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바다 깊은 곳에 (4)
“익사자 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으셨단 말입니까?”
히야니스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히야니스는 말문이 막힌 듯 버벅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가 배 위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히야니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는지, 용맹한 연어 호보다 훨씬 큰 배 한 척이 부딪칠 듯 다가왔다.
그 배 위에서 한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배는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가 일제히 갈고리를 던져 단숨에 용맹한 연어호를 붙잡았다. 선원들이 일제히 끌어당기는 밧줄 때문에 배가 비명을 질렀다. 해적질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히야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리를 지르던 구릿빛 피부의 여자가 갑판 위로 뛰어내렸다. 용맹한 연어 호의 선원들은 이미 그녀에 대해 잘 아는 듯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눈인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여자는 선원들을 무시하고 바로 히야니스를 향해 커틀라스를 뽑아 든 채 다가왔다.
“너 이 새끼, 거기 그대로 있어! 함부로 나대면 그 골통 분명 쪼개준다고 했지!”
“성배기사님, 소개해 드리지요. 이분이 소금 의회의 옌코스 하레 의장입니다.”
의장이라는 지위에 맞지 않는 제법 젊은 여자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지위가 허투루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 대학에서 온갖 학문을 섭렵하고, 대학원생이 되라는 제안을 마다한 채, 탐험에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다.
아이작은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옌코스는 성배기사라는 말에 흠칫한 듯했다. 히야니스는 일부러 옌코스더러 들으라고 소개의 말을 던진 것이다. 적당히 자중하라는 뜻에서 말이다. 성배기사 앞에서 인신 공양을 운운할 수는 없으니.
옌코스는 결국 히야니스 의도대로 한풀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씨근거리며 손을 내밀려다가 오른손에 커틀라스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검집에 넣었다.
“옌코스 하레요.”
“아이작 이사크레아입니다.”
아이작은 말투를 고민하다가 의장의 권위를 존중해서 존대를 했다. 옌코스는 팔짱을 낀 채 아이작을 위아래로 노려보았다.
“그래서 유명하신 성배기사 나으리, 이 비린내 나는 바다까지는 어쩐 일이신지? 아니, 아까 그 커다란 덩치를 보셨을 테니 숨기지도 못하겠군요. 혹시 우리 천사님께 용무가 있으신지?”
옌코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작이 인신 공양에 대해 안다면 가만둘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빛의 법전에서 한창 뜨고 있는 성배기사를 공격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게다가 아까 그가 바다 위에서 어인들을 썰어 넘기던 모습은 옌코스도 먼 거리에서나마 보았다.
아이작을 바다에 던져 버리기로 마음을 먹더라도, 절대로 쉬운 과정은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아이작은 그녀의 걱정을 좀 덜어 주기로 했다.
“익사자 왕이 인신 공양을 요구했다더군요.”
다만 그 전에 조금만 놀리고.
예상대로 옌코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했다.
그녀의 눈이 히야니스에게 향했다. 옌코스가 커틀라스로 히야니스의 머리통을 쪼개기 전에 아이작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실 인신 공양 요구가 아니라 오해일 거라고 추측됩니다. 그러니 히야니스 선장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지요.”
“오해라고?”
옌코스는 심해에 처박혔다가 건져 올려진 사람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감정 기복이 심한 표정을 감상하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집중적인 질문 공세에 시달릴 차례였다.
“오해라니, 잠깐. 그러면 익사자 왕이 한 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요? 우리도 최근에서야 해석이 끝났는데? 그 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오해였다고 추측되는 거지? 빛의 법전의 입장인 거요, 아니면 성배기사 당신의 개인적인 입장인 거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히야니스도 굉장히 궁금한 듯했다. 아이작은 질문을 하나로 요약해서 대답했다.
“저는 익사자 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대화를 해보죠.”
“고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고?”
옌코스의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말에 아이작은 대충 둘러댔다.
“고어를 공부해둔 적 있어서.”
“아니, 읽는 거라면 모를까 고어를 공부한다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
“옌코스 의장도 익사자 왕의 말을 해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대화가 아니라 해석이지! 글자를 읽는 거야 나도 실시간으로 읽고 쓰고 다 할 수 있어요. 글자를 읽는 방식은 몇백 몇천 년이 흘러도 바뀌지 않으니까. 하지만 천년 전 발음이나 억양으로 말하면 천년 전 사람이 아닌 바에야 알아듣는 건 추측만 가능하다고!”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하다못해 50년 전 사람만 해도 지금과 말투가 다르다. 조선시대 사람의 말투는 이삭이 살던 시대의 말투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하물며 천년 전, 그것도 천사가 사용하는 언어라면 어떨까.
즉, 어쩌면 아이작은 천사들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고어를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작은 결국 둘러대는 대신 신비주의로 포장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정까지 중요한 건 아니겠지요?”
어차피 눈앞에서 보여 주면 된다. 다만 아이작에 대한 신뢰가 문제였다.
아이작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옌코스는 더 따질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이작이 천사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래서 통역을 해준다면 그들은 이때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일방적인 계시를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앙의 사제들처럼 ‘대화’가 가능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옌코스가 넘어올 듯 말 듯하자 아이작은 떡밥을 하나 더 던지기로 했다.
“아까 익사자 왕이 한 말이 있으니 그것부터 번역해보도록 하지요. 그건 모두들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히야니스와 옌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에 우렁찬 목소리라서 멀리 있던 옌코스도 들은 목소리였다.
“어인들을 풀어주면서 저들은 불쌍한 자들이다, 라고 하더군요. 원문이 뭐였는지는 히야니스 선장과 선원들을 통해 알아보십시오.”
아이작은 그 말을 남겨 두고 떠나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익사자 왕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혹시 아십니까?”
***
불쌍한 자들.
천사가 몬스터나 다름없는 어인들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아이작은 그 사실이 못내 신경 쓰였다.
익사자 왕은 그 흉흉한 이름만큼이나 자상하거나 관대한 천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면 더더욱.
소금 의회가 과거 대제국을 이루던 시기, 그들이 그만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던 것은 익사자 왕의 흉흉한 행적 덕분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동질감인가? 어인들과 공감대를 느껴서?’
아이작이 옌코스에게 어인들이 왜 불쌍한 자들인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인들은 과거 인간이었던 자들이 고대신의 힘으로 아가미가 생기고 물갈퀴가 돋아난 부류라고 한다. 그들은 물속에서 살며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빛의 법전 시대 이후로 끊임없이 쇠퇴하여 지금은 대화조차 불가능한 괴물들이 되었다고.
어인과 소금 의회는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혐오했다.
익사자 왕은 어쩌면 이 유사한 역사에 동질감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금 의회는 몰락해 가고 있었고, 어인처럼 괴물이 되지는 않겠지만 평생 신을 잃은 채 살아갈 것이 거의 분명했기 때문에.
끼익.
문을 열자 객실에 앉아 있던 어린 사제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단검을 쥐고 있었다. 아이작은 왜 저러나 하다가 밖에 있는 배 때문에 그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잡으러 온 거 아니다. 칼 치워.”
상대가 아이작인 것을 확인한 어린 사제는 안도하며 주저앉듯 칼을 내려놓았다. 아이작은 후안 주교를 따라 ‘목소리’를 대신하는 이 어린 사제에게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안 주교가 먼저였다.
“주교님.”
후안 주교는 침대에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며 쌩쌩하게 ‘돈 버는 법’을 강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뱃멀미라도 하나?’
“자네도 내가 한심한가?”
아이작은 뭔 말인가 하다가 아까 그가 기적을 부탁받았을 때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아이작이 날뛰는 사이 배 위에 남겨진 후안은 자격지심 혹은 패배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하기야, 다들 주교의 기적을 기대하던 눈치였으니까.
아이작은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풀 죽은 모습을 보이자 뭔가 문제가 있나 싶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기적이 발동되지 않는 것은 의외로 발기부전만큼이나 흔했다. 강대한 기적일수록 그렇다. 신앙에 대한 흔들림이 온 것일 수도 있고, 뭔가 미운털이 박힌 것일 수도 있다. 헤사벨만 하더라도 그 귀한 핏줄을 머금고도 기적을 마음대로 못 쓸 때가 있지 않았나.
하지만 곧 아이작은 후안이 기도문조차 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안 주교님, 혹시 기적을 발휘하실 수 없으십니까?”
후안 주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단단히 마음먹은 듯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 바로 앉았다.
“……변명할 여지가 없군. 그래.”
기적을 못 쓰는 주교라니, 아이작은 말문이 막혔다.
주교는 빛의 법전의 수많은 사제들 중에서도 10명에 불과한 최상급 사제다. 교황 다음가는 자리인 만큼 막강한 기적과 은총이 보장되어 있었다.
“등하맹인이라더니, 정말 딱 맞는 표현이지. 안 그런가?”
아이작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빚어준 루앗딘 열쇠를 만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기적의 일종이 아니었던가?
“저, 그럼…….”
“루앗딘 열쇠 말인가? 그건 기적과는 다른 종류네. 모든 심판의 검은 사용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천상의 빛이 함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허물을 씌우고 있지. 그러다 자격 있는 자에게만 그 허물을 비틀어 약간 그 빛을 드러내는 것뿐이야.”
후안은 아이작의 당혹감을 인지한 듯 설명했다. 심판의 검을 루앗딘 열쇠로 바꾸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자격 문제라는 설명이었다. 당연히 주교인 후안에게는 자격이 있었다.
후안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촛대를 향해 손가락을 살짝 비볐다. 기도문도 없이 자연스럽게 불꽃이 피어오르며 초에 불이 붙었다. 기적을 아예 못 쓰는 것은 아니고 강력한 고위급 기적을 못 쓰는 것 같았다.
“내 위치정도 되니까 필요한 기적은 수행사제들이 대부분 다 알아서 하고,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의심하는 사람도 없더군. 다른 주교들이야 전쟁터나 재난 지역으로 파견되기도 하지만…… 나는 더 중요한 일을 맡곤 했으니.”
아이작은 후안이 돈벌이와 성인 지정 같은 ‘정치적인’ 일에 매진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할 만한 곳은 그런 곳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질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후안은 빛의 법전에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더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러면 이 인간 이제 쓸모없잖아.’
솔직히 늙은 할아버지의 자아 찾기와 퇴직 문제는 아이작이 알 바 아니었다.
문제는 아이작이 내심 든든한(?) 전력으로 생각하고 있던 후안 주교가 무능력 할아버지가 됐다는 점이었다. 바다 한복판에서 유사시 자신을 던져 버릴지도 모르는 선원들과 세상에서 제일 거대한 천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예상치도 못한 변수였다.
“……어째서 빛의 법전께서 내게서 기적을 거두어가신 것인지는 알 수 없네. 내 비록 타락하긴 하였으나 그건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없으면 조직은 건사하기도 힘들 것이건만…….”
“잠깐만요. 주교님. 혹시 이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습니까?”
“으, 응? 아, 아니. 일단은 이 방에 있는 우리뿐이군.”
아이작은 어린 사제를 돌아보았다. 입이 무거운 아이 같아서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일단 계속 조용히 하십시오. 이단 한복판에서 주교가 무능력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로울 게 없으니.”
“무, 무능력자?!”
아차.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은 것을 깨닫고 다급히 수습했다. 그는 후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까 그 일은 뱃멀미 때문에 그런 것으로 전달하겠습니다. 고작 물고기 따위를 잡느라 강대한 빛의 법전의 권능을 보일 수는 없으니, 사냥개인 저를 풀어 사냥했다고 하십시오. 사실 그게 맞지요! 이런 비린내 나는 일에 주교님께서 손을 쓰시는 게 맞습니까?”
“그런, 어, 그런가?”
“아까 그런 때에는 기적을 쓰실 수 있으시더라도 쓰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계속 빛의 법전 주교다운 권위를 보여주십시오. 지금은 당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이작의 웅변에 후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가진 카리스마는 이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모두가 존경하는, 선원들이 떠받드는 성배기사의 말은 후안에게 묘한 힘을 불어넣었다.
후안이 소심하게 되물었다.
“진짜 그런가?”
“물론입니다! 주교님이 천사나 교황님 앞에서 기죽으면 기죽었지 이런 뱃놈들 앞에서 기죽으셔야 되겠습니까?! 애초에 우릴 멋대로 끌고 온 놈들인데!”
“맞…… 다! 그것도 그렇다!”
“그렇습니다! 주교님 최고!”
***
‘힘들군.’
나이 일흔 가까이 먹은 노인네를 둥기둥기하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한 작업이었다.
아이작은 어인들을 썰어 넘기던 때보다 더 강한 피로감을 느끼며 갑판 위로 발을 옮겼다.
이제 그는 일흔 먹은 늙은이보다 더 늙은 존재를 상대해야 했다.
대략 최소 930년 이상 된 것을.
“익사자 왕, 대화 좀 해봅시다.”
아이작은 수면 밖으로 군청색 눈을 빛내는 익사자 왕과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