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오래된 미래 (1)
아이작은 어느새 사공의 나룻배에 타고 있었다.
사공은 아이작이 배에 탄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땅을 노로 탁 밀어제쳤다. 순식간에 나룻배가 쏘아져 가듯이 하늘로 치솟았다. 엄청난 속도에 아이작은 짓눌리듯이 나자빠졌다. 손 아래 땅이 놀랄 만큼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아이작은 화를 내려다가 단호한 사공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공은 그냥 배를 모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노를 젓고 있었다.
몰락한 항구 도시, 미르미아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득할 만큼 광활한 새하얀 소금 사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미르미아가 손톱만 하게 보인 순간, 그 아득한 소금 사막마저 왜소하게 만들 정도의 검은 물결이 보였다. 그 광활하게 펼쳐진 검은 바다에 비하면 소금 사막은 겨우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린 듯한 정도 같았다.
그리고 아이작이 처음 우르반수스에 왔을 때 발견했던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였다. 피라미드의 아래로 소금 사막을 제외한 모든 곳이 시커먼 물결로 가득했다. 피라미드 주변은 태양의 빛을 감당할 수 없는지 쫓겨나듯 물러났지만 소금 사막 주변은 연신 물결에 침범당했다.
“꽉 잡으시오.”
그때 나룻배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아이작은 검은 물결이 자신을 향해서도 닥쳐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자, 검은 물결이 액체가 아닌 어떤 거대한 무리의 군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저 군집이 어딘가 촉수의 움직임을 닮았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사공이 노를 더 빨리 저어도 그 검은 물결은 따돌리기 어려워 보였다.
‘이거 잡히는 거 아니야?’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빼 들었다. 사후세계에서 뭔가와 싸운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최악의 선택이지만, 저게 나룻배에 닥쳐온다면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저것이 아이작이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더더욱.
그 순간, 맹렬하게 쫓아오던 검은 무리들이 연기를 피워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득히 먼 거리였는데도 비명이 들려왔다.
사공이 몰던 나룻배가 태양의 열기가 닿는 영역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제 나룻배는 불타오르는 검은 무리들을 뒤로 하고 바로 그 피라미드의 태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미르미아를 말려 버린 가혹한 태양과는 다른, 자상한 불꽃이었다.
마침내 사공이 탄 배는 그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맙다. 아이작.”
모든 것이 아득해지는 빛 속에서 사공이 갑자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은 갑자기 자상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공을 보고 당황해 돌아보았다. 사공의 얼굴에는 피곤하지만 어딘가 후련한, 고된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순간 아이작은 사공의 정체가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를 말하기 전에, 그는 아이작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며 중얼거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너를 보호하는 걸로 내 임무를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공의 군청색 눈이 아스라이 빛나는 햇살 속에 희미해졌다.
***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아이작은 알림음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자 시야 가득 바다가 들어왔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해안가 어딘가였다.
어디선가 지독한 악취가 풍겨 왔다.
“음…….”
아이작은 악취가 풍겨 오는 방향을 보고 얕게 신음했다.
익사자 왕의 거대한 사체가 썩어 가고 있었다.
마치 해변에 좌초된 고래처럼 몸뚱이를 뉜 익사자 왕은 새하얀 살갗을 드러낸 채 맹렬한 시취(屍臭)를 풍겼다.
한때 천사였던 존재의 비참한 모습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익사자 왕을 죽인 것은 사실상 아이작이고, 아이작 또한 익사자 왕에게 죽을 뻔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익사자 왕에게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은 순간, 그가 스스로 자살하듯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승부는 장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문달라스와 이야기를 해 보니 그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될 것도 아니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사체에 다가가 촉수를 꽂아 넣었다.
‘하다못해 무가치하게 썩어갈 몸은 아니지.’
천사는 쉽게 죽지 않지만, 죽는다 해도 저주받지 않는 한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익사자 왕은 사후세계와 단절되었기에 육신을 정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몸 안에 파고든 촉수가 익사자 왕의 육신을 포식하기 시작했다. 이미 곳곳이 썩고 부패한 상태였지만, 촉수에게는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사체에는 천사 특유의 신성력이 대부분 증발해 고기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부패한 천사의 독(S)’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하지만 그 몸 안쪽에서 아이작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마치 작은 진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익사자 왕의 정수임을 알아보았다.
[어두운 성찬례가 발동합니다.]순간 촉수가 폭발적으로 그 정수를 주변으로 성장하며 단단하게 감쌌다. 그리곤 마치 아이작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듯 정수를 물어뜯기 전에 잠시 멈춰서 대기했다.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촉수는 그것을 가루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움켜쥐어 으스러뜨렸다.
부그르르르…….
아이작의 눈앞에서 익사자 왕의 사체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상당한 양의 신앙이 그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몸을 포식하는 것으로 그의 제례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익숙한 알림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익사자 왕(EX-)’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촉수의 강도가 영구적으로 강해집니다.] [촉수의 길이가 영구적으로 길어집니다.] [촉수의 가닥 수가 영구적으로 증가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분위기 깨는군.”
[‘익사자 왕 토벌’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아이작이 감상에 젖거나 말거나, 이름 없는 혼돈은 충실하게 그에게 포상을 제안했다. 이미 익사자 왕을 포식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보상을 얻은 셈이지만, 그렇다고 이름 없는 혼돈의 보상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지금 당장 힘을 강화하는 것보다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았다.
그는 보상안을 선택하는 대신 왼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름 없는 혼돈.”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나를 여기로 왜 끌고 온 거야? 아니, 그래. 이기라고 데려왔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누구로부터 이겨서, 어떤 결과를 내기를 바라는 거야?”
멸망을 원하는 자들에게 멸망을 주고 자신은 화려하게 자살한 신.
아이작은 대체 그가 원하는 바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목표가 무엇이든간에 자신의 목표, 빛의 법전 성기사가 되어 잘 먹고 잘살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
그렇다면 단지 원하는 자에게 원하는 것을 주려는 것뿐인가?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의지가 무엇이든 간에, 신들의 의지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았다.
앞으로 1년, 여명군이 시작되는 시기로부터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
빛의 법전이 소금 사막을 만들어 버린 것과 비견되는, 아니, 거의 모든 신앙들이 뒤엉켜 아귀다툼을 벌일만한 무언가가.
그 전쟁터에서 소금 의회와 붉은 성배는 승기의 끄트머리라도 잡기 위해 아이작 같은 존재에게조차 손을 내민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혼돈은 무엇을 원하기에 아이작을 선택했는가?
신을 무엇을 위해 인간에게 손을 내밀었나?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답변 대신 뻔뻔하게 포상을 제안할 뿐이었다.
아이작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저 ‘당신을 주시합니다’ 외에 다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놈은 끝까지 저렇게 아이작과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아이작으로서는 늘 해 왔던 협박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나는 정신 나간 선택지를 고를 생각 따윈 없어.”
아이작은 아문달라스가 보여 준 300년 전의 풍경을 보았다. 우르반수스에서 넘쳐흐르는 그 검은 물결을 보았다.
그것들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촉수와 곤충, 벌레, 기형적인 괴물들로 넘쳐나는 물결이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도저히 이름 없는 혼돈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아니, 사실 그것들이 무엇인지 보고 바로 깨달았다.
그것은 과거에 이름 없는 혼돈을 섬기면서 종말을 바라던 자들의 사후세계다.
언제든 범람할 기회를 노리면서 아이작을 배신자라고 부르짖고, 그에게 압력을 불어넣어 미완의 종말을 다시 시작하려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가 이름 없는 혼돈과 일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아이작은 당장 이름 없는 혼돈에게 답변을 추궁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제안받은 세 가지 포상안을 확인했다.
[기어드는 혼돈(S) / 제물을 바쳐서 혼돈의 권속에 속하는 신수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질에 따라 신수의 등급이 결정됩니다.] [경계의 낫(A) / 촉수의 단면을 톱날처럼 만들어 닿는 모든 것을 뜯어먹습니다.]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A) / 촉수를 저 너머의 색채로 감싸 보이지 않게 하거나, 그림자 속에 숨길 수 있습니다.]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주저 없이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를 선택했다.
‘S급인 기어드는 혼돈도 매력적이지만…….’
아이작은 사후세계에서 본 그 괴물들을 떠올렸다. 물론 아이작이 이때까지 소환한 벌레나 촉수 중 말을 안 듣는 놈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 소환하는 놈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신수는 블러드나이트나 아궁이 짐승처럼 강력하고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으로 묘사되는 괴물들은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그러나 아이작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문달라스의 경고가 떠오른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의 힘에 과하게 기댈수록 사후세계가 그를 잠식할 것이라고.
‘적어도 능력이 강해지는 것에 맞춰서 나 자신도 강해져야만 해.’
이름 없는 혼돈은 포상에 후한 편이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얻을 수 있고, 필요하다면 의식을 통해서라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촉수를 그림자 속에 숨기거나 감쌀 수 있다는 것은 정체를 숨겨야 하는 아이작 입장에서는 강력한 장점이었다. 그 기능성만으로는 S급을 넘어 EX급이라도 붙여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촉수의 공격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경계의 낫은 선택하지 않았다.
보상으로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를 선택하자 아이작의 눈빛이 한층 더 깊은 보랏빛으로 빛났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특전을 얻은 게 있었지.’
[부패한 천사의 독(S)] [보기 드문 천사의 시독(屍毒). 강력한 재생력과 신성성, 죽음의 기운, 저주가 결합된 강력한 독. 신성을 가진 존재에게 특히 더 강력한 효과를 보입니다.]익사자 왕의 썩어 가는 사체를 포식하면서 얻은 특전이었다. 소화가 될 때까지만 유지되는 특전이었지만 이 정도면 아주 강력한 무기였다. 특히나 천사나 신수와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에게 통하는 독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익사자 왕, 너…….’
아이작은 괜히 찡한 기분을 한 번 더 느꼈다.
‘정말 아낌없이 주는 녀석이구나.’
익사자 왕이 들으면 어처구니없어하겠지만 알뜰살뜰하게 잘 써주면 우르반수스에서도 고마워하리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