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2)
“여기가 그…… 유서 깊은 성이군요.”
아이작은 붉은 성채에 발을 딛으며 감명 깊게 중얼거렸다.
루주베르크는 붉은 산이라는 뜻이었다. 보통 이런 대귀족의 성채는 가문 명을 따와서 새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흔했지만 루주베르크는 그러기 어려울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냥 엘릴이 살던 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다들 아는 이야기인걸요.”
아이작이 일부러 ‘그’ 엘릴이 다스리던 영지라는 것을 일부러 피했지만, 디트리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빛의 법전이 한참 대제국을 건설하며 영향력을 퍼뜨리던 시절, 루주베르크는 살아 있는 몸으로 천사가 되는 것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수많은 업적을 쌓았던 엘릴이 하사받은 중심 도시였다.
이후 자신의 딸인 무희에게 물려주었던 이 성은 이후 무수한 사람의 손을 거쳐 이제 브란트 공작가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제국 수도인 울텐하임보다도 역사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런 유명한 역사적 장소에서 여운에 젖을 틈도 없었다.
디트리히는 아이작을 데리고 곧장 루주베르크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가면 갈수록 디트리히는 여유를 잃었는지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결국 마지막에는 반쯤 뛰고 있을 정도였다. 배 위에서는 시종일관 보이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자 아이작은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 생각했다.
경비가 삼엄한 문을 몇 번이나 지나, 작은 정원이 딸린 탑 앞에 도착했다. 좁고 왜소한 탑 앞에는 꽤 이상해 보이는, 약간 어색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여자들이 모여서 탑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하녀라기에는 어딘가 기품 있는 모습에 복장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와도 딱히 격식을 차리지 않는 걸 보아 아마도 친척, 혹은 지인들 같았다.
이상한 건 그녀들 모두 칼이나 창, 활 따위를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딱히 능숙해 보이지도 않았다.
디트리히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여자들 앞으로 다가갔다.
“이솔데는?”
“스스로의 상태가 어떤지 들으시고는 다소 의기소침해지셨습니다만, 건강하십니다. 식사도 잘하고 계시구요.”
디트리히는 난처한 얼굴로 탑을 올려다보았다. 탑 위쪽 창가에 실루엣이 어슬렁거렸다.
이솔데가 분명했다.
“알겠다. 잠시 물러나 있도록.”
여자들은 시키는 대로 무거운 무기를 끌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디트리히는 주변을 살핀 뒤 아이작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이사크레아 경 혼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군요.”
“이솔데에게 어떤 종류의 ‘축복’이 걸렸는지 물어보신 적 있지요. 이제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지 암시조차 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디트리히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마 일종의 ‘매혹’ 효과로 추측됩니다.”
“……매혹이요?”
“정확한 교리는 잘 모릅니다. 듣자 하니 붉은 성배 클럽에는 ‘사랑의 묘약’이라고 불리는 성물이나 비슷한 종류의 기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비슷한 기적이 이솔데에게 걸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반하는 게 아니라, 반하게 하는 쪽으로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더군요.”
아이작은 아연실색했다.
그 역시도 붉은 성배 클럽을 플레이해 본 적 있으니 어떤 기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워낙 비주류에 속하고 전투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쓰레기 스킬로 분류됐지만, 무수한 전설이나 전승에 언급되는 기적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매혹하거나 정신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붉은 성배의 특기였으니까.
“언제부터 걸려 있었던 겁니까?”
“대략 석 달 정도 됐습니다. 그동안 정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사안이 사안이라 대놓고 드러내기도 어렵고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 오히려 까다롭다고 하더군요.”
어떤 종류의 축복은 저주와 구분하기 힘들다.
아름다움은 그중 하나에 해당된다.
“원래는 남자만 주의하면 된다고 판단하고 하녀들에게만 시중을 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음, 점점 축복이 심각해지더니 나중에는 하녀도 방문을 금지해야 할 지경이 되더군요.”
“……문제가 생겼습니까?”
“이솔데 그 아이가 어지간한 기사는 꺾을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이작은 왜 탑 앞을 평생 칼 한 자루 쥐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여자들이 지키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호기심 때문에라도 남자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설령 누군가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이솔데 스스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왜 이단심문청에서 허겁지겁 이솔데를 브란트 영지로 쫓아냈는지 알 것 같군.’
브란트 공작가를 향한 견제인가 생각했는데, 이단심문청도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솔데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겼다간 목이 달아나는 것은 한두 명이 아니었을 테니까. 저주, 아니 축복이 더 강해지기 전에 허겁지겁 본가로 보냈으리라.
결국 디트리히는 방법을 찾다 찾다 안 되어서 아이작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문제는, 왜 자신인가였다.
“잠깐, 그러면 저도 방문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음, 일단 저도 조사 중에 알아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디트리히는 조심스럽게 탑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이 축복인지 뭔지는 천사가 건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순히 사제가 건 것으로 이 정도 위력은 발휘하기 힘들다더군요.”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의심하고 있겠군요.”
“딸아이가 가장 최근에 천사와 관련 있는 장소를 방문한 일은 그곳밖에 없으니 그렇게 의심하고 있긴 하지요. 따라서 바로 그 천사를 추방한 성배기사야말로 적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탕녀의 매혹을 물리치고 사악한 저주를 물리친 성배기사.
이 또한 동화에 나올법한 이야기다. 어쩌면 디트리히는 아이작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으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으음, 이런 축복의 경우 해제할 방법으로 전승되는 게 하나 있더군요.”
“해제할 방법?”
“축복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겁니다.”
디트리히는 이마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디트리히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랑의 묘약과 관련된 전승에 나오는 전통적인 구절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면 축복도 자연스럽게 해제된다는 겁니다.”
그제야 아이작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디트리히가 왜 그렇게 정중하면서도 사윗감 간 보는 듯한 태도로 그를 대했는지 알게 되었다.
***
아이작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계단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디트리히는 일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듣기로는 남자들은 흘러나오는 냄새조차 견디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약간 달짝지근한 냄새는 나지만 아직 잘 모르겠군.’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위쪽에 서 있는 시커먼 실루엣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손에 칼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밖에 있던 여자들처럼 이솔데의 경호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까 그 여자들과 달리 검을 쥔 자세가 제대로 잡혀있었다.
“성배기사님이십니까?”
고저차 없는 귀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문득 그녀가 서 있는 위치가 상당히 전략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이 칼을 휘두르면 벽에 부딪치거나 시야가 제한되지만, 귀부인이 서 있는 장소는 발디딤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칼 휘두르기에도 편한 장소였다.
‘검을 수련한 적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이군. 호위기사인가?’
귀부인은 한참 아이작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뭔가 잘못됐나 생각했지만, 조용히 기다리자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충혈되지도 않고, 상스러운 말도 안 하고, 미쳐서 달려들지도 않는군요. 확인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따라오십시오.”
“아, 예.”
귀부인이 움직이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부인은 발목에 쇠사슬을 감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걸어놓은 제약인 듯했다. 열쇠도 아마 그녀 손에 없을 것이다.
제법 계단을 오르고 귀부인이 멈춰 설 무렵, 쇠사슬도 팽팽해졌다.
그녀는 검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그 애는 저 안에 있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애?’
아이작은 어두울 때에는 몰랐지만 귀부인의 얼굴이 이솔데와 제법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작부인이십니까?”
귀부인은 초췌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제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한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저는 프리야 브란트입니다. 애엄마죠.”
소박한 소개였지만 공작부인이었다.
공작부인이 발에 쇠사슬까지 감고 좁은 탑 안에서 밤새가며 경비를 서는 모습에 아이작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제국을 주름잡는 이인자의 가문이라 해도 한 사람의 엄마 아빠라고 해야 할까.
그때 프리야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성 높은 성배기사이시니 무례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만약에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그 애가 심한 모욕을 받지 않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작은 이 부부가 딸을 귀하게 키워서 그런가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솔데가 이대로 이 정신 나간 축복에 시달리며 살게 둘 수는 없으니 해제하긴 해야겠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작도 떨떠름한 일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조건이 완성되려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맺어져야 한다며? 이솔데가 내게 그 정도의 호감을 보인 적은 없는데.’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아이작이 할 수 있는 말은 걱정 많은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뿐이었다.
아이작은 이미 이 축복을 해제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렵지도 않은 방법이었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콤한 향기가 더욱 강해졌다.
아이작은 약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좁은 방이었지만 이솔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단심문관님?”
아이작이 부르자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 기둥에 숨겨진 커튼 뒤쪽에서 이솔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전에 비해 퍽 의기소침해진 모습이었다.
“……성배기사님?”
반가움, 놀라움, 걱정, 희망, 초조, 불안……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제야 이솔데를 본 남자들이 어떤 충동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게 사랑의 묘약인지 뭔지 그 효과군.’
이솔데가 가진 모든 매력이 극대화되어서 몰아닥치는 느낌이었다.
이건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감각이 아니었다. 전에도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매력이었다.
네필림이 가진 매력이 군중의 눈길을 잡아끄는 리더의 매력이라면, 붉은 성배가 만들어 낸 축복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매력이었다.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자신감과 달리, 아이작은 이 축복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이 대답이 없자 이솔데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아이작은 크게 심호흡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그 순간, 아이작은 단숨에 달려들어 준비했던 칼로 이솔데의 명치를 찔렀다. 이솔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이내 눈을 뒤집으며 주저앉았다.
이솔데가 쓰러지자 아이작은 아까보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이작은 서둘러 창문을 열고 의지를 쏘아 보냈다.
‘헤사벨.’
그러자 창문 쇠창살 사이로 붉은 안개가 기다렸다는 듯 스며들어왔다. 이내 붉은 안개는 헤사벨의 형태를 갖추고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작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