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익사자 왕 (4)
위기라는 본능이 이성을 장악한 순간, 익사자 왕은 천사로서의 위엄 대신 동물로서의 보호 본능을 발동하고 말았다.
쿠르르르르!
달려오던 아이작의 코앞으로 시커먼 먹물이 뿜어져 나왔다. 입에 닿는 것은 뭐든 다 물어뜯을 기세로 쏘아져 오던 아이작은 눈 앞을 가리는 먹물에 방향을 잃고 휘청였다.
익사자 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촉수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아이작은 정신없이 세계가 뒤집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빠른 수류가 그의 몸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익사자 왕의 거대한 촉수 주변으로 빠른 소용돌이가 휘감겨 있었다. 아이작의 몸은 거기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붉은 탄원을 사용해 흘려보내려는 시도도 의미가 없었다.
[고작 상처 좀 입혔다고 감히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자에게 대적하려 드느냐!]익사자 왕은 지독한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먹물을 뿜는 방법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지난 천년 동안 회피하거나 방어할 일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땅한 기적과 권능이 없는 대신 강한 육신과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이 있었다.
아이작이 입 안에 들어와서 뜯어간 살점 따위는 몇 초 걸리지 않아서 재생시켰을 정도였다. 아이작이 그깟 얄팍한 촉수로 자신의 다리에 흔적을 조금 남겨 봤자, 아무런 타격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하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그 촉수를 맞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움직였다.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익사자 왕은 자신이 나약해졌다고 생각하는 대신, 아이작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고 의심했다.
그만큼이나 아이작의 힘은 이질적이었다.
촉수가 순식간에 아이작을 옥죄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으깨 터뜨릴 것 같은 강한 힘이 사방에서 전해져왔다.
우득거리며 뼈마디 몇 개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뭐 하는 놈이냐! 어떻게 그 기적을 쓸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훔쳐 온 기적이냐?]익사자 왕은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네필림이니 기적을 훔쳤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익사자 왕을 향한 비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이작이 그를 향해 뭐라고 뻐끔거렸다.
익사자 왕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일어나고 있었다.
‘가엾은 놈, 지능마저 문어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익사자 왕은 문득 들려온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아이작이 말한 건가 했지만 물속에서 그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익사자 왕은 급히 주변에 다른 누군가 있는지 기척을 감지해보았다.
물속에 있는 것은 아이작과 자신, 그리고 어인들 뿐이었다.
‘문어는 포식자에게 쫓기면 먹물을 내뿜고, 그래도 붙잡힐 것 같으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가지. 그래도 다리를 자르고 도망치지 않은 게 다행이구나?’
‘이게 무슨?’
누군가 소곤소곤 그의 머릿속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묘하게 달콤하고 동시에 폐부를 저미는 듯 날카로워서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익사자 왕은 자신이 뿜어낸 시커먼 먹물로 가득한 바다 저편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해한다. 오랜 시간 심해에 처박혀 대화도 못 하고 신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노라면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기 마련이지.’
[닥쳐…… 닥쳐라!]‘사실 이미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천년이다. 너는 지금 천년 동안 신의 말씀도 듣지 못하고 우르반수스의 풍경도 들여다보지 못했지.’
부르르르르!
익사자 왕은 거칠게 촉수로 사방을 휘저었다. 스치기만 해도 어인들의 사지가 찢겨나갈 정도로 거센 물살이 바다를 휩쓸었다. 심해에서 끌려 올라온 흙먼지와 핏물이 그의 시야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네가 조바심을 느낀 것도 당연하구나. 무엇보다 너 스스로 네가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테니.’
목소리는 아플 정도로 그의 두려운 부분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말하는 것처럼.
‘오오, 심해에 처박힌 천사야. 두려웠느냐? 한때 위대했던 천사가 그저 전설 속의 괴물로 전락하는 것이? 그래서 반역하고 야만의 신이라도 되려 한 것이냐?’
[닥치라……!]순간 익사자 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단숨에 자신의 촉수 중 하나를 물어뜯어 끊어 버렸다. 맹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제야 물속에 섞여 있던 자신의 먹물 외에도 기이하게 일렁이는 이상한 색채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그 색채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이것도?’
익사자 왕은 자신이 환청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사를 홀릴 정도로 강력한 환청이라는 사실에 익사자 왕은 경악하며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의 촉수를 끊어 내고 풀려나온 아이작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띤 채 입 모양 만으로 말하고 있었다.
늦었어.
쩍. 순간 뭔가 익사자 왕의 몸을 강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온몸에 붉은 실금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야 익사자 왕은 자신이 뭘 놓쳤는지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위쪽, 수면으로 향했다.
***
히야니스는 떠오르기 시작한 핏빛 실루엣을 보면서 비로소 소리쳤다.
“낚았다!”
옌코스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히야니스가 저지르고 있는 일, 그리고 옌코스가 방관하고 있는 일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불경이었다. 하지만 천사의 반역을 가만히 지켜보고 찬동하는 것도 불경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둘 중 어떤 게 더 큰 죄고, 더 큰 여파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소금 의회의 성물로 소금 의회의 천사를 사로잡다니!”
“신께서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소금 의회의 성물, ‘어부왕의 그물’.
목표로 한 것은 무엇이든 사로잡을 수 있는 이 성물은 소금 의회 성물들 가운데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이자, 히야니스가 익사자 왕을 처치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심지어 익사자 왕과도 인연이 있는 성물이었는데, 익사자 왕이 아직 ‘어부왕’이라고 불리던 당시, 그의 익사체를 끌어올린 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닷속에서 익사한 그는 익사자 왕이라는 명천사로 되살아났다.
그랬던 성물이 이제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산채로 끌어올리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성배기사님은? 성배기사님은 무사하신 것 같나?”
옌코스가 초조하게 수면을 들여다보았지만 아이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깊이 가라앉았는지 익사자 왕도 떠오르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사실 이만한 시간이 지났다면 살아있기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요.”
히야니스는 어부왕의 그물 끝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부왕의 그물은 정말 그물이 아닌, 나무로 된 묵주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묵주 마디마디에는 형체도 없고 크기도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투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투망은 익사자 왕의 거대한 육신조차도 바다 위로 끌어올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어부왕의 그물은 대상을 끌어올리기만 할 뿐, 해치지는 못한다.
그다음부터 익사자 왕을 상대하는 것은 온전히 소금 의회의 몫이 될 것이다.
익사자 왕의 분노와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물이 올라올수록 그 사실을 선명하게 깨달으며, 옌코스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대로 준비했길 바란다.”
“뭐, 우리야 최선을 다했지요. 당신들이 문제지.”
“우리도 최선의 준비를 다하긴 했지. 익사자 왕을 상대할 무기들은 아니었지만.”
옌코스의 함대에는 히야니스의 함대를 상대할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역시 만만치 않은 무장이었다.
히야니스는 씩 웃으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꿨습니까?”
히야니스는 아이작이 빠지자마자 바로 어부왕의 그물을 가져와 의식을 시작했다. 옌코스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칼을 휘둘러 히야니스의 목이라도 따버리면 제지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히야니스의 천사 사냥에 동조한 셈이었다. 옌코스의 함대 또한 그녀의 결정을 따를 테니까.
옌코스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빌어먹을, 그러면 어떻게 해?! ‘어찌 됐든 신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최대한 버틴다’가 우리 의회 지침이었는데 저 빌어먹을 문어 새끼가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렸잖아!”
에이단을 인질로 잡은 것 또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엉겁결에 상황 유지를 위해 벌인 일에 가까웠다. 소금 의회 신도는 소금 의회의 천사를 일단 믿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빛의 법전 주교를 공격하고 성배기사를 바다에 빠뜨린 시점에서 중립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상황 유지’를 포기하고 기존에 결정된 의회의 결정 사항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서 익사자 왕이 패배한다면, 그의 패배 원인은 ‘일방적인 소통방식’이 될 것이다. 그가 차분하게 소금 의회를 설득했다면 감히 천사의 의견을 거절할 의원들은 없을 테니까.
“올라온다!”
부글거리며 바다 거품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히야니스는 그물에 낚여 올라오는 익사자 왕의 신체를 보면서, 신성 모독이라 판단될 수 있는 한마디를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월척이다!”
***
콰아아아아아…….
바닷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폭포수처럼 울려 퍼졌다. 몸에 품고 있던 물이 흘러내릴 뿐인데도 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익사자 왕의 거체가 올라온 것만으로도 배들이 휘청거리면서 가랑잎처럼 흔들거렸다.
예상보다 거대한 익사자 왕의 거체에 히야니스를 비롯한 선원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 모두 익사자 왕의 몸 일부만을 봐 왔을 뿐, 수면 아래 얼마나 거대한 몸이 있을지는 상상만 해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초월하는 몸에 그들 모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그 사이 아이작은 수면 밖으로 물을 박차고 올라왔다. 소용돌이가 사라지자 물 밖으로 탈출하는 것은 쉬웠다.
“성배기사님!”
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본 히야니스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익사하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었음에도 아이작은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였다. 그는 오히려 손짓을 보내며 히야니스에게 자기 일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상대는 천사였다. 한눈팔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저런 거체를 드러내고도 여전히 몸 일부가 물에 잠겨있는 익사자 왕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 수십 척의 배들을 다 합쳐도 익사자 왕보다 작을 거 같은데.’
저 거대한 몸이 허공에 매달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장관이었다.
아이작은 새삼 히야니스의 계획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익사자 왕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익사자 왕은 당연히 이 성물을 주의하고 있었다. 히야니스가 어부왕의 그물을 가져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를 먼저 제거하려고 했던 것인데, 상황이 꼬이고 갑자기 전투가 벌어지면서 아이작에게 먼저 신경 쓰다가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그의 촉수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물 속에 촉수 상당수가 뒤엉켜 있었으나 뼈가 없는 유연한 몸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그물 밖으로 빠져나온 촉수가 수면을 긁었다.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파도가 일어나면서 주위에 있던 배 한 척을 그대로 뒤집어 버렸다. 선원들이 비명 지르며 뛰어내렸다.
압도적인 위력에 히야니스는 몸을 경직시켰다.
[당장 이걸 풀어라, 사제.]이것은 경고였다. 바다를 가를 것이 아니라 배를 내려쳤으면 단숨에 배에 있던 선원들 전부가 전멸했을 테니까.
하지만 히야니스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포경 작살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