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우르반수스 (1)
‘칼을 쓰라고 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루앗딘 열쇠.
익사자 왕은 계속해서 아이작에게 칼을 쓰라며 집착하고 있었다. 문득 아이작은 자신이 든 칼이 ‘루앗딘 열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칼은 내부와 외부를 여는 열쇠다.
익사자 왕은 아이작을 문 너머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쩌어어어억.
루앗딘 열쇠가 꽂힌 자리의 상처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 안에서 진홍색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루앗딘 열쇠가 사실상 익사자 왕의 몸을 실시간으로 익혀 버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피는 익사자 왕의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너머, 어딘가에서 흘러넘쳐 오는 것이었다.
‘설마.’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달우물 의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것이 매장된 신을 부르기 위한 사실상 유일한 방법임에도.
물론 신의 허락 없이 사후세계에 들어서는 것은 무단침입에 가깝다. 때문에 익사자 왕은 통행자를 안전하게 보낼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데다, 천 년이나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아이작. 너를 시험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루앗딘 열쇠가 익사자 왕에게 남긴 상처는 그의 몸을 더욱 길게 찢으며 벌렸다. 그러나 익사자 왕은 꺼져가는 물거품처럼 쇠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너를 나의 신 앞에 내려놓기 전에…… 네가 그저 혼돈의 노리개가 아니라는 것을 믿을 용기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아다오.]‘용기? 얼어 죽을 용기…….’
아이작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압력으로 입조차 열기 힘들었다.
[너는 이 세계가 수만 년에 천년을 더해 지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지.]아이작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익사자 왕은 그냥 무시했다고 생각했던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아이작을 문 너머로 보내는 이유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영속성을 나처럼 너 또한 바랄 것이라고 믿는다.]익사자 왕은 흐느끼는 것인지 애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금 의회의 구원이나 보호를 당부하는 것도 아닌, 엉뚱한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거대한 폭포수가 되어 아이작을 덮쳤다.
핏물로 바다가 보라색 와인빛으로 젖어 갔다. 주변의 어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묘한 찬송가를 불렀다.
루앗딘 열쇠가 피워 올린 열기가 바닷물을 증발시키면서, 아이작의 몸 곳곳에 소금 결정이 맺혔다.
상처는 크게 벌어져서 익사자 왕의 몸을 완전히 절반으로 쪼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보다 거대한 풍경이 그 너머에 있었다.
***
찰박.
아이작은 아득히 새하얀 풍경 속에서 눈을 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선혈에 와인빛으로 물들던 바다, 하늘이 무너질 듯 몰아닥치던 폭풍우와 거친 풍랑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눈이 멀 것 같은 새하얀 지평선이 아득하게 멀리 펼쳐질 뿐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너무나 거대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피라미드 위에는 마치 꼭대기에 걸린 듯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형태는 기묘했다. 어딘가에는 붉은 강이 흐르기도 하고, 어딘가에는 부서진 파편들이 둥둥 떠 있기도 했다. 갈라진 틈새 사이로 맹렬한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여기가…… 소금 의회의 천국인가?’
아이작은 자신의 팔다리가 다 달려 있고 갑옷과 칼까지 다 제대로 있는 것을 보고 달우물 의식이 성공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기사 천사가 스스로의 몸을 바쳐 신중하게 거행한 의식이다. 실패할 리가 없다.
아이작은 역사상 산 육신을 가지고 사후세계에 도달한 극소수의 인간이 된 것이다.
바닥에 얕게 고인 물 아래에는 하얀 소금 알갱이들이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아이작은 거대한 염전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종교 이름이 소금 의회라지만 천국까지 염전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아이작이 생각하던 중, 머리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스륵.
아이작은 자신의 키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 접근 중인 작은 나룻배를 발견했다. 그 위에서 뱃사공인 듯한, 약간 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아이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는데 그게 제법 흉악해 보였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배를 자연스럽게 아래쪽으로 몰더니, 가까이 붙였다.
“타라.”
“내가 누군 줄 알고?”
사공은 뚱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솔직히 그 유명한 ‘저세상으로 가는 배’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바로 그 저세상에 도착한 상태였다. 심지어 저 사공은 천사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이러나저러나 지금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는 없었다.
“지금 거기보다는 배 안이 안전할 테니 타라.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아이작은 그 말에 넙죽 배 위로 올라갔다.
사후세계에는 신수며 천사며 어쩌면 귀신 같은 것들까지, 별로 반갑지 않은 것들이 드글거린다. 소금 의회 신도도 아닌 아이작은 그것들과 불필요하게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부터 소금 의회의 천사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네필림인 건 둘째치고,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라는 것까지 들키면 곤란할 거 같은데.’
들키게 된다면 절대 환대받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배 위에 올라탄 참이었다. 아이작은 이다음 어떻게 되든 지금은 운과 임기응변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공이 긴 노를 저어 땅을 툭 밀치자, 배는 중력이 없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이작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더 높은 곳에서 이 염전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는 광활한 소금 사막뿐,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왜 위험한 거죠?”
“그것도 모르나? 당신네 선지자가 여기 무슨 짓을 했는지도 잊었나?”
아이작은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사공을 바라보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 반나절만 있어도 수분을 다 뺏기고 바싹 마른 소금 기둥이 될 거다. 그러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내리던가.”
당연히 아이작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공의 말에서 뭔가 익숙한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루앗딘이 바다를 소금 사막으로 만든 이야기를 하는 건가?’
생각해보니 지금 이곳도 염전이라기보다는 소금 사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루앗딘이 소금 사막을 만든 것은 현실에서의 일이다.
자신은 사후세계에 온 것이 아니었나?
아이작이 복잡한 생각에 빠진 사이, 배는 빠르게 움직였다. 주변에 배경이랄 게 없어서 실감하지 못했지만,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였다.
“다 왔다. 내릴 준비 해라.”
아이작은 퍼뜩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금 사막과 진짜 사막이 접한 중간에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도시가 있었다. 거대한 항구였다.
수백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을 법한 거대한 항구였지만, 그 앞은 새하얀 소금 사막뿐이었다. 왜 생뚱맞게 사막에 항구를 지어 놨나 했지만, 아이작은 부두로 보이는 조형물 사이사이에 튀어나온 것들을 보고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항구 주변 사이사이에 돛대나 배의 선체 일부가 묘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가라앉다 말고 그대로 소금에 파묻혀 버린 듯한 모습에서 아이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선원들도 빠져나올 틈이 없었을 것이다. 바다가 순식간에 소금으로 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부두 일대가 배들의 매장지로 변해 버린 것이다.
툭. 사공의 나룻배가 부두 바닥에 닿았다.
아이작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황량했다. 항구 도시가 말라붙어 버렸으니 주민들도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을 것이다. 많은 주민들이 떠났고, 남은 주민 몇몇도 초췌한 안색으로 주변을 배회할 뿐이었다.
너무 현실적이다.
아이작은 아까부터 드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여긴 사후세계가 아닙니까?”
아이작은 결국 자신보다 먼저 앞서가던 사공에게 물었다.
“맞다.”
“그럼 여긴 소금 의회의 지옥입니까?”
사공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르반수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사후세계에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모르나?”
“죽은 사람들이 오는 곳 아닙니까?”
“그렇다. 죽은 사람들. 흘러간 시간들이지. 우르반수스는 누적된 모든 과거다. 지나간 시간. 죽은 시간. 지층을 이룬 과거. 죽은 자들은 그 찰나의 틈새에 끼워 넣어질 뿐.”
아이작은 사공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득 에이단이 사후세계에 대해 설명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사후세계는 모든 문화, 도덕, 예절, 규범 등을 총망라한 공간이라고.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비슷한 말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풍경과 사공이 해준 말을 되새겨 보자, 그 정확한 의미가 비로소 와닿았다.
지금 눈앞의 풍경은 정말로 있었던 순간이다.
루앗딘이 소금 의회를 매장해 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
아이작은 그 시간의 기억에 도착한 것이다.
***
사공이 안내해 도착한 곳은 소금 사막에 거의 파묻힌 배였다. 기울어진 갑판 아래로 들어가자 소금이 절반쯤 들어차 있었다. 아무래도 침몰 도중에 소금이 굳어 버린 듯했다.
덕분에 아이작은 허리를 반쯤 숙이고 걸어야 했다.
사공이 안내한 곳은 선장실이었다.
문을 열자 몸이 반쯤 파묻힌 늙은 여자가 보였다.
“아…… 손님이 오셨군.”
늙은 여자는 아이작이 들어오자마자 눈빛을 번뜩였다.
초췌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빛깔로 번뜩이는 안광을 보자마자 아이작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후세계에 평범한 인간이 있기야 할까 싶지마는, 그녀에게서는 특히나 말도 안 되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익사자 왕을 압도하는 힘이었다.
“앉아서 맞이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아이작 이사크레아. 지금 내 꼴이 이래 놔서.”
아이작은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사공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던가. 달우물 의식이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한 것이 분명했다.
“앉아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아이작은 무릎의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벽을 짚으며 말했다.
“……혹시 당신이 소금 의회의 신이십니까?”
늙은 여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호쾌한 웃음소리에 아이작은 자신이 섣불리 판단했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나를 그렇게 대단하게 봐 줘서 고맙군. 하지만 너무 크게 말하지는 마시오. 부르는 자께서는 너무 쇠약해져서 의심이 많아지셨으니.”
‘부르는 자’는 쉽게 호명되지 않는 소금 의회의 신의 명칭이다. 특히나 소금 사막 아래 매장된 뒤로는 신도들조차 조롱처럼 여겨 거의 언급하지 않는 명칭이었다.
늙은 여자는 자신의 허리 아래, 뿌리처럼 자리 잡은 몸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아문달라스.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않기로 결정했던 선장이지. 지금 소금 의회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자, 가라앉는 배에 남은 선장이오.”
***
사공은 자신을 아문달라스 선장이라고 밝힌 여자와 아이작을 내버려 두고 나갔다.
단순히 선장이라고만 말했지만, 아이작은 그녀가 명천사임을 확신했다.
‘역시 루앗딘을 배신하고 배에 태우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욕심 많은 선장들의 독단이 아니라…… 신이 개입한 결과였나?’
그렇다면 이야기의 앞뒤가 많이 바뀌게 된다.
신이 단순히 금 몇 푼을 착취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는 없으므로.
결국 설화는 인간의 욕심에 관한 이야기에서 당대 강력했던 신과 새롭게 떠오른 신의 대립으로 바뀐다. 한 종교의 몰락과 다른 한 종교의 부흥에 대한.
“역시 부르는 자는 빛의 법전을 견제하기 위해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소. 루앗딘을 안전하게 데려다줬더니 빛의 법전이 너무 강대하게 번창했거든. 그것이 부르는 자께서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거부하셨소. 하지만 알다시피 결과는 더 최악이 되고 만 데다, 돌이킬 기회조차 잃었지.”
아이작은 아문달라스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돌이킬 기회?
‘루앗딘을 태웠을 때의 미래를 예지했다는 뜻인가? 그 선택을 부정한 결과가 지금 소금 의회의 꼴이고?’
마치 예지나 회귀를 암시하는 듯한 말이었기에, 아이작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의문을 눈치챈 듯 아문달라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했다.
“흠, 전해 들은 그대로군. 우르반수스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 아니면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잃어버린 기억도 없고, 아예 들은 바가 없는데요.”
아이작은 그렇게 말했다가 에이단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제 지인은 우르반수스가 사람을 지배하는 집단무의식 비슷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지금 이곳의 풍경은…… 과거의 어떤 시간선에 온 것 같은 풍경이군요.”
아문달라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친구는 정확하게 말해줬소.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려면…… 역시 이 방법이 좋겠지.”
그녀는 손톱으로 끼적끼적 소금이 말라붙은 바닥을 긁어 선을 긋기 시작했다. 파도에 출렁이는 배와 작열하는 태양의 모습이었다. 낙서 같은 그림체였음에도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한 생생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아이작이 그 그림을 뚫어져라 보던 사이, 아문달라스가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당신은 배 위에 있소.”
순간 아이작은 배 위에 서 있었다.
‘무슨?’
눈이 아플 정도로 태양이 내리쬐는 날씨였다.
아이작은 햇볕을 가리려다가 자신이 원래 입고 있던 갑옷이 아니라 꽤 오래된, 그리스나 이집트 느낌의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는 수백 척의 배들이 도열해서 한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배들이 향한 방향, 항구로 향했다.
새파란 바다 건너 항구에 서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온몸이 불길로 활활 타오르는 창백한 표정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 남자를 본 순간, 아이작은 단번에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하나를 떠올렸다.
‘등대지기 루앗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