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어둠 속에 묻힌 것들 (2)
아이작은 전 인류의 1/3을 지워 버렸다는 ‘그 병’의 설정을 떠올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아직 그 이름을 잃기 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는 대사건.
당연히 거기에는 이름 없는 혼돈을 신봉하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의 신학자, 사제, 성기사, 일반인까지도 포함되었다.
사실 병이라는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엄밀히 따지자면 어떤 의지에 의한 대학살이라고 봐야 정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증상을 ‘백사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이름을 듣게 되면 ‘감염’되기 때문이다.
이윽고 발병한 존재들은 온몸이 백화되면서 흰 먼지 알갱이로 부서져 내린다.
이름 없는 혼돈 교단의 신도들이 가장 많이 있었다던 바다 건너 남부 지방은 백사병으로 인해 지금도 흰 모래로 덮인 사막지대가 되었다.
이후 다른 신앙들은 집요한 기록 제거작업을 통해 이름 없는 혼돈의 거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끔. 에이단조차도 바로 백사병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그것은 신적인 존재의 동반자살이었다.
결국 해당 사건으로 인해 이름 없는 혼돈의 교단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또 그 거지 같은 일을 벌이려고 나를 대리인으로 부리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이작이 제일 먼저 모래 알갱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이름 없는 혼돈은 여전히 ‘이름이 없는 신일’ 뿐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지도, 반복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만들 때에도, 이계에서 나이트 스토커가 나타났을 때에도, 사후세계가 범람했을 때에도, 이름 없는 혼돈은 매번 메시지창을 통해 아이작에게 경고를 보냈다. 만약 그가 과거의 일을 반복하길 바랐다면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마다 경고 대신 권장의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그래, 이 메시지.
누군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메시지.
만약 이 메시지창이 없었다면, 상태창과 퀘스트가 없었다면 자신은 이 세상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아이작은 현실에서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번 죽여 본 적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잘도 사람을 썩둑썩둑 썰고 죽음의 위기 앞에 기꺼이 몸을 던져 가며 싸웠다.
그것은 아이작이 유달리 적응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와 거리감을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사는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고. 지금 네가 벌이는 일들은 현실이 아니라 게임 속 캐릭터가 벌이는 일이라고.
이름 없는 혼돈이 속삭이는 메시지는 그런 식으로 아이작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은 아이작을 이용해 무언가를 고치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혼돈은 기껏 자신의 신도들을 다 죽여 놓고 이제 와서 무엇을 기대하며 아이작을 불러들였을까.
이 세계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던져 왔던 오래된 의문이 다시 한번 피어올랐다.
‘이름 없는 혼돈, 우르반수스, 백사병…… 그리고 노란 옷을 입은 남자.’
노란 옷을 입은 남자.
그가 이미 사후세계에 있는 존재라면, 결국 모든 것이 그 남자와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자신의 신도들을 전부 죽인 것.
지금 그들이 사후세계에 가득할 것이라는 것.
이름 없는 혼돈이 굳이 자신을 선택한 것.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찾아오려고 하는 것.
결국 그 모든 것은 얽히고설킨 문제였다. 아직 단서는 찾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작 본인에게 해답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군.’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을 이용해서 더 크고 강한 힘을 얻을수록, 그는 점점 사후세계와 가까워질 것이다. 그는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이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셈이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놈과 다시 마주치게 되겠지.’
아이작은 그때를 무방비한 상태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든, 노란 옷을 입은 남자든, 누가 아이작에게 무엇을 원하든 간에 아이작은 여전히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누굴 돕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에이단에게로 향했다.
다행히 소금 의회 신도의 고고학적 능력은 과거의 빈틈을 메우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에이단을 당장 써먹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일단 손아귀에 두고 있으면 언제고 소금 의회의 의원들과 연결이 될 테니, 그때 가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조만간 소금 의회와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고 말이지.’
그전까지 아이작은 영지를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정비를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저건 다 뭡니까?”
자클렛의 바르바리 용병들을 시켜 폐광의 무기 창고에서 무기 일부를 꺼내오게 했다. 오랫동안 방치할 것을 염두에 둔 듯, 습도와 기름칠 등 녹스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해 대부분의 장비들이 멀쩡했다. 양도 꽤 적지 않아서 바르바리들을 전부 다 무장시키고도 예비용이 남을 정도였다.
“분실물들.”
“……군용이던데요? 게다가 새것이고. 제국군 제식 장비는 아니지만…….”
아이작은 신기한 눈으로 자클렛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리 대부분이 글자도 못 읽는 야만인 취급을 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지성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그런데 자클렛, 군용인 건 어떻게 알았지?”
“제가 경비대장으로 굴러먹은 게 몇 년인데요.”
단순히 똑같은 게 많아서, 정도의 대답이 나왔다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아이작은 자클렛의 대답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자클렛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건지 말을 이었다.
“군용 장비는 통일성이 중요해요. 무기라는 건 소비재니 쓰다가 망가지면 바로 옆 동료 거라도 주워서 쓸 수 있어야 하니까요. 칼 휘두르던 놈이 갑자기 철퇴를 들면 어지럽겠죠. 보급에도 난항이 있을 테고. 난전에서 같은 편을 알아보는 데도 필요하겠죠.”
용병이나 지방 영주의 징집병들은 자기 개성에 맞게, 혹은 그냥 주는 대로 들고 다니곤 한다. 바르바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때문에 무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면 징집병도 정규군을 1:1로는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자클렛이 말한 이유로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 되면 정규군의 진가가 드러난다. 집단 전투력과 지속력이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자클렛은 그 구조를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어디 출신이라고 했더라?”
“스반바르 군도요.”
세상의 화로 교단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울스텐이 넘어온 섬이기도 했다.
그럼 세상의 화로 신도였을 확률이 높은데, 왜 굳이 게르토니아까지 넘어와서 바르바리가 됐는지는 묻지 않았다. 거기서 사람이라도 하나 죽이고 왔을지도.
아이작은 갑자기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자클렛, 이 마을 사람들이 바르바리들을 보는 시선이 어떻지?”
“어, 물론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죠. 바르바리들이라는 게 솔직히 제가 보기에도 예의 없고 더럽고 경우 없는 놈들이 많으니.”
자클렛은 그렇게 말하다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좀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애들도 좀 누그러졌고, 아이작 님이 가르쳐준 교리 내용을 꽤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놈들도 있구요. 게다가 이번에 불사 교단과 전투하면서…… 주민들도 제법 친절해졌거든요.”
자클렛은 이 일련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쇠르 뒷골목에서 청부 살인이나 수행하던 강도무리는 더 이상 없는 듯했다. 애당초에 바르바리들이 지나치게 살기를 띠던 것도 로어커스 사태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져서 그리된 것이니 부드러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좋아. 자클렛, 이제 네가 다시 여기 경비대장이다.”
“겨, 경비대장이요? 제가요? 저는 바르바리인데요?”
복잡한 문제이기는 했다. 바르바리는 신앙인이 아니고, 심지어 제국민으로 인정받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조금 과한 광신도들은 바르바리를 짐승 취급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르바리를 공직으로?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신앙을 가져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배교자가 다시 신앙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쉽다면 세상에 바르바리들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그 복잡한 문제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말하면 그런 줄 알아. 내가 이사크레아 령의 영주 아이작 이사크레아다. 이사크레아 수도원의 원장이기도 하고. 지금은 경비대장이지만 혹시 모르지,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의 성기사라도 될지도.”
“서, 성기…….”
이상한 부분에서 말이 끊어졌지만, 자클렛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이즈의 일인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진심이었다.
오직 그에게만 충성하는 병력이 필요하다.
자클렛은 성기사라기에는 한참 수준이 부족하지만, 그건 지금도 늘어나고 있는 신앙과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물론 자클렛 본인도 피땀눈물이 섞인 노력을 해야겠지만.
“다른 놈들도 바르바리라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노력하라고 해.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말하고.”
아이작은 거기까지 말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캐틀린은 어디 있지? 그쪽도 정리를 해놔야겠군.”
***
“저와 한 약속을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찾아오자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캐틀린은 새롭게 차려진 황금우상 상단의 이사크레아 지부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캐틀린은 그 사이 원래 있던 건물을 사들이고, 마차가 머물 공간과 창고, 로비, 휴게실까지 완비하여 제법 그럴싸하게 지점을 만든 상태였다.
지점의 완성도만 보아도 캐틀린이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요즘 너무 바빠서 잊고 있긴 했다. 사실 금방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 당신이 계속 상기시켜 줄 거라고 생각했지.”
“예.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투자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성과가 나오는 일은 아니니까요.”
캐틀린이 쇠르라는 경제 대도시의 지부장 자리까지 비워 두고 이사크레아까지 온 이유. 그것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새로운 무역거점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실 쇠르 지부를 완전히 비워둔 것은 아니고 대리인에게 일임한 상태였지만, 직접 와서 챙길 정도로 그녀는 이사크레아 영지 투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투자라고는 해도 아이작 님이 저희 상단에 맡겨두신 그 자금을 운용하는 수준이긴 하지요. 그것으로 충분하지만요. 그리고 전에 말씀 주신 대로만 진행된다면 회수는 훨씬 빠르겠지요.”
“음. 그거야말로 시간이 해결할 문제니까.”
이사크레아 영지를 무역거점으로 만든다는 계획은 아이작이 캐틀린에게 제안한 것이다. 당연히 그 계획에는 합당하고 실현 가능한 계획들이 담겨 있었다. 이솔데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황금우상 상단의 지부장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것들로.
캐틀린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이미 소금 의회 상인과 화로 장인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 북해 항로만 열어주실 수 있다면…….”
캐틀린은 희열을 느낀 듯 몸을 떨었다. 전율을 느끼는 포인트가 솔직히 미묘해서 조금 떨떠름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북해 항로는 황금우상 상단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무역로였다.
엘릴 왕국과 스반바르 군도, 게르토니아 제국은 모두 백제국 영향권이지만 밀무역을 제외하면 무역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당연히 그 배후에는 신앙 간의 갈등과 온갖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소금 의회가 항로를 독점하다시피 한다는 것도 있고.
“그 폐쇄적인 방구석 노인네들이 만든 물건들을 조금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차익을 얼마나 남겨 먹을 수 있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요. 소금 의회가 운송한다면 해적 걱정도 없을 테고, 어쩌면 소금 사막이나 만 사하르의 물건들까지도…… 심지어 그 거래가 세금도 없는 오직 이곳의 독점적 지위 아래서만 가능하다면…….”
캐틀린은 꿈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위험한 혼잣말까지 중얼거렸다.
자칫 잘못하면 잡혀갈 소리였지만, 아이작은 그녀의 꿈을 부정하지 않았다. 황금우상은 불사 교단과도 거래를 하니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아이작도 내심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지 수복을 목표로 두고 있긴 해도 종교적 금기니 배타성이니 하는 것 따위는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일단은 엘릴과 세상의 화로 쪽만이라도 제대로 거래를 트는 게 우선이었다. 둘 다 빛의 법전의 지위를 인정하는 백제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강한 엘릴은 쉬지 않고 틱틱거린 탓에 공식적인 거래가 중단된 상태였고, 세상의 화로는 스반바르 군도에 은둔한 지 한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제대로 된 시장을 열 수 있다면 캐틀린은 황금우상 상단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로어커스 사태로 상실한 신뢰를 극복하고도 남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사크레아 영지의 물자도 풍부해질 테고.
“그러고 보니 교통이 문제인데, 그건 해결되셨나요?”
“아, 그건 걱정 마라.”
이사크레아 영지의 교통이 안 좋다는 것은 아이작도 잘 알고 있었다. 산골 계곡 사이에 위치한 영지의 교통이 편해 봤자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 두꺼운 산맥을 넘으려면 이사크레아 영지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중앙과 이어지는 가도가 산사태로 막혀 있다는 점이었는데,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이전 영주가 일부러 산사태를 일으켜서 막아둔 것 같더군. 원래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도 아니었고, 일부러 치우기 힘든 척하면서 방치한 거야.”
이전 영주, 리스헨 헨드락은 신앙적 반역을 꿈꾸면서 영지를 일부러 폐쇄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을수록 비밀을 숨기기 좋을 테니까.
아이작도 숨겨야 할 비밀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리스헨과 정반대로 할 생각이었다.
무역거점인 도시가 폐쇄적으로 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는 영지를 최대한 개방적이고 온갖 종교가 드나들 수 있는 문화적 잡탕 지역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가 퍼질 것이다.
신앙이라는 숲속에 숨은 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