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바다 깊은 곳에 (1)
“의회는 익사자 왕을 배제하기로 결정한 건가?”
“아니오. 의회는 늘 그렇듯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한 결론으로 시간만 끌다가 요구를 뭉갤 겁니다. 하지만 그 머저리들은 현장 상황을 몰라요. 선원들의 생계를 생각해서라도 계속 여기에 배들이 붙잡혀 있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히야니스는 침중하게 대답했다.
“익사자 왕의 요구는 거절한다고 조용히 끝낼 수 있는 부류가 아닙니다. 소금 의회의 운명이 달린 일입니다. 놈이 소금 의회의 명줄을 끊는 것을 보느니 우리가 천사의 명줄을 끊는 게 낫습니다.”
즉, 소금 의회의 의견은 둘로 갈라져 있는 셈이다.
익사자 왕의 요구를 들어주느냐 마느냐.
히야니스는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강경파에 속하는 것 같았다. 사실 ‘강경파’ 수준을 넘어서긴 했다.
그는 의회의 결론을 기다리는 대신 아예 천사의 목을 따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빛의 법전에서 주교와 천사를 퇴치했다는 성배기사가 넙죽 도와주겠다며 모습을 드러낸 셈이고?”
“공교롭지만 그렇게 됐군요.”
아이작은 실소했다.
어쩌면 아이작의 등장 자체가 히야니스의 결정을 빠르게 앞당겼을 수도 있겠다.
아까부터 선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짐들이 어지럽게 실려 있던 것도 전투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후안 주교가 제대로 협력할 거라고 생각하나?”
히야니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후안 주교가 그런 의도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을 꺼내놓고 인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겠지요. 이미 배까지 출항했으니 말입니다. 살아서 돌아가려면 협력하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겁니다.”
“머리 썼군.”
“후안 주교에게 지금까지 바친 돈이 막대한데 돈값은 해야지요.”
사실 히야니스는 후안 주교보다 아이작에게 더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는 이미 에이단을 통해서 아이작에 대해 들은 상태였다. 아이작이 천사를 퇴치하고 고대신을 쓰러뜨렸으며, 무수한 전과와 업적을 이룬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것을.
성공에는 기세가 있다.
히야니스는 천사를 상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성배기사라면 기세를 타고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사악하고 타락한 천사가 인간 제물을 계속해서 요구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입니까? 이단 신앙이라는 이유로?”
아이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히야니스 선장은 의회의 결정 없이 독단으로 자기네 천사를 처단하러 떠나는 중인 거군. 배의 선원들은 모두 동의한 건가?”
“저뿐만이 아니라 저와 뜻이 맞는 배의 선장들은 모두 출항을 결정했습니다. 예정보다는 이른 결정이지만, 지금보다 나은 시기는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입니다. 제가 가장 빠르지만 뒤이어 배들이 따라올 겁니다.”
히야니스는 결연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제가 잘못되어 수장된다면, 저희가 인신 공양으로 바쳐진 제물인 셈 치기로 했습니다. 신도들이 익사자 왕에게 보복당하는 일이 생겨선 안 되니까요.”
“히야니스 선장님…….”
에이단은 감동한 듯 중얼거렸다.
그 역시도 졸지에 사지로 끌려오긴 했지만, 같은 배에 타고 있던 걸 보면 어느 정도 동감하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주교한테 말실수할 것이 두려워서 에이단에게 선장복을 입혀 일을 떠민 사람치고는 제법 용감한 태도군. 아니, 어떻게든 후안 주교를 배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랬던 건가?’
“익사자 왕이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원래대로라면 의회 밖에 발언해서는 안 될 정보다. 하지만 이미 의도를 드러내고 배까지 출발한 이상, 문제가 해결되거나 그들이 전부 죽기 전까지는 말이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히야니스는 목을 가다듬고 익사자 왕의 말을 옮겼다.
“익사할 자를 달라. 그의 피로 이 바다를 와인빛으로 물들여 신을 부를 목을 축이겠다. 소금에 절여질 자를 달라. 그의 육은 해풍 속에 신을 맞이할 성찬이 될 것이다.”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
아이작의 말에 히야니스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으음, 워낙에 고어(古語)가 많아 번역하고 윤문하느라 여기저기 달라진 구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제들과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검토한 결과 원문에 가장 일치하는 해석이긴 합니다.”
아이작은 그 말을 듣고서야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익사자 왕은 인신 공양을 요구한 게 아니다.”
아이작의 말에 복도 안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히야니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게 인신 공양을 요구한 게 아니라면 뭐란 말입니까?”
“그 말의 뜻은 의식을 수행할 사람 한 명을 찾아달라는 뜻이다. 다만 그 의식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미리 경고해주는 것이니, 충분한 신앙심으로 합의된 사람을 데려와 달라는 거지.”
아이작은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익사자 왕이…… 사투리가 어마어마하지, 아마.’
수백 년에 한 번 잠에서 깰까 말까 한 천사다.
사후세계를 통해 신도들과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지식도, 개념도, 말투도 수백에서 천여 년 가깝게 머물러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 고풍스러운 말투는 흡사 제물을 요구하는 기이한 고대신의 목소리처럼 들렸을 수도 있었다.
‘물론 죽을 수도 있는 임무에 투입될 사람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다만 그 임무란 소금 의회 신앙에서 가장 주요한 스토리라인이었다. 소금 의회를 선택한 플레이어에게는 익사자 왕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익사자 왕을 깨운 플레이어는 그를 도와주고 보상을 얻는다.
대단히 위험하지만 보상이 큰 퀘스트였기에 기억하고 있는데, 어째선지 그 스토리 퀘스트가 지금 당장 활성화된 것이다. 하지만 천사가 직접 사람을 사후세계로 보내 버리겠다고 하는 거니 언뜻 듣기에는 인신 공양과 다를 게 없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히야니스와 에이단은 서로 당황한 눈빛을 공유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군요’ 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이야기군요.”
히야니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그렇지만 성배기사님은 부외자입니다. 직접 익사자 왕이 내린 지령을 들은 것도 아니고, 소금 의회에서 토론에 참가하신 것도 아니지요. 의회 의원들이 다 같이 모여 전언을 분석하고 해석했는데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이해한다.”
아이작도 선선히 납득했다.
누구라도 갑자기 밖에서 온 사람이 너희들이 이때까지 생각하던 건 다 틀렸어! 라고 했을 때 넙죽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단체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히야니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눈치였다.
“그래도 만약 성배기사님의 말씀이 옳다면 이 문제는 온건하게 해결될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군요. 비록 그 죽을지도 모르는 의식이라는 것이 걸립니다만…….”
아이작의 말이 맞든, 맞지 않든 그들은 익사자 왕을 만나러 가야 했다.
익사자 왕이 제물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뜻이 와전된 것이라면 그걸 제대로 확인해야 했고, 반대라면 그때야말로 결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해석에 확신을 가졌다.
‘생각보다 싱겁게 해결될 수도 있겠군.’
어차피 아이작이 소금 의회를 움직이려던 것도 사실 이 ‘퀘스트’를 위해서였다. 엉겁결에 휘말리긴 했지만 속전속결로 진행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만 아주 사소한 의문은 남아있었다.
‘그런데 누가 익사자 왕을 깨운 거지?’
***
용맹한 연어 호는 순풍을 타고 금방 노르덴 항을 떠나 대양으로 나아갔다.
히야니스 선장이 말했던 대로 수평선 끄트머리에서 배 몇 척이 따라붙었다. 그 규모는 아이작이 예상했던 것보다 제법 많았는데, 아이작은 그 전부가 용맹한 연어호를 도와주러 따라오는 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저 중에 우리를 잡으러 오는 배는 몇 척이나 될 것 같나?”
아이작의 질문에 히야니스가 쓰게 웃었다.
“절반 정도는 될 것 같군요.”
“절반밖에? 그럼 나머지 절반은 우리를 도울 거라고?”
“아뇨. 나머지 절반 중 절반은 상황이 온건하게 해결되길 기대하다가 틀어지면 우리를 공격할 겁니다. 그래도 1/4 정도는 우리 편을 들지도 모르겠군요.”
그때 갑판 위로 후안 주교가 허겁지겁 올라왔다. 뒤에는 어린 사제가 금박을 씌운 상자를 양 옆구리에 낀 채로 뒤뚱뒤뚱 따라오고 있었다.
“자, 자자잠깐. 이게 무슨 일인가? 배가 왜 항구를 떠난 거지?”
후안에게선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히야니스가 꽤 독한 술을 제공한 것 같았다.
히야니스는 감사를 표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하며 대답했다.
“영광스럽게도 주교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사악한 괴물을 퇴치하러 가는 중입니다.”
“괴물? 잠깐만, 그 괴물? 설마 익사자 왕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히야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안은 창백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제발 아니라고 답해 주길 바라는 표정이었지만 아이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긍정했다.
후안은 잠시 휘청거리다가 난간을 짚었다. 어린 사제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아니, 이런 빌어먹을. 정말인가? 자기네 천사를 공격한다고? 이 미친놈들은 제 신이 소금 사막 아래 묻히니까 제정신도 같이 파묻혔나?”
아이작은 어쩌면 싸우지 않고 해결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해 주려다가 겁먹은 후안의 반응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히야니스 역시 아까 선장실에서 당당하게 돈 받아먹을 때와는 다르지 않냐고 따지지 않았다.
다만 아이작은 지나치게 자신감 없는 주교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천사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빛의 법전 주교 정도 되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준은 아니다. 설령 붉은 살점의 선지자라 해도 주교급은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다.
괜히 히야니스가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라고 생각하고 갑작스럽게 출항을 결정한 게 아닌 것이다.
히야니스 역시 그걸 생각한 건지 지적하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걱정이 지나치시군요. 후안 주교님. 이 배는 제법 무장을 잘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주교님도 계시고, 이미 천사 토벌 경험도 있는 성배기사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네놈들이 우릴 속인 게 문제잖나!”
“속이다니요. 저희는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대가도 이미 드렸구요.”
“정말로 익사자 왕을 토벌하러 갈 줄 알았으면 겨우 그 액수만 받진 않았지!”
액수가 문제였나? 아이작은 잠깐 할 말을 잃었지만 히야니스에게 속삭였다.
“가진 돈 더 없습니까?”
“소금 의회의 결정이 있었다면 모를까, 사실 이번에 드린 돈도 제 사재를 턴 것이라.”
“헛소리 말고 당장 배 돌려! 나는 이단의 천사 따위와 마주치고 싶지 않단 말이…….”
쿵. 후안이 뭐라고 또 소리 지르던 중, 갑작스러운 충돌음과 함께 배가 들썩였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멈추면서 숨을 죽였다.
후안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져서 새하얗게 보일 지경이 되었다.
“익사자 왕은 아닐 겁니다. 아직 도착하기에는…….”
콰직, 쿵!
히야니스는 말을 잇는 대신 서둘러 난간 쪽으로 달려가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는 수면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검은 형체들을 발견했다.
“어인 해적이다! 전원 전투 태세!”
***
“어인? 이곳이 원래 어인이 출몰하는 구역입니까?”
급히 전투 준비를 하려던 히야니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익사자 왕이 깨어난 상태이니 생태계가 뒤틀리는 것은 이상할 게 없지요.”
천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 생태계를 교란한다. 익사자 왕이 잠들어 있을 때에는 그 힘이 미약한데다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니 안정되어 있었지만,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자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뱃일을 하다 보면 어인 해적단을 만나는 건 종종 있는 일입니다. 선원들이 잘 대응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이게 익사자 왕이 우리를 공격하는 신호라면?”
후안 주교의 말이 이어졌지만 히야니스는 무시했다.
어인 무리는 빠르게 늘어나 어느새 수십의 무리가 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선원들은 어인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면서 활과 작살을 겨냥했다.
반면 어인들 역시 커다란 배를 공격할 만한 도구는 없었다.
그들도 물 위에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었지만, 섣불리 배에 올라탔다가 공격당하는 대신 더 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빙글빙글 돌던 어인들은 어느 순간 빠르게 추진력을 얻어 배를 향해 돌진했다. 돌진하는 어인들 뒤에 따라오는 거품을 본 선원들이 고함을 질렀다.
“놈들이 공성추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