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5)
아이작의 뺨을 더듬던 이솔데가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나 심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심상세계에서와 달리 이솔데는 당연히 간편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의식의 여파인지, 아니면 축복의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건지 심상세계에서 봤던 야릇한 차림이 아른거렸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흉내 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교태를 보일 때보다 이솔데 본인이 당황하는 모습에서 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이작은 침착한 척 애쓰며 함께 일어났다.
이솔데의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갈애의 교리를 억눌러둔 상태입니다만,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긴 시간이 지나 뿌리가 깊이 박힌 데다, 부작용 없이 제거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물론 훨씬 더 간편하고 빠르게 제거할 방법이 있긴 하지만요.”
헤사벨이 옆에서 쓸데없이 덧붙이는 말에 아이작이 쏘아보았다.
이솔데는 여전히 아직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허겁지겁 자신의 배를 만졌다. 아까 아이작이 분열 예식으로 찔렀던 자리였다.
“분열 예식으로 찌른 자리입니다. 기적으로 이루어진 존재에게는 치명적이지만 평범한 산 것에게는 그냥 평범한 단검이죠. 갈애의 교리가 워낙에 강해진 상태라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치료해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칼라일 성해포(A)] [상처에 닿을 경우 해당 부위의 출혈과 부상을 즉시 치유하지만, 피를 소모한다.]아이작이 이솔데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쓴 성물이었다.
그가 가진 재생력 자체가 워낙에 뛰어나 쓸 일이 거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때에는 유용했다.
이솔데는 ‘갈애의 교리가 강해진 상태라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게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 그러니까, 그…… 저한테…… 그런?”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작은 이런 걸 설명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피곤했다. 하지만 그녀가 불필요한 오해를 끌어안고 살지 않게 하려면 몇 번이라도 설명해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이솔데의 표정이 미묘해졌으나, 아이작은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갈애의 교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축복을 건 당사자도 천사인지라 보통 독한 게 아니구요. 당분간은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아, 붉은 성배 클럽의 의식을 치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솔데는 이단심문관답게 바닥에 그려진 핏빛 문양과 헤사벨을 보고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빛의 법전에도 축복이나 저주를 몰아내는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단의 신앙인만큼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큰 부작용 없이 몰아내려면 같은 붉은 성배 클럽의 기적이라야 했다.
“예. 헤사벨이 도와줄 겁니다. 갈애의 교리를 완전히 걷어내기 전까지는 외부 출입도 자제하는 편이 좋겠지요.”
“어, 그러면 성배기사님은…….”
“아, 지금은 갈애의 교리가 잦아든 상태입니다. 아마도 축복이 걸린 첫날 정도의 위력이겠군요.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이 정도 위력으로는 다른 남자들이 이상한 망상이나 하는 정도다. 아까 전 폭력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매력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힘도 커지겠지만 지금은 부모님 정도는 다시 만나 뵈어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이솔데는 눈을 크게 떴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일렁였다.
이솔데 역시 밖에서 고생하는 공작 부부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괜히 복잡한 기분에 휩싸이고 싶지 않아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나갈 채비를 했다.
밖에 문에 바싹 붙어 기다리고 있을 프리야와 쉬지 않고 정원을 서성이고 있을 디트리히에게 상황을 다시 설명해야 할 차례였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이솔데와 뭘 하라고? 뻔히 바깥 사정을 아는데 잘도 의욕이 생기겠군.’
장인 장모가 문밖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하룻밤을 보내라니, 과연 난교파티를 즐기는 식인종이나 할법 한 발상이다.
아이작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이솔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 고마워요. 또 저를 구해주셨군요.”
이솔데의 젖은 목소리에 아이작은 그냥 평범하게 겸양을 표하려다가, 머리를 거칠게 긁고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이단심문관님. 애당초 이 상황은 저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솔데는 젖은 눈으로 물끄러미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그 눈물 때문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쪽도 저를 몇 번이나 구해줬죠. 제 비밀도 지켜주셨고.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압니다.”
뭔가 멋진 말을 하면 좋겠지만, 아이작에게 그런 어휘력은 없었다. 그저 솔직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피차 몇 번 구해줬느니 그런 건 세지 맙시다. 보니까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 신세 질 일이 많아 보이니까요.”
***
“고맙습니다. 이건…… 큰 빚을 졌군요.”
브란트 공작 부부는 오랜만에 이솔데와 해후를 마치고 아이작을 다시 만났다. 갈애의 교리가 약해진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존재하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이솔데와 오래 마주하는 것은 좋을 것이 없었다.
디트리히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배기사님 정도라면 저희 애와 맺어지더라도 문제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 중이었구요. 하지만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냈군요. 여기에 실망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애인이 따로 있으십니까?”
디트리히는 이솔데의 상태를 보고 여유를 찾은 건지 농담까지 했다.
표정이 제법 진지하기는 하였으나, 아무튼 농담이기를 바랐다.
“없습니다. 이솔데 양에게는 문제가 없고, 제가 부족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요.”
애당초 갈애의 교리에 걸린 상태라면 본인 스스로의 매력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무조건적으로 끌리게 될 테니까.
“뭐, 아름다운 남녀가 하룻밤 정도 보내는 것은 문제없지 않습니까?”
“……농담 맞죠?”
“네, 농담입니다. 그래도 저는 딱히 자식들에게 환상을 품고 있진 않습니다. 제가 지금 아내를 만나서 처음 관계를 맺었던 것이 이솔데보다 네 살은 더 어린…….”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프리야 브란트가 디트리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디트리히는 입을 다물었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권력가의 인간적인 모습이 보기 좋기는 했지만, 그에게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공작님. 말씀드렸다시피 갈애의 교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들여 쇠약해지게 만든 다음, 그 안에 있는 붉은 살점을 이솔데 양에게 흡수시킬 예정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붉은 성배의 기적에 내성이 생기겠지요.”
붉은 살점을 흡수시킨다는 말에 디트리히의 표정이 흔들렸다. 독실한 신도라면 절대로 그런 부정한 것 따위 가까이할 수 없다는 말을 늘어놓았겠지만, 역시나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상황 해결을 넘어 예방까지 해 주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뭐든 성배기사님 뜻대로 해주십시오. 이솔데도 그러길 바랄 겁니다.”
프리야가 담담히 대답했다. 디트리히보다 훨씬 진중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는 가문에서 기강을 잡는 역할인 듯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며칠간 같은 의식을 반복할 건데,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이솔데 브란트의 혼약을 추진하는 연회를 열어주십시오.”
정적이 흘러갔다. 프리야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디트리히는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이 되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다고 느끼고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혼약에 관한 것은 소문이면 충분합니다. 공녀님 정절을 건드릴 일은 없습니다. 공녀님은 제가 알기로 슬슬 혼기가 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음, 그렇긴 하지요.”
이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결혼한다. 스무 살을 넘기면 이미 혼기를 꽉 채웠다고 보는 편이다. 더군다나 브란트 공작가 같은 대귀족 가문은 정략결혼을 하니, 줄 선 신랑감들이 많을 것이다.
“이솔데 양이 루주베르크로 돌아온 것은 이미 소문이 났을 겁니다. 교단에서 일하던 브란트 가의 외동딸이 혼기가 꽉 찬 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많은 소문이 돌겠지요. 불필요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연회를 열어서 ‘정말 결혼을 위해서 돌아온 것처럼’ 만들어줘야 합니다.”
“흐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생각이 깊으시군요.”
“사실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이솔데 양에게 살점을 먹인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솔데는 붉은 살점을 먹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아무리 날고 기며 용하더라도, 살덩어리가 자발적으로 입 안으로 기어들어 가지는 않는다. 현혹했든 협박했든, 붉은 성배 클럽에 협조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일단 범인 자체는 이단심문청 안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상대가 붉은 성배 클럽인 이상 첩자가 얼마나 더 많이 있을지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이솔데 양에게 살점을 먹인 자라면, 이 상황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문에 분명히 반응할 겁니다. 이솔데 양을 모욕하려 들건, 상태를 확인하려 들건, 반드시 찾아오겠지요.”
첩자가 줄어드는 것을 거울 시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애시당초 아이작이 동의한 적 없는 일이다.
***
브란트 공작가에서 벌어지는 연회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안 그래도 공작가 외동딸인 이솔데 브란트가 교단에서 나와 영지로 돌아갔다는 소문은 사교계에 파다한 터였다. 그 뒤로 본성인 루주베르크에서 두문불출해서 온갖 음해성 소문이 뒤따르긴 했지만, 브란트 령에 속하는 모든 영주들을 초대하는 큰 연회를 연다는 소식에 가십성 소문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소문이 모든 입과 귀를 오가기 시작했다.
‘공작가의 사위가 될 사람은 누구인가?’
***
아이작이 루주베르크에 머문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성은 며칠 뒤 있을 연회 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사이 붉은 살점의 힘은 끊임없이 쇠약해지고 반대로 이솔데가 흡수할 수 있는 양도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하루에 한 번만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간은 제법 길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아이작은 대체로 이솔데가 있는 탑에서 머물렀고, 어쩌다 디트리히의 초대를 받아 내성을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아이작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마주칠 수 있는 사람도 디트리히와 프리야, 이솔데 뿐이었다. 하지만 이솔데는 의식을 마치고 나면 극도의 졸음에 빠져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기 때문에 적당한 대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바쁘게 연회를 준비하는 마당을 내려다보던 디트리히가 입을 열었다.
“원래 결혼 상대는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는 거 알지요?”
아이작이 사교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사극이나 판타지 영화에서 본 것 따위가 전부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럴듯한 연회에서 미남미녀들이 춤추다 보면 눈맞은 커플이 역사를 쌓고 결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일찌감치 혼담이 오가지요. 이미 제 집무실에 그런 혼담을 청하는 편지들이 겨우내 장작으로 써도 될 만큼 쌓여있고. 적당한 짝이 있다면 서로의 힘의 균형을 확인하고, 지참금은 어느 정도인지,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어느 정도인지, 상속권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뭐 그런 자질구레한 절차를 거치다가 자식들에게 통보합니다. ‘어디 영주 아들이 그렇게 잘났다더라.’”
디트리히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연회를 여는 건 황태자비 간택식을 할 때나 벌어지는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 공정한 척하면서 이미 사전에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거든요.”
“아, 이런. 황제 폐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실 수도 있겠군요?”
“조카를 아끼는 삼촌이니 이해하실 겁니다. 발트제메르 폐하께서는.”
발트제메르 황제의 조카라고 하니 이솔데가 얼마나 높은 위치인지 갑작스럽게 실감이 났다. 그런 이솔데를 가지고 처음 만났을 때 수도원에서 죽이니 마니 고민했던 자신의 모습도.
‘하마터면 번거로운 방식으로 자살할 뻔했군.’
“사실 제 딸은 이제 문제가 없지요. 이제 아이작 님께 맡기면 되는 일이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사실 문제는 아이작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이작은 의아한 듯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제 문제…… 말씀이십니까?”
“지금 일련의 상황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내성과 탑만을 오가고, 사실상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요. 사실 성배기사님을 이렇게 모시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압니다. 그 정도는…….”
“아뇨. 이솔데 이유도 있지만 사실 핑계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제게는 아이작 님을 여기 묶어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국을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