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어둠 속에 묻힌 것들 (3)
아이작은 캐틀린의 준비와 의지가 만반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용건으로 넘어갔다.
“거점 구축 때문에 부탁했던 일을 까먹지는 않았겠지?”
“이를 말입니까? 이미 준비됐습니다.”
캐틀린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놓은 것은 꽤 두꺼운 서류 뭉치였다. 첫 장을 살펴보자 제목부터 눈에 띄었다.
헨드락 영지 관련 거래 재무표.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악성 채무자로 바뀔 조짐이 보였던지라 따로 정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대로 파산했다면 우리 상단에도 큰 문제가 됐겠지요. 다행히 아이작 님이 인수하시면서 일부나마 보전했습니다만…….”
서류에는 리스헨 헨드락과 카일 헨드락이 영지에 어떤 물건을 들이고 내보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무기처럼 예민한 물건들은 소금 의회를 통해 밀무역했겠지만, 밀무역으로는 도저히 수요가 충족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황금우상 상단을 통해 구했을 것이다.
“팔 때에는 이상한 점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는데, 확실히 정리하다 보니 미묘한 점들이 눈에 띄긴 하더군요. 광산이 있었으면서도 철을 제법 사들이던 것도 그렇고, 장기간 보존 가능한 식량들을 필요 이상으로 구입한 것도 그렇고.”
이런 물자 또한 영지 어딘가에 은밀하게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전 영주들이 소중하게 모은 도토리들을 홀라당 털어먹을 생각이었다.
***
그러나 아이작의 매력에 현혹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솔데는 이사크레아 영지를 떠나기 위해 말에 짐을 싣고 있었다. 아이작을 옆에 계속 두고 지켜보기로 하긴 했으나 일단 상부에 대면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고한다…….’
무고하다고 보고한다면 명령을 계속 수행할 이유가 없어지고, 촉수와 사악한 이단 신앙을 섬기는 정황이 발견되었다고 솔직하게 보고하면 즉시 성기사단이 출동할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미묘한 ‘깨끗하지만 의심의 여지는 있는’ 단어를 찾아 보고해야만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에라도 그녀가 실수해서 빛의 법전과 아이작이 충돌한다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지금 아이작은 빛의 법전 교리에 충실하면서 선을 베풀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신앙에는 빛의 법전조차 품을 정도의 아량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빛의 법전에는 그럴 만한 아량이 없었다.
만약 빛의 법전이 아이작을 배척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들은 곧 끔찍한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솔데 이단심문관님.”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이솔데는 고개를 돌렸다.
깡마른 젊은 사제 한 명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솔데는 그 사제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저 표정이 자신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원래 저 꼴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제님.”
“떠나신다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긴히 하실 말씀이시라면…….”
이솔데는 괜히 긴장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젊은 남자밖에 없는 수도원이나 신전을 드나들다 보면 그녀의 외모는 불필요한 관심을 살 때가 많았다. 이단을 심문하는 것보다 그런 기습 고백자들의 기습이 그녀에게 더 불편할 정도였다.
“성배기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성배기사를 관찰하기 위해 체류 중이셨던 것으로 아는데, 혹시 뭔가 눈치채셨을까요?”
“아, 아아. 그렇군요. 다행이군요.”
“예? 다행이요?”
“아뇨. 다른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배기사님이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제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은밀하게 말했다.
“이단심문관님은 성배기사라는 자가 의심스럽지 않으십니까?”
“…….”
이솔데는 뭐라 설명하기 복잡한 기분에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제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듯 기꺼이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어린 성기사, 사실 저는 성기사라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로튼해머 단장이 인증해줬다지만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자의 무엇을 보고 인정한단 말입니까? 갑자기 나타난 부모도 모를 고아가 갓 성인이 되자마자 성기사라뇨?”
“실제로 그에 합당한 성취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성배기사가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의 추적을 따돌리고, 쇠르에서 타락한 상인들의 정신을 고쳤으며, 이곳에서는 천사마저 물리쳤다지요.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점은 이단심문관들도 신경 쓰던 점이었다.
아이작이 성기사로서 여러 업적을 세운 것은 사실이고, 검술 실력도 대단하다지만 그 활약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기적을 쓰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라고 이솔데에게 명령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역시나 아이작이 기적을 숨길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이었고.
“하지만 천사를 물리친 것은 목격자가 많지요.”
“거기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만한 제 가설이 있습니다!”
“가설이요?”
“예! 처음부터 붉은 성배와 성배기사가 짜고 쳤다는 추측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생각에 꽤나 확신을 가진 듯 열변을 토했다.
“아시다시피 붉은 성배는 음모의 대가입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말할 것도 없지요. 성배기사를 우리 교단 안에 깊숙이 침투시키기 위해 일부러 패배한 척한 겁니다! 변방 영주보다는 교단의 성자가 이용하기 쉬울 테니까요!”
이솔데는 착잡함을 느끼면서도 사제의 말이 교단 내부의 어떤 목소리를 반영한다고 느꼈다.
외부에서 변화가 찾아오는 것을 꺼리는 자들의 목소리.
“심지어 그가 영지를 차지한 후 행적들을 보십시오! 이단들을 수도원 안에 들이고, 자산을 풀어 영지민들을 게으르게 만들며, 심지어 바르바리들에까지 칼을 쥐여준다더군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열변을 토해내는 사제의 목소리에는 일방적인 반감이 담겨 있었다.
이솔데는 아이작에게 현혹되어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대로 이렇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당연히 늘어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 대세의 흐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본능적인 반발이었다. 아이작이 성인이 되어서 완전히 교단의 편이 된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사제가 하는 말이 논리나 증거 대신 정황과 추측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이 고발이 정말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투 때문이라는 것도.
이솔데는 순전히 불만 때문에 쓸데없이 예리해진 사제를 적당히 달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직 추측뿐이잖습니까. 좀 더 알아보고 있으니 사제님은 교리와 어려운 신도들을 보살피는데 신경 써주십시오. 이 영지는 최근까지 붉은 성배의 신앙에 오염되었으니…….”
“하지만, 그 외모를 보십시오! 붉은 성배가 좋아할 만한 곱상한 얼굴 아닙니까! 분명 붉은 성배의 남창이…….”
짜악!
사제의 얼굴이 팩 돌아갔다.
사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솔데를 바라보았다. 이솔데는 그의 얼굴에 왜 손자국이 났나 생각하다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때린 거라 때린 기분이 안 드는군.’
“이게 무슨…….”
사제가 항의하려던 순간 이솔데는 주먹을 쥐고 사제의 콧등을 한 번 더 후려갈겼다. 사제는 꽥 하는 괴상한 신음을 내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이솔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제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사제.”
“힉, 히익.”
이솔데가 조용히 속삭이자 사제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그는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조용하고 나긋나긋해 보이는 여자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단심문관이다. 거친 바르바리들과 사악한 이단 신앙들이 배회하는 경계에서 칼과 고문으로 진실을 쥐어 짜내는 자들.
그 고문용 송곳과 망치가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사제는 눈빛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어려웠다.
“지금 당신은 후안 주교가 성자 후보로 추대를 준비 중이고, 리옹 후작이 직접 자작으로 작위를 수여한 이사크레아 영주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로튼해머 단장이 성기사로 임명했으며, 저, 이솔렛 브란트가 이단심문관으로서 직접 조사했음에도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 자를 말입니다.”
“힉, 아, 으…….”
“이전까지는 신앙인으로서 고발할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되어 참아주었습니다만 인신공격은 봐주기가 어렵군요. 지금 말씀드린 내용을 이사크레아 경의 신원 보증인들에게 말씀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제야 사제는 정신이 번쩍 든 모양새였다. 일시적인 질투로 시비를 걸기에는 너무나 큰 거물들이었다. 심지어 이솔데조차도 브란트 공작가의 딸 아닌가.
아무리 사제의 권력이 큰 게르토니아 제국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집안이었다.
“아, 으, 제, 제가 잘못 안 것 같습니다! 뭘 착각해서!”
“그렇군요. 왜 그런 착각을 하셨죠?”
“서, 성배기사가 어린 나이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울컥해서…….”
“아뇨. 사제님은 그런 삿된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은 사제로서의 됨됨이를 해치지 않습니까.”
“그, 그럼……?”
“넘어진 걸로 합시다. 넘어져서 머리가 오락가락했던 거죠.”
이솔데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제를 무릎 꿇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지면 가까이 밀어붙였다.
“넘어진 걸로. 알겠죠?”
사제는 무슨 말인지 깨닫고 몸을 떨다가 힘껏 지면에 얼굴을 박았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서야 이솔데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들어 올렸다. 얼굴이 흙과 피로 엉망이었지만 어차피 치료 기적이면 금방 나을 상처였다.
이솔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빛의 법전은 이런 자격 없는 자들조차 신앙심만 바치면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 이솔데는 기적이란 그렇게 하찮게 베풀어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릇 기적을 쓴다면 아이작처럼…….
“그럼 다시는 넘어지지 마세요. 사제님.”
“예, 예. 아, 알겠습니다.”
사제는 이솔데가 풀어주자마자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이솔데는 사제가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쓸데없이 과민반응했군.’
이걸로 사제는 입을 다물겠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 본인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분명 그럴듯한 말로 설득하거나 뇌물을 풀든가 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겠지. 마냥 순진무구한 성기사는 아니니.’
사실 아이작이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사제가 살아 나갈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작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처사였지만, 그것을 모르는 이솔데는 사제를 때리고 심지어 자해까지 하게 했다는 죄책감만 남았다.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그때에도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여름이 깊어지고 가을이 찾아올 무렵, 영지의 상황은 완전히 안정되었다.
파종도 늦고 땅도 피폐해졌었지만 이사크레아 영지는 역대급 풍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로어커스 때문에 땅을 헛되게 놀렸던 다른 영지들과 비교하면 눈부신 성과였다. 아이작의 기적 의식으로 생태계 최하층부터 최상층까지 최대한 가치를 끌어올린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산사태로 막혀 있던 서쪽 가도도 공사를 통해 뚫리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산맥을 넘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소식에 황금우상 상단 외에도 다른 상단들 역시 이사크레아 영지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작도 영지 안에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영지 주변의 기이한 현상이나 몬스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토벌을 빙자한 성물 수집을 이어 나갔다.
늘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크게 가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빛의 법전과 관련된 성물을 몇 개 찾아 반납하기도 했다.
[빛의 법전이 당신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합니다.] [신앙이 상승합니다.] [이성 보호 능력이 상승합니다.]아이작은 여기서 성물을 얌전히 교단에 반납하는 것이 아닌, 이사크레아 영지 안에 있는 수도원에 반납했다. 어쨌든 여기에도 빛의 법전 사제들이 머물고 빛의 법전 수도원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반납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강력한 성물은 아니었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으니 유용한 방식이었다.
‘다른 신앙 성물도 이렇게 보관하면 좋겠는데.’
물론 이단 신앙자들이 들락거리는 건 눈감아줘도 다른 종교의 사당이나 신전을 세우는 것은 사제들이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아이작은 아쉬운 대로 일단은 빛의 법전 성물 반납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제 영지도 안정된 것 같군.’
이번 원정 동안 일부러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고 영지를 비웠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모두 카일과 지힐렛이 알아서 처리했다.
이미 매뉴얼을 만들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돌발적인 상황으로 영지가 주저앉을 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정 급박한 상황이라면 카일에게서 직접적으로 의지가 전해질 것이고.
이제 슬슬 영지에서 눈을 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이작에게 편지가 날아왔다.
많은 미사여구를 제외하고 요점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즉시 노르덴 항으로 와주길 바람’
후안 리아르 주교로부터의 소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