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익사자 왕 (6)
“빛이시여, 제발 제 앞길에 드리워진 그늘을 거둬주시고…….”
갑판 아래 선실에 틀어박힌 후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까 배 수십 척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산산이 부서지던 참상이 잊히지 않았다. 귀를 먹먹하게 만들던 굉음과 허공에서 난파당하는 배들, 흩날리던 사람들의 조각들이 눈만 감으면 떠오를 듯 선했다.
후안은 이미 천사가 발휘할 수 있는 힘 앞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무력감.
이 거대한 존재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기적이 다시 주어진다면, 신의 도움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아이작을 지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돈 세는 재주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벌벌 떨면서 지금 이 곤경에서 벗어나길 기도하는 것 외에는.
‘어째서?’
입으로는 기도문을 읊고 있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기도에서 대답을 들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그는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불합리한 비극에 항의하고 있었다.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신은 응당 인간에게 극복 가능한 시련만을 내린다. 하지만 후안은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그저 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그 시련에 맞서기 위해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라면.
후안은 불현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짙은 구름이 낀 하늘에선 폭풍우가 치고 있었고, 그 아래 익사자 왕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은 것처럼 거대했다.
후안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출렁이는 파도 사이로 촛불처럼 가늘게 타오르는 불꽃을 발견한 것이다.
‘설마?’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갑판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던 풀 죽은 모습의 어린 사제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용맹한 연어 호는 익사자 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충분히 다행이었지만, 후안은 이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분명 아까 바다 밖으로 나왔던 아이작이 없었다.
“이사크레아 경은?”
뚫어지게 바다 저편을 바라보고 있던 히야니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은 어디 있나?”
히야니스는 말없이 바다 저편을 가리켰다.
폭풍우 한가운데, 익사자 왕의 거대한 몸 아래 초라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후안은 그 모습을 뚫어지라 지켜보았다.
“아이작.”
그가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배기사.”
***
익사자 왕은 아이작의 선언을 듣고 한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자신에게 설득당했을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천사는 이미 생전의 힘과 믿음, 업적을 신에게 인정받은 존재인 만큼, 말로 설득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다. 그저 아이작은 자신이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다독이듯 알려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익사자 왕은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익사자 왕을 보면서 놀랐다. 천사가 생각을 바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익사자 왕은 이미 격렬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아이작의 말은 오히려 그가 천 년간 지켜온 법칙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동조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을 향해 촉수를 내뻗었다.
말과 행동이 달랐지만 아이작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파도 위를 내달렸다.
콰드드득, 쩍.
충돌하기 직전, 아이작은 몸을 빠르게 허공으로 튕기면서 왼손을 익사자 왕의 다리에 꽂아 넣었다. 엄청난 공기 압력이 아이작을 짓눌렀다.
아이작은 그대로 튕겨 나가는 대신 다리에 매달려 내부로 촉수를 깊이 꽂아 넣었다,
순간 머리 위로 닥쳐온 촉수에 아이작은 급히 빠져나와야 했다.
[기생충처럼 굴지 말고 칼을 뽑아라. 아이작.]익사자 왕은 이번에도 아이작이 자신의 살점 일부를 포식한 것을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지상에서 살았다면 모기 같다고 했을 테지만, 그는 이미 그런 추억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뭐,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아.”
푸우웃! 익사자 왕은 이제 체면 따위 가리지 않고 먹물을 뿜었다. 시커먼 안개처럼 분사된 먹물이 아이작의 시야를 순식간에 가렸다. 단순히 가리는 수준을 넘어서 아이작의 몸 전체를 먹물이 뒤덮자, 아이작은 아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먹물 안개 속에서 찢어지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아이작은 그의 몸을 단숨에 박살 낼 수 있는 촉수들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슬슬 충분하겠군.’
아이작은 온몸에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순간 어두운 먹물 속에서 익사자 왕의 몸과 다리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금 바로 아래에서 솟구치는 다리가 진짜라는 것도.
파아아앙! 아이작이 몸을 뒤로 튕긴 순간 바닷물이 터지면서 익사자 왕의 다리가 튀어나왔다.
익사자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작이 날랜 동작을 몇 번 보여 주긴 했지만 이번 만큼은 예상 밖의 움직임이었다.
놀라움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아이작은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 속에서도 마치 익사자 왕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반응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리와 다리의 움직임이 서로를 방해하게끔 교묘하게 동선을 꼬면서 움직였다.
익사자 왕은 그런 아이작의 동선에 묘한 초조함을 느끼며 다그쳤다.
[네가 질서를 관철시키고 싶다면, 그 추악한 촉수를 치우고 칼을 뽑으라고!]‘지도 촉수를 휘두르고 있으면서…… 하지만 역시 느려졌어.’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건재한 척하지만, 그것은 외형만 그럴 뿐 실제로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금 의회의 공격에 당한 것뿐만 아니라 어부왕의 그물을 강제로 파괴한 것이 그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이 분명했다.
어부왕의 그물은 익사자 왕 본인에서 비롯한 유물이다. 그것을 스스로 부순 것은 자신의 근본을 부수는 자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작이 이때까지 차곡차곡 안배해 온 준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움직임에서 빈틈을 파악했다.
그의 키 높이만큼 넘실거리는 파도 사이, 위협적으로 수면을 스치는 촉수들 틈새에서 아이작은 파고들 간격을 발견했다.
익사자 왕의 유일한 약점, 군청색으로 빛나는 여덟 개의 눈으로 다가갈 틈새였다.
아이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익사자 왕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네 놈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지.]그 순간, 아이작이 향하던 동선 앞으로 거대한 수류가 생겨났다. 어쨌든 해수면을 박차면서 달릴 수밖에 없는 아이작을 끌어들이는 함정이었다.
그 빈틈은 익사자 왕이 일부러 열어놓은 간격이었다. 아이작이 어떻게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피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천사가 아닌 이상 체력이 무한할 리가 없다.
소금 의회의 배들이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전에 끝장을 보려 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아이작에게 빈틈을 열어준 것이다.
맨손으로 벌레를 잡는 것보다는 가둬 놓고 잡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
[끝까지 칼을 안 뽑고 기생충처럼 굴겠다면, 기생충처럼 대우해주는 수밖에.]익사자 왕은 거대한 입을 벌리고 아이작을 빨아들일 준비를 했다. 동시에 촉수들이 아이작을 단숨에 후려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오히려 더 빠르게 파고들었다.
‘무슨?’
익사자 왕의 촉수는 허무하게 수면을 때렸다. 동시에, 그는 기묘하게 세상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몸 상태를 들여다보고 경악했다.
몸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가득했다.
아이작이 이때까지 익사자 왕의 몸 안에 심어놓았던 저 너머의 기생충들이었다.
[저 너머의 기생충 / 촉수에 닿은 상대의 살갗 아래 짧은 수명을 가진 기생충을 낳습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대상은 지속적인 고통을 입습니다.]기생충들은 숙주의 능력을 따라 빠르고 강하게 성장한다. 고대신의 사체에서 자라난 지힐렛은 가장 유능한 부하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익사자 왕의 몸 안에는 그런 기생충들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이미 몸 안에 기생충을 가득 품은 거대한 덩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 보내는 익사자 왕이 몸 안의 기생충까지 일일이 신경 쓸 일 따윈 없으니까.
아이작은 이때까지 놈들이 보내는 기척을 통해 익사자 왕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가게끔 통제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놈들은 일시적으로 익사자 왕의 시신경 일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익사자 왕이 만든 함정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초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만들어놓은 수류를 타고 너무나도 손쉽게 그의 미간까지 접근했다.
그가 미처 대응하기 전에, 아이작의 왼손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단숨에 익사자 왕의 군청색 눈을 관통했다. 익사자 왕의 분노 어린 고함 속에서, 그의 머리 위에 착지한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다신 기생충을 비웃지 말도록.”
***
“저게 대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고함이 바다 위에 울려 퍼지자 돛이 파르르 떨려왔다. 선원들은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다 저편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먼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검은 먹물 안개 속에서 익사자 왕의 거대한 몸 위로 종횡무진하는 선명한 주홍 불빛이 아이작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그들은 숨죽여 전투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터져 나온 익사자 왕의 분노에 찬 고함에 자신도 모르게 떨면서 기도를 올렸다.
“과장이 아니었군.”
옌코스의 중얼거림에 히야니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소문은 흔히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위업은 현실이었다.
배 수십 척을 박살 낸 익사자 왕이 단 한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옛날의 엘릴이나 저랬을까. 대체 어떻게 저런…….’
반면, 후안은 그 모습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후안이 느끼는 감상 또한 소금 의회 신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빛의 법전이 내린 권능과 기적을 믿고,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퇴치했다는 것 역시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의미 자체보다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할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결국 장사치의 논리를 아이작에게 들이댄 것이다.
‘빛의 법전이시여, 제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후안은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 고결한 성배기사에게 돈이나 영지, 권력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저 숭고한 빛의 질서를 이 땅에 바로 세우는 것만이 중요할 뿐. 오히려 영지를 준 것은 저 성배기사, 아니, 성자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후안은 자신이 아이작 앞에서 얼마나 천박해 보였을지 생각하며 흐느꼈다.
자신이 기적을 빼앗긴 것도, 이런 수치를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때, 고개를 떨구고 있던 후안의 귓가에 선원들의 안타까운 탄성이 들려왔다. 후안은 고개를 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았다.
바다 너머, 거대한 촉수에 사로잡힌 루앗딘 열쇠가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는 것이 보였다.
***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몸에 촉수를 꽂아 넣은 채 그 성스러운 육체와 영혼을 탐식하기 시작했다. 천사의 육체답게 격한 전투로 소모되었던 공복감이 해소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익사자 왕의 핵을 노려 포식하려던 순간, 그는 뭔가 기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퍼퍼퍼퍽! 경고성 섞인 알림이 들린 순간,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몸 안에 있던 기생충들이 싸그리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 안에 있던 기생충을 단 한 순간에 힘을 집중한 걸로 모조리 전멸시킨 것이다.
“미친…….”
황급히 손을 떼고 다시 전투를 준비하려 했지만, 익사자 왕은 눈을 일그러뜨리고 아이작의 손을 움켜쥐었다. 익사자 왕에게는 눈꺼풀 힘만으로도 아이작의 손을 구속할 힘이 있었다.
그 사이 거대한 촉수들이 아이작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네가 정말 천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아이작은 익사자 왕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경악했다.
약해졌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익사자 왕은 그저 계속 힘 대부분을 아껴 왔을 뿐이었다. 놈은 신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그는 아이작과 싸우면서 힘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비축해 둬야 했다.
이제 그는 비축했던 힘마저 쓰기로 한 것이다.
[신앙을 가진 자는 기적을 일으키지. 네가 칼을 썼다면, 계속 숭고한 성배기사인 척 위선을 떨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르겠군.]익사자 왕은 아이작의 몸을 촉수로 단숨에 휘감았다. 이번에는 죽지 않게 배려하는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거대한 배를 단숨에 한 줌으로 으깨버리는 완력이 아이작을 휘감았다.
아이작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루앗딘 열쇠의 열기가 희미해지다 이내 스러지고 말았다.
우드드득.
힘을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섬뜩한 소리가 촉수 안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익사자 왕은 또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에는 승리의 포효도, 분노의 고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