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
1화. 선택
[업적 달성: 미다스의 손] [축하합니다! 공개된 모든 신앙의 엔딩을 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기분 좋은 알림음에 이삭은 미소 지었다.
‘황금 우상’의 엔딩을 달성한 이삭의 눈에 사람들을 비롯해 온 세상이 금은보화로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삭이 황금 우상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에 현신한 결과였다.
이제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삭은 엔딩을 봤고, 뒷일은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극악무도한 난이도로 소문난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의 엔딩을 본 것은 이번이 여덟 번째였기 때문이었다.
‘언노운 소프트웨어(Unknown Software)’라는 제작사에서 만든 이 게임은 미친 난이도와 불친절한 게임 구성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 반비례하듯, 말도 안 되는 자유도와 오픈월드 세계관, 디테일 때문에 매니악한 유저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내 어둠이 드리워지고, 여덟 명의 캐릭터들이 나타났다.
인간, 오크, 엘프, 거인 등등…… 이삭이 이때까지 만들어서 플레이해 왔던 캐릭터들이었다. 이삭은 그 캐릭터들을 보면서 아쉬움 섞인 소리를 중얼거렸다.
“으음…… 이제 이 게임 컨텐츠도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은 것 같고, 더 할 것도 없으려나?”
네임리스 카오스는 여덟 가지 신앙과 종족을 선택해 자신의 신이 제시한 목표를 이루는 게임이다. 선택지마다 상호작용이나 스토리가 천차만별로 바뀌어서 도무지 질리지 않고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신앙의 엔딩을 봤다는 것은 이제 거의 모든 컨텐츠를 즐겼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약간의 아쉬움으로 게임 종료를 망설이고 있을 때, 이삭의 눈에 낯선 메시지가 나타났다.
[전세계 최초 업적 달성 기념으로 새로운 신앙이 등장합니다.] [히든 신앙: 이름 없는 혼돈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응?”
새 캐릭터를 만드는 칸에 본 적 없는 아홉 번째 신앙을 선택하는 칸이 나타나 있었다. 기이한 촉수 문양에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는 모습이었다. 이삭은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명칭에 당황했다.
“……몬스터 신앙?”
네임리스 카오스에 존재하는 메이저 신앙들은 ‘아홉 신앙’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가 가능한 것은 여덟 개의 신앙뿐, 아홉 번째 신앙은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아홉 번째 신앙인 ‘이름 없는 혼돈’은 몬스터, 그것도 지성 없는 기이한 촉수 괴물과 구더기 군집들, 꿈틀거리는 살점들이 숭배하는 외우주의 신앙이었다. 덕분에 쉼 없이 뒤얽히는 신들 간의 관계 속에서도, 이름 없는 혼돈은 무조건 적으로 취급받았다.
‘진짜 히든 신앙인가?’
이삭은 혹시나 해서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 검색해 봤으나, 어떤 공략 사이트나 위키, 포럼에서도 이 신앙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신앙 중에 유일하게 선택할 수 없는 신앙이니 떡밥 아니냐는 이야기는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네임리스 카오스는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과 지독하기 짝이 없는 난이도, 한 번만 죽어도 캐릭터가 가차 없이 삭제되는 시스템 때문에 한 번 클리어한 사람도 찾기 힘들었다.
신앙을 모두 클리어한 이삭이 특이한 경우였다.
‘그러고 보니 최초 업적이라고 했지…… 정보가 없는 게 당연하겠군.’
그는 즉시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어떻게 해야 재밌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까.”
이삭은 기왕 특이한 신앙을 얻었으니 컨셉을 확실하게 살려 보기로 했다.
네임리스 카오스는 직업과 종족이 다양한 게임이지만 뭣보다 신앙이 주축이 되는 게임이다. 특별한 신앙의 컨셉을 살리려면 사제 직업군이 가장 좋겠지만, 사제 엔딩은 너무 많이 봐서 질리는 감이 있었다.
‘성기사로 할까?’
생각해 보니 이쪽이 괜찮아 보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그 컨셉 그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온갖 신앙들로부터 적대시 당하고 있을 것이다. 사제는 생존기가 별로 없지만 이른바 ‘성퀴벌레’라고도 불리는 성기사라면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직업은 게임을 하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 일단 성기사 엔딩을 목표로.’
종족은 인간.
이삭이 캐릭터 메이킹 주사위를 굴리자 회색 머리카락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게임의 특성상 캐릭터의 외견에도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긴 했지만, 그는 이른바 ‘고인물 패션’이라고 불리는 기괴한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캐릭터는 이쁘장한 맛이 있어야지.’
다행히 캐릭터 랜덤 외형 세트는 대부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삭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공들여 캐릭터 외모를 세팅했다. 별로 의미는 없지만,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캐릭터에 애착이 생긴다는 것이 이삭의 철학이었다.
캐릭터 메이킹 작업을 마치자 능력치를 찍는 창이 나타났다. 힘, 민첩, 체력, 지력, 신앙으로 나뉜 상태창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성기사를 키운다면 체력과 신앙에 치중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이삭은 별 고민 없이 초반 장비를 착용하기에 필수적인 능력치를 제외하고는, 신앙으로 능력치를 꽉 채웠다.
‘어차피 특수 신앙이라면 그 컨셉을 즐겨야지.’
이미 고일 대로 고인 이삭이었기에, 적어도 초반부에 죽을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성장한다면 성기사의 강력한 방어력이 생존을 보장해 줄 테니까. 사제 같은 성기사가 이삭이 그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권능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죽은 신의 내장: ‘포식’한 상대의 능력치 일부와 특성을 흡수합니다.] [밤 중의 양 떼 울음: 이계의 문을 열어 권속들을 소환합니다.] [가죽 아래에: 상대방의 내부를 ‘포식’하고 그 가죽을 당신의 외피로 이용합니다.]“…….”
기괴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삭은 기분 나쁜 것보다 그 권능들이 가진 힘에 먼저 놀랐다. 다른 신앙이라면 하나같이 큰 업적 하나쯤은 달성해야 줄 법한 최상급 권능들이었다.
‘이런 권능을 시작하자마자 준다고?’
다른 신앙들도 시작하자마자 제법 좋은 권능을 주긴 하지만, 그걸 따지더라도 이 권능들은 전부 하나같이 사기라도 불러도 좋을 권능들이었다.
하지만 이삭은 반대로도 생각했다.
네임리스 카오스는 결코 일방적으로 퍼주는 게임이 아니다. 뭔가 큰 선물을 준다면 반드시 뒤에 커다란 엿도 준비해 놓고 있다.
이삭은 고민 끝에 첫 번째 권능, ‘죽은 신의 내장’을 선택했다.
아직은 ‘포식’이 무슨 능력인지 알 수 없지만 상대방의 능력치와 특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력한 장점이었다.
능력치보다는 특성이 주요했다. 어떤 특성들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으니까.
적은 확률이라도 그 특성들을 가질 수 있다면 충분히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다.
이삭이 마지막 선택지를 고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진짜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내 머리가 아득해졌다.
***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영롱한 파란 눈동자였다.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문제는 그 눈동자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천 개는 넘어 보였고, 붉은 살점과 꿈틀거리는 근육, 맥동하는 혈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삭이 이전 여덟 번의 플레이를 하는 동안 본 적 없는 기괴한 영상이었다.
그는 기절할 것 같았지만 눈을 감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이삭은 눈을 감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 수천 개의 눈동자와 눈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유리한 환경은 아니었다.
깜빡.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눈을 깜빡인 것은 수천 개의 눈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겼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데 소리가 들릴 리 없겠지만, 그 눈동자가 수천 개쯤 되면 다르다.
[이름 없는 혼돈이 이런 가짜 대신]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기계음처럼 느껴졌다.
[당신에게 진짜 어울리는 세상을 안내합니다.]이삭은 어딘가 그 메시지가, 명칭이 낯익다고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짚어보려 했을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고 칼 가지고 오라고, 아이작!”
쩌억.
눈앞을 가득 뒤덮었던 눈과 살점의 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타는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삭은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와 피비린내에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쾅! 쿠르르릉…….
밤의 어둠이 기이하게 물결쳤다. 거대한 석탑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집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에 넘실거리는 불꽃 속에 마른 형체들이 소리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이작!!”
어디선가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이삭은 고개를 돌렸다. 중년 남자가 부러진 칼로 힘겹게 웬 해골 병사 셋과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삭은 그제야 남자의 외침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자신이 아이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저앉아 있던 이삭은 자신이 칼을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남자에게 건네주기 위해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미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해골 병사들의 녹슨 칼날이 남자를 꿰뚫었다.
“컥, 허억…….”
이삭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마를 만져보자 흥건하게 피가 묻어나왔다.
이삭은 아찔해지는 기분 속에 건물의 잔해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건지 살아있었다.
‘이게 무슨?’
건물 잔해라니? 이건 분명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삭은 아찔한 기분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그 기억은 ‘이삭’으로서의 기억이 아니라 엉뚱한 기억들이었다.
이삭이 아닌 ‘아이작’으로서의 기억이었다.
이삭은 밀려오는 14살짜리 꼬마의 기억 때문에 머리가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는 지독한 통증과 타는 냄새, 미끌거리는 피의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는 기억들.
이삭은 그제야 무너진 건물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회색 머리카락에 생기 없는 잿빛 눈동자. 가냘픈 체구에 고작 해봐야 1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이작이 게임 속에 들어오기 전 만들었던 캐릭터가 어린 모습이라면 정확히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눈앞에 기묘한 창이 나타났다.
[아이작(EX+) / 충격, 탈진] [종족: 인간/네필림] [직업: 어린아이(F)] [능력: 죽은 신의 내장, 혼돈의 손길]‘뭐?’
이삭은 어지러운 기분 속에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직감했다. 아이작은 그가 지은 캐릭터 이름이다. 그런데 종족이 네필림이라니? 아이작은 네필림 종족을 선택한 적 없었다.
네필림은 게임 설정상에서 천사와 인간의 혼혈을 뜻했다.
사람들을 홀리는 아름다운 외견과 함께 천부적으로 터무니없이 높은 신앙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신들의 저주를 받은 ‘저주받은 피’ 특성 때문에 쇠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 종족.
‘캐릭터를 만들 때 극악의 확률로 부여되는 종족이라고 듣긴 했는데, 하필 지금?’
이삭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신이 캐릭터를 만들던 과정이 떠올랐다. 무작정 높은 신앙을 찍고, 공들여 외모를 깎고, 신들과 최악의 관계인 신앙을 골랐던 것. 그 모든 변수가 네필림이라는 종족 특성 부여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억들을 더듬어 보고서야 이삭은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네임리스 카오스’ 세계 안에 들어왔고, 이제 자신이 만든 캐릭터, ‘아이작’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시이이이잇─!
어디선가 날카롭게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 수도사 남자를 죽인 해골 병사들이 아이작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윽……!”
아이작은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깐 칼을 들어 저항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이작은 금방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필림 특유의 최악의 신체 능력 때문이었다.
대신 알 수 없는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는다고는 하지만, 아이작은 그 매력이 과연 언데드들에게도 통할지 의심스러웠다.
아이작은 토할 것 같은 속을 억누르며, 최대한 해골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 이동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네임리스 카오스를 홍보하던 캐치프레이즈를 떠올렸다.
[이곳은 거인과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 [당신은 이곳에서 무가치하고 의미 없게 죽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