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우르반수스 (2)
등대지기 루앗딘.
지금 빛의 법전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신앙으로 만든 인물이자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떨치고 있는 명천사. 그가 눈앞에 있었다.
루앗딘 주변에는 그를 추종하는 세력인지 난민인지 알 수 없는 인파들이 바글바글 서서 배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피워올리고 있는 불꽃은 주변의 키 큰 나무들만큼이나 높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열기가 없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 난민들이 바글바글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약간 화가 난 남자 한 명이 있소.”
그때 아문달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어느새 바로 옆에 아문달라스가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만 그녀는 소금에 파묻혀 있지도, 염분으로 몸이 깡마르지도 않은,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가진 노련한 베테랑 해군 장교의 모습이었다.
“왜 저 남자가 화가 났는지 맞춰 보시겠소?”
반면 아이작은 계급이 낮은 듯한 수병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손에 쥔 창 자루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당신이 루앗딘과 저 난민들을 태워주기로 해놓고서 안 태워줬기 때문에?”
“그렇소. 저자는 이미 많은 금을 지불했거든. 인제 와서 다른 배를 구할 수도 없지. 게다가 뒤에서는 저들을 노리는 악당들이 잔뜩 쫓아오고 있고.”
아문달라스는 팔짱을 낀 채 루앗딘을 마주 보았다. 자신의 교단을 망가뜨린 숙적을 이토록 생생하게 보면서도 그녀는 별 비틀린 반응 없이 상쾌한 모습이었다.
마치 비극이 일어난 그날처럼.
루앗딘은 하늘을 응시하더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난민들도 다 같이 무릎 꿇거나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배 위의 수병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다 같이 비웃거나 코웃음 쳤다.
‘이 시대에는 기적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모양이지?’
아이작의 시대에 주교가 아니라 사제라도 저렇게 기도만 올리고 있었다면, 병사들은 발작하면서 활시위를 당기거나 우리 사제는 지금 기적도 안 쓰고 뭐 하냐고 다그치고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저런 뚜렷한 성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절망에나 빠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이 수병들의 모습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불현듯, 루앗딘은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순간 그의 몸에서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빠져나왔다.
그것을 본 아이작과 수병들은 숨을 멈췄다.
이글거리며 솟아오른 불꽃은 순식간에 항구 도시 위에 자리를 잡고 태양이 되었다.
아이작은 그 열기와 광채에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태양을 코앞에서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피부가 새빨갛게 익으면서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아이작만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닌 듯 주변 모두가 비명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갑자기 모든 고통이 멎었다.
태양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아문달라스가 아이작의 감각을 차단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작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 참상을 똑바로 보게 하기 위해서다.
아문달라스가 손을 들어 물로 된 막을 펼쳤다. 그러나 그마저도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다가 말라버렸다. 다들 그늘을 찾아 달아나기 바빴고, 그마저도 눈이 멀어 버린 선원들은 도망조차 갈 수 없었다.
사방이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은 불 속에서 화형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길고 잔인했다.
불타 죽기에는 애매하게 약하고, 살아남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내리쬐는 열기에 바다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기름을 싣고 있던 배가 폭발하며 사방에 기름 비를 흩뿌렸다.
이 정도면 난민들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빛은 오로지 바다만을 향했다.
얼마나 광량이 차이가 나는지 같은 태양을 머리에 이고도 루앗딘과 그 주변이 그늘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보시오, 아이작. 진리와 질서를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난 선지자가 만들어낸 역사적인 첫 번째 대학살 현장이니.”
아이작은 그 참상이 끔찍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러면 약속을 지키지 그랬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결국 이 참상은 소금 의회가 계약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아문달라스는 이번에도 아이작의 속내를 안다는 듯 웃었다.
“애당초 당신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일 아니냐……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테이프를 감듯 시간이 마치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주변은 아이작이 익히 아는 풍경이 되었다. 원래 번창한 항구도시였던 이곳은 배들은 모조리 침몰하거나 소금 사막 아래 매장되고, 죽은 도시가 되었다.
루앗딘은 그대로 말라붙은 소금 사막을 걸어서 횡단해 바다 너머 땅으로 향했다.
지금의 게르토니아 제국이 있는 땅으로.
아문달라스는 소금 사막을 건너가는 루앗딘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후로 루앗딘은 빛의 법전 신앙을 저 바다 너머에 퍼뜨리고 많은 제왕들과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대제국을 키워나갔소. 그 역사적인 등장에 소금 사막의 일화는 반드시 회자되곤 하지.”
그녀는 메마른 소금 사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우리는 그때 약속을 지켰소.”
***
“약속을 지켰었다니요? 저 불바다가 약속이었단 말입니까?”
“아니, 루앗딘을 배에 태웠었다는 말이지. 우리는 ‘원래’ 루앗딘과 그의 난민들을 배에 태워다줬소. 그것이 진짜 역사요. 그런데 그 결과가 부르는 자께서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다가 힘없이 떨어뜨렸다.
“아쉽지만 이건 ‘보여줄 수’ 없겠군. 이제는 지워진 역사라서.”
아이작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며 아문달라스를 바라보았다.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을 보면서 좀 더 설명해야겠다고 느낀 건지 말을 이었다.
“루앗딘이 우리의 성역이자 항구 도시, 미아르마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를 태우거나, 무시하거나. 우리는 루앗딘을 배에 태워서 바다 너머로 보내줬지. 그랬더니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뭐…… 잘됐겠지요.”
지금 루앗딘이 보여 준 묘기를 보아하니 소금 사막을 만드는 기적이 있건 없건 굉장한 교단을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는 여전히 명성을 떨치는 최고의 명천사 아닌가. 루앗딘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신앙에 비견될는지도 모른다.
“그래. 결과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소. 대제국을 세우고, 수많은 권속 국가들을 빛의 법전 이름으로 물들였지. 우리 교단은 그 대가로 우르반수스에 입성하여 아홉 신앙이 되는 복을 누렸지만, 상대적으로 세력에 눌려 쇠퇴하는 길을 걸었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아문달라스가 말하는 과거에는 소금 사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과 신도들의 소통도 원활했을 테고, 천사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부르는 자께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소. 그리고 나를 비롯해 많은 천사들 또한, 그때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말고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고 생각했소.”
“설마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아니? 무슨 엉뚱한 소리요.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오?”
“…….”
“시간을 돌리는 게 아니라 역사를 수정하는 거요.”
“……그게 뭐가 다른 거죠?”
아문달라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 설명해보지. 당신이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진 칼 한 자루를 발견했소. 하지만 당신은 도둑으로 몰릴 것을 걱정해서 그냥 두고 떠났소.”
“예.”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하필 땅에 떨어져 있던 그 칼을 맞아 죽어버렸지. 칼을 주웠다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인생에는 선택의 기로라는 게 있지요. 그런데요?”
“그런데 당신은 이미 죽어버렸지. 그건 되돌릴 수 없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여기까지는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실’이오.”
그녀는 아이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의 남겨진 가족들은 다르겠지? 그들은 여행길에는 자신의 몸을 지킬 칼 한 자루를 챙기자는 다짐 정도는 할지도 모르오. 그런데, 어떤 누군가가 경비대장이라고 쳐봅시다. 경비대장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 결국 그는 일어난 ‘사실’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소.”
“일어난 일을 수정하다뇨?”
“당신이 ‘칼이 없어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는 소문을 퍼뜨린 거요. 당신의 명예는 실추되겠지만, ‘칼을 맞을 만해서 맞았다’라는 믿음이 퍼지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일도 줄어들겠지.”
“그러면 유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당연하지. 경비대장이나 유족, 둘 중 하나가 ‘당신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싸우겠지. 진실과 상관없이 이기는 사람이 ‘역사’를 결정할 테고. 이해가 되오? ‘역사’와 ‘사실’은 별개요.”
아이작은 그제야 아문달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게…… 소금 의회에 일어난 일입니까?”
“그렇소. ‘사실’ 루앗딘은 소금 사막을 만들지 않았지. 하지만 소금 의회는 그 ‘역사’를 개정하려다가 패배하고, 더 끔찍한 꼴에 처하게 된 거요.”
아문달라스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르반수스가 지나간 시간 그 자체라는 것이 이해가 되시오?”
아이작은 이해했다.
에이단은 우르반수스가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라고 했다. 숟가락을 드는 법조차 우르반수스에서 학습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신들과 천사가 어느 날 우르반수스에서 ‘숟가락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고 결정하면 숟가락은 갑자기 정체불명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사실’은 바꿀 필요가 없소. ‘역사’만 바꾸면 ‘현재’는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사람들의 인식과 세계 또한 변화하오. 지금 소금 의회 신도들이 거짓된 역사를 믿고 거짓말을 못 하게 된 것처럼.”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다가 겹쳐질 때 현재라는 하나로 정리된다.
만약 그 역사를 용납할 수 없는 신이 있다면 기적이나 천사 등을 통해 ‘개정’하려 한다. 하지만 그 요구가 다른 신과 충돌할 경우, 신들은 전쟁이나 협상을 통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렇게 역사가 개정되면, 처음부터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았던 것처럼 살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게 가능한 것이 우르반수스인 것이다.
사후세계.
죽은 사람, 세계, 지식, 시간이 모이는 장소, 우르반수스.
그리고 바로 그 개정된 역사 중 하나가 소금 사막 사건이었던 것이다.
소금 의회와 빛의 법전이 벌인 우르반수스의 전쟁.
“그러면 다른 신앙들도 사후세계가 있겠군요.”
“전부는 아니오. 오직 아홉 신앙만.”
아문달라스는 웃으며 말했다.
“고대신들에게는 사후세계가 없소. 빛의 법전이 어떻게 그 강대한 고대신들을 물리치고 지금 저 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 같소?”
고대 신앙에는 사후세계가 없다.
우르반수스는 오직 아홉 신앙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고대신들은 그저 현세에서 숭배받으며 힘을 베풀고 권세를 누릴 뿐이다.
아이작은 한때 대제국을 만들기도 했던 고대신들이 어떻게 신흥세력에 불과한 아홉 신앙에 몰락하고 패배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고대 신앙은 ‘사후세계’라는 발명품을 들고 온 아홉 신앙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우르반수스에 입성한 빛의 법전을 필두로, 다른 신앙들이 나타나거나 합류하면서 사후세계를 갖지 못한 고대신들은 몰락하고 저열한 짐승으로 추락했다. 그들이 한때나마 가진 신성은 여전히 강했지만 아홉 신앙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왜 ‘아홉 신앙’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소. 나도 그저 ‘원래 그랬다’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니까. 안다면 빛의 법전 쪽에서 알겠지.”
아이작은 단순히 사후세계라고 생각했던 우르반수스가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 세계인지 깨달았다.
신들이 현재보다 사후세계에 불과한 이곳에 더 많은 신경과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에서 아무리 승리하더라도 역사에서 패배하면 어떻게 개변당할지 모르니까.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과거에 죽은 이들이 모이는 곳’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아문달라스는 어딘가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래 현재는 과거에 지배당하는 법이지.”
***
아이작은 아문달라스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설명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합니다만…….”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아문달라스는 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인가? 따지고 보면 아문달라스에게 자신은 불청객에 불과하다.
익사자 왕이 아이작을 이곳까지 보내기는 했지만, 아이작은 소금 의회의 천사를 죽이고 속에 의도를 알 수 없는 혼돈을 품은 수상쩍은 자.
그럼에도 아문달라스는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왜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겁니까?”
혹시 새로운 역사 개변을 위해 협조해 달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이작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루앗딘을 처치해 달라든가 하는 요구라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그 결과 현실에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말에 아문달라스는 깔깔대며 웃었다.
“왜냐면 애초에 당신이 이 설명을 듣기 위해 우르반수스에 왔기 때문이오.”
“예?”
곧 이어진 아문달라스의 말에 아이작의 몸이 경직되었다.
“혼돈이 왜 당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