 이 전과는 천지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이게, 용사의 힘.”
검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니 칼날 부근에서 성력으로 이뤄진 번개가
튀어오른다. 본래의 힘을 되찾은 성 검 엘시드는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그 성력을 벼락처럼 뿜어댔다.
용사 레온.
로드릭의 계보를 잇는, 진정한 용사 의 재림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레온은 저 멀리서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볼 수 있었다. 그의 감각으로는 여신과 대 면했던 시간이 수십 분에 불과했지 만, 신계(神界)와 달리 물질세계의 시간은 한나절도 넘게 경과했던 것 이다.
선 채로 꿈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 이었다.
그러나 레온의 몸에 새겨져있는 성 흔들과 황금색으로 변한 눈동자가 그 기억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모든 게 낯설어보여.’
하룻밤만에 온 세상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것은 이 세상이 아닌 그 자신이었다. 어제까지 볼 수 없었 던 것이 보이고, 들을 수 없었던 것 이 들리며, 해낼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 흔 (Stigmata).
여신이 직접 신도들에게 내려주는 은혜이며, 그녀의 권능을 아주 작게 나마 구현할 수 있는 기적. 그것을 네 개나 동시에 받아들였으니 변화 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했다.
[흠, 좋은 의미로 예상 밖이구만.]엘시드가 말했다.
[적으면 두 개, 많아도 세 개라고 생각했는데…. 네 개라니, 그 푼수도 나름대로 궁리를 한 모양이로군.]“용사라면 보통 몇 개인데?”
[평균적으로 두 개 정도다. 세 개도 드문 편이었고.]그 말대로라면 레온은 여러모로 특 별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수호자’는 흔한 성흔이지만 효과가 퍽 괜찮고, ‘정화자’의 불꽃은 상당히 유용하지. 독과 저주를 물리적으로 불태워버릴 수 있는 힘이니까. 타인 에게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가산점 을 줄 만하다』“나머지 두 개는?”
[‘기원자’와 ‘주시자’인가…. 어느 쪽 이든 잘 나타나지 않는 종류로군. 너 는 염력이나〈안법〉으로 그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겠지만, 다른 놈들한 테는 별 쓸모가 없지.]“아,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는데.”
엘시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레 온이 말했다.
“너는 성흔이 몇 개였냐? 로드릭의 일대기를 몇 번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런 내용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서.”
[응? 나는 성흔을 안 받았는데.]
“ 어째서?”
[마왕한테도 생채기 하나 안 난 몸 뚱이에 왜 성흔 같은 걸 새겨야하 냐? 나는 푼수한테 힘 빌릴 필요도 없이 다 해치우고 다녔으니까, 그런 건 거추장스러울 분이었고』
“…하긴.”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산을 박살내고 바다를 베어가르던 놈에게 성흔 몇 개 준다 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레온은 그 자신만만한 대답에 수긍 하며 계속 걸었다.
어느샌가〈차원의 균열〉과 폭포를 나누는 갈림길을 지나쳐, 타이탄 마 을이 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좀 떨 어진 곳에, 제 존재감을 숨김없이 드 러낸 거인 한 명이 우뚝 서있었다.
“사형?”
카심의 모습을 본 레온이 반갑게 다가가려는데, 알 수 없는 위압감이 그 걸음을 멈춰세웠다.
온다.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감각이 몸 전 체로 번졌다.
퍼어엉!
그 직후, 레온이 멈춰섰던 자리에 충격파가 작렬했다.
소리를 뛰어넘은 권격.
보이지도 않는 충격에 땅이 도려내 지고, 그 흙먼지가 짙게 피어오르면 서 시야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레온
의 두 눈동자는 먼지 너머에서 꿈틀 거리는 파동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첫 공격은 어디까지나 신호 탄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카심이 본 격적으로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충격파가 먼지구름을 찢고, 레온의 움직임을 쫓아서 땅을 파헤친다.
한 방 한 방이 해군의 화포와도 같 은 위력이었다.
수십 미터 밖에서도 이 정도일진대, 가까이서 맞게 된다면 그 타격은 어 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거리를 벌린 채로 싸우면 이길 수 없지.’
타이탄의 체력은 실로 무궁무진하 다.
사흘 밤낮을 쉴 새 없이 싸우더라 도 탈진하지 않고, 하루를 꼬박 내달 려도 호흡이 떨어지지 않는다. 태생 부터가 생태계의 정점에 선 전투종 족이 바로 타이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