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오래된 미래 (3)
“아이작 님!”
아이작이 탄 배가 노른덴 항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어떻게 전파된 건지 몰라도, 히야니스와 옌코스가 탄 배가 접근해 왔다. 둘은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에이단의 배 위에 올라타 아이작의 귀환을 환영했다.
“무사하셨군요!”
“다친 곳 없이 멀쩡하시니 다행입니다. 항구에서 환영 행사를 준비 중입니다. 조속히…….”
“환영 행사는 안 돼.”
아이작은 정색하면서 거절했다.
그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빛의 법전의 성기사다. 소금 의회의 문제를 자애와 봉사의 마음으로 해결해준 것은 좋다. 대가로 소금 의회가 아이작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된 것도 좋다.
하지만 의식에 휘말려 사후세계를 갔다 오고 ‘꿈꾸는 자’니 뭐니 하는 걸로 지정된 것이 대놓고 드러나는 일은 곤란했다.
‘안 그래도 이단심문관들이 내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아이작을 감시해야 할 이솔데는 보고를 하겠다며 이사크레아 영지를 떠난 이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를 잘해서 이단심문청이 앞으로 감시를 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아 보였다. 오히려 아이작에게 ‘포섭’된 이솔데를 다른 곳으로 전출 보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아이작은 여전히 조심해야 했다.
그는 당장 자신이 우르반수스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이 세 사람만 알아도 소금 의회를 복속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
아이작은 소금 의회의 사제들에게 우르반수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소금 사막과 사공, 몰락도시 미르미아, 그곳에서 만난 아문달라스, 우르반수스의 실체.
그 안에서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했으나, 개념적으로는 무한한 공간이니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들이 관심을 보인 대상은 역시 소금 의회의 천사로 추정되는 아문달라스였다.
“아문달라스? 아문달라스가 누구지?”
소금 의회는 수많은 기록이 소실된 만큼, 당연히 천사들에 대한 기록도 사라진 상태였다.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기록은 하나하나가 귀중했다.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않기로 결정한 선장이라고 하더군.”
아이작의 대답에 선장들이 다시 뒤집어졌다. 소금 의회 입장에서는 지금의 몰락을 만들어 낸 대역적이나 다름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여전히 명천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신의 명령을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착잡해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은 신이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아문달라스 따위가 아니었다.
“성배기사님을…… 꿈꾸는 자로 지정하겠다구요?”
옌코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오직 에이단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 사막에 갇힌 봉인을 깨뜨리고 신을 깨울 존재. 사실상 두 번째 선지자나 다름없는 위치를 이단의 신앙인 중에서 뽑는 셈이다.
아이작은 그들이 의심하거나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 아문달라스의 욕을 거하게 쏟아 놓을 생각이었다.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함께 보내겠다고 해놓고 설득할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긴 셈이니까.
“충격적이군요. 하지만…….”
“으음, 뭐.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지요.”
생각보다 그들은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단순히 광신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역사와 고문학에 해박한 고고학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수한 신앙의 역사 속에 아이작 같은 ‘예외’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고 있었다.
옌코스는 아이작에게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문달라스가 증거도 없이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녀의 관심은 아이작이 정말 ‘꿈꾸는 자’인지 의심하는 것보다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는 증거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 파괴당한 어부왕의 그물을 넘어서는 보물 중의 보물이 될지도 모르니까.
“실망할지도 모르겠는데.”
아이작은 옌코스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물, ‘표류자의 고향’을 꺼내 들었다.
안에는 소금기 가득한 하얀 바닷물이 찰랑거릴 뿐이지만, 그 정체는 사후세계의 물이다. 옌코스는 조심스럽게 표류자의 고향을 받아 들었다.
“에이단도 같은 걸 가지고 있다.”
두 표류자의 고향은 선수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이 바닷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어딜 가든 서로를 찾을 수 있는 표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찾거나 위치를 가늠하는 기적은 이미 많았다.
선지자를 증명하는 표식이라기에는 다소 소박했다.
옌코스는 두 표류자의 고향을 들여다보다가 무언가 기적을 발동시켰다. 어떤 기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뒤 옌코스가 곧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이거…….”
“왜? 사실 뭔가 대단한 기적이라도 있나?”
“아뇨. 이건…… 평범한 바닷물입니다.”
“…….”
아이작의 침묵에 옌코스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뇨. 바로 그 평범한 바닷물인 게 문제입니다! 저는, 그러니까, 지금 발동한 기적은 이게 얼마나 오래됐는지 간단한 연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적인데, 이게 그러니까…….”
“천 년 전 물건이라도 되나?”
“아뇨.”
옌코스는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뒤, 소금 사막을 채운 바닷물입니다.”
***
3년 뒤, 그러니까 미래의 물체가 왔다는 것은 이 물이 사후세계의 물이라는 것보다 충격적이었다. 애매한 예언보다는 확실하게 증명하는 물체니까.
심지어 그들이 염원하는, 지금은 메말라 버린 소금 사막을 채운 바닷물이다.
물론 그게 정말로 신을 깨운 증거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 아문달라스가 정말로 우르반수스를 통해 시간대를 넘나들어 물을 퍼온 것이라면?
이 바닷물만큼 아이작이 선지자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결국 옌코스와 히야니스, 에이단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이작을 믿기로 한 것 같았다.
증거가 되는 표류자의 고향 또한 소금 의회 소속인 에이단이 하나, 아이작이 하나씩 보관하기로 했다.
이것은 소금 의회가 두고두고 아이작에게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매개가 될 것이다.
‘꽤나 인상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넘겨주었군.’
‘표류자의 고향’은 그럴듯한 힘을 가진 성물이나 예언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신이 언제 돌아오느냐’는 질문에 ‘3년 안으로 돌아온다’는 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아이작 입장에서는 아문달라스가 정말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가, 라는 궁금증이 남았다.
‘뭐, 사기를 쳤든 진짜든…… 어쨌든 내가 이걸 진짜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군.’
아이작은 표류자의 고향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소금 의회를 우호적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넘어서 아예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당분간 이 결탁은 비밀로 해야 했다.
소금 의회와 친하게 지내는 것 정도는 상관없다. 하지만 부르는 자를 깨우니 마니 하면 빛의 법전에서 불쾌해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소금 사막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루앗딘’인데, 다시 소금 사막을 바닷물로 채운다는 말은 그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후안 주교도 이 일에 연루됐잖아? 그 뒤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군.’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노르덴 항이나 가까운 항구에 내려 줬을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후 소금 의회 전체가 아이작을 찾아다녔을 테니 주교 한 명이 어떻게 됐는지를 물어봤자 이들도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을 끝장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그에게 광휘의 날개가 생긴 것은 분명 후안 주교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촉수 괴물 상태로 익사자 왕을 먹어 치웠을지도 모른다.
‘그건 고맙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 덕분에 기적이 되살아난 거 아닌가?’
아이작은 기적이 되살아난 후안 주교가 자신을 어떻게 대우할지 배은망덕한 기대를 가졌다. 안 그래도 후계자니 뭐니 하면서 키워 줄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이젠 아예 양자로 들이겠다고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아이작의 눈에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르덴 항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육지에 반가워하려던 찰나, 아이작은 항구에 크고 작은 배 사이에 유달리 낯선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금 의회의 배는 빠르고 폭이 좁은 유형의 배가 많다. 하지만 정박되어 있는 배는 군선(軍船)이었다. 위에는 제국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는 낯익은 깃발 하나가 또 휘날리고 있었다.
‘저 깃발을 어디서 봤더라?’
태양을 등지고 있는 사자 문장.
아이작은 불현듯 저 문장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이솔데가 수도원에서 앓아누웠을 때 발견했던 문장이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브란트 공작가의 배가 왜 저기에?’
갑작스러운 군선의 출현에 당황했지만 소금 의회의 선원들은 노련하게 대처했다. 그들은 조업을 진행하는 척, 혹은 평범하게 귀항하는 척하며 브란트 공작가의 배를 포위했다. 소금 의회의 다재다능한 선원들은 대개 상인이나 어부로 활동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이단을 시켜 그런 움직임을 저지했다.
“쓸데없는 오해 살 일 없게 하라고 해라.”
아이작은 브란트 공작가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추측하면서도 딱히 다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빛의 법전도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을 안 건가?’
자의식 과잉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지만, 브란트 공작 같은 거물이 갑자기 군선까지 끌고 나타날 다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군선은 에이단의 배에 비해 턱을 치켜들어야 할 정도로 높았다. 이미 갑판 위에는 적지 않은 병사들이 늘어서서 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일부러 자신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들었다.
그때 기사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허겁지겁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이십니까?”
“맞다.”
아이작의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갑판 위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급하게 누굴 불러오라느니, 뭘 준비하라느니 하는 외침도 터져 나왔다. 한참을 허둥대는 소란 속에서, 아이작을 내려다보던 기사가 서둘러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작 님! 송구스럽지만 노르덴 항에는 가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
아이작은 브란트 공작가의 군선 위에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기사의 말은 ‘더는 지나갈 수 없다’ 라든가 ‘두 번 다시 땅에 발을 못 디딜 거다’ 따위의 의미가 아니라, 정중하게 배에 초대한다는 의미였다.
“어휘력을 조금 키워야겠군.”
기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당혹스러워서 말이 헛나올 수도 있긴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항구의 배들이 죄다 해적선으로 변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아이작은 기사의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미 한 사람이 아이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미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귀빈실에 있는 거물을 본 순간 마음을 다잡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갑작스러운 초대였는데 응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사크레아 경.”
디트리히 브란트 공작.
발트제메르 황제의 사촌이자 내전의 일등 공신. 동시에 빛의 법전 교단에서 가장 신실한 신앙인임을 거액의 후원금으로 증명하는 신도.
황실 다음으로 가장 부유하고 큰 영토를 다스리는 거물 중의 거물이 아이작 눈앞에 있었다.
이단심문관인 이솔데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그거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고.
“빛께서 당신의 앞길을 쭉 비춰주시길. 디트리히 브란트 공작님이시군요.”
첫인상은 제국에서 황제와 교황 다음가는 거물인 것치고는 꽤나 수수한 인상이라는 점이었다. 교황은 머리에 후광이 있고, 황제는 보란 듯이 뿔이 나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디트리히 브란트는 굉장히 수수한 인상이었다.
“오, 저희가 언제 뵌 적 있습니까?”
“가장 신실한 신도이심을 모두가 아는데 제가 모르겠습니까?”
게임 속에서도 꽤나 중요하게 출연하니 모를 수가 없다. 디트리히 브란트는 여명군에서도 준 최고사령관에 속하는 역할을 맡는다.
아이작은 그보다 디트리히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공작님이야말로 저를 아시는 게 놀랍군요. 어떻게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후안 주교님이십니까? 아니면 리옹 후작님? 소문을 들으신 거라면 실망시켜 드릴까 걱정스럽군요.”
“아아, 별 건 아니고.”
아이작은 사회적인 미소를 지으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다음 디트리히의 대답에 그 표정은 깨지고 말았다.
“제 딸이 굉장히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