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붉은 과실 (2)
심상세계는 어쨌거나 꿈속에 가까운 세계이기 때문에, 아이작이나 이솔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이상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원한다면 세계 구축에 관여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솔데에 대한 장악력이 높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 쪽이 우세한 것은 분명했다.
‘기억을 건드려서 내게 죄책감을 심으려는 건가?’
선지자의 목적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결국 아이작이 해야 할 일은 여전했다.
선지자를 쓰러뜨리면 쓰러뜨릴수록 그녀의 힘은 약해진다. 이미 이 작업은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껍질을 깨뜨리기만 하면 붉은 살점이 완전히 드러나고 이솔데는 그 힘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은 어둠 속에서 이솔데를 덮쳤다.
석궁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녀의 몸이 쓰러지려던 순간, 다시 시야가 뒤집혔다.
아이작은 몸이 기이할 정도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몸이 허공에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겐 살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백색 시야 너머에는 다리 위에서 이솔데가 혼자서 언데드 대군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수많은 스켈레톤 병사들 사이에 숨어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잘 싸우고 있었지만, 무수한 칼날들 사이에서 아이작의 칼만큼은 발견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칼날이 그녀의 폐부를 날카롭게 찢고 들어갔다.
그제야 아이작에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루주베르크로군.’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성채의 풍경이 어쩐지 반갑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거대한 기둥들이 늘어선 회랑 끝에 이솔데가 서 있었다. 이솔데, 아니 선지자의 눈에는 얕은 짜증과 피곤함, 초조함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그 표정만 봐도 그녀가 이솔데가 아니라 선지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선지자는 점점 버티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이딴 식으로 죄책감을 끌어내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 적당히 하고 그냥 좀 죽어.”
물론 사념체에 불과한 선지자가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 아이작 스스로를 다그치는 말이기도 했다.
역시나 선지자는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그녀의 뒤를 다시 쫓았다.
선지자는 기둥과 모퉁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휘장과 커튼 사이로 달리며 아이작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뭔가 이상한데.’
문득 설명하기 힘든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숨바꼭질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이미 비슷한 상황이 몇 번이나 있었고, 매번 결과는 같았다. 아이작은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본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느낀 아이작은 이때까지 수십 번 그랬듯, 다시 칼을 휘둘렀다.
선지자의 등에 칼이 꽂혔다. 그제야 마침내 이번 저항이 끝나듯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파르르륵! 마치 수백 장의 종이책을 한꺼번에 넘기는 듯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자신의 칼날 아래 이솔데의 종잇장처럼 얇은 가죽이 수백 수천 장으로 나뉘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본 적 없는 반응에 아이작은 마침내 끝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저주, 아니, 축복의 주체, 붉은 살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펄떡이는 심장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이솔데가 상상하는 모습일 뿐이었으니까.
스스로를 보호할 표피를 잃어버린 붉은 살점을 펄떡이며 피를 뿜어냈다.
불현듯 그 심장 한가운데 입술이 돋아났다. 고혹적인 여인의 입술은 외침을 토해냈다.
“마침내!”
그 탄성이 아이작이 있는 회랑을 넘어 루주베르크, 심상세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울림을 정면에서 직격당한 아이작은 순간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균형 잡고 섰다. 붉은 살점은 쇠약해졌다고 믿기 힘들 만큼 강한 힘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아니, 설마?’
번뜩. 붉은 살점 한가운데서 쌍꺼풀이 두꺼운 눈이 세로로 돋아났다. 아니, 쌍꺼풀이 아니라 피칠갑을 한 수십 쌍의 손이었다. 손들이 일제히 눈꺼풀을 밀어내자 살이 갈라지는 듯한 피비린내와 함께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눈동자를 응시한 아이작은 그것의 실체를 알아차렸다.
“마침내 벗어났다, 붉은 성배로부터! 고맙다, 성배기사!”
그것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점이 아니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 그 자체였다.
***
‘미쳤나?’
아이작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붉은 살점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예상할 수 없었던 이상, 당연히 어느 정도 위험한 상황은 예측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 그 본체가 통째로 이솔데의 안에 들어앉았을 거란 상황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헨드락 영지에서 그 수작을 부릴 때조차 하지 않았던 짓 아닌가.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수히 잘라냈던 그 껍데기들은…… 사실 힘을 숨기기 위한 포장에 불과했던 거군.’
자칫 잘못하면 선지자 본인이 소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이미 기나긴 의식을 통해서 본신의 힘을 다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아이작으로선 그녀가 미쳐서 복잡한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군. 성배기사.”
껍질을 훌훌 털어 낸 선지자가 눈웃음치며 말했다.
“그래. 맞다. 미친 짓이었지. 하지만 붉은 성배가 날 희생양으로 선택한 시점에서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더군.”
“아…… 눈치가 빠르군?”
역시나 음모와 암살의 복마전답게, 선지자는 거울 시녀가 자신을 ‘선물’로 선택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선지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얌전히 붉은 성배를 위해 희생하든가, 아니면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배교하든가.
선지자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그 대가로 그녀는 많은 힘을 깎아 내야 했다.
거울 시녀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고 봤지만, 지금 당장은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솔데의 몸을 선택한 건 나 때문인가?”
“그렇지. 거울 시녀의 눈을 속일 수도 있고, 이솔데 브란트 본인이 가진 배경도 투철하고, 너를 엿먹일 수도 있을 것 같더군. 그리고 잘하면 네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래서 어떻게든 유혹해 보려고 했는데…… 설마 고자였을 줄이야.”
“고자 아니다.”
“지금이라도 확인시켜 주든가.”
아이작은 이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루앗딘 열쇠를 들고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불쾌하기는커녕 즐겁다는 듯 눈웃음지으며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유감이지만 성배기사, 나는 네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덕분에 이솔데와 상당히 융합된 상태다. 지금 나를 죽이면 이솔데도 무사하진 못할걸. 아니, 확실하게 해두지. 내가 죽기 전에 확실하게 이솔데가 먼저 죽는다.”
그야 그럴 것이다.
날개를 꺾고 비틀고 뽑아도 천사는 천사다.
타천사가 되기 전에 배교에 성공했으니 그 힘은 여전히 인간에 불과한 이솔데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막말로 이솔데가 산산조각 나도 선지자의 펄떡이는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칼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선지자는 그 미소를 가장된 여유라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꺼림칙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놓친 게 있는지 되새겨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행동했다.
이솔데의 몸에 들어오기 전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몇 주간 지켜보면서 아이작에게 다른 힘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역시나 아이작은 빛의 법전의 기적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기적을 쓰지 않고 융합한 살점을 이솔데로부터 분리할 방법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은 선지자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의 월척이로군.”
“하, 그렇게 여유를 부려 봤자…….”
순간 아이작이 빠르게 선지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선지자는 설마 베려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방어를 시작했다. 붉은 핏줄이 선 가시창들이 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 창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멈춰 서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선지자는 경악했다.
‘설마? 빛의 법전의 기적을 쓸 수 있는데도 숨기고 있던 건가!’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에 가시를 세운 순간, 아이작의 손끝에 피어올랐던 불꽃은 허망하리만치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아이작은 수년 전과 비교해 봐도, 심지어 꿈속인데도 여전히 같은 결과가 나오는 기적에 실망했다.
하지만 효과는 그걸로 충분했다.
이 자리에는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까.
“……저는 빛을 섬기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선지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방금 그녀가 벗어던진 껍데기에 불과했던 이솔데가 일어나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지혜와 인내를 주시고 삶이 빛으로 충만하도록 도와주소서.”
“아, 안돼!”
이솔데가 외우는 기도문의 정체를 알아차린 선지자가 발악하듯 몸부림쳤다. 바닥에서 솟구친 가시창들이 이솔데의 몸을 꿰뚫었지만,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꿈속에 불과한 일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단심문관이었다.
목숨 걸고 이단과 맞서는 것은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이솔데는 되레 몸을 꿰뚫은 가시창을 움켜쥐곤 기도문을 마무리 지었다.
“제가 당신을 섬기는 일에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당신의 그림자가 되도록 허락하소서.”
쩌어어어억.
이솔데가 짚은 손을 중심으로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균열은 순식간에 붉은 살점의 전심을 뒤덮었다. 선지자는 그 균열에서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길은 없었다.
이미 그녀는 이솔데와 너무 많이 융합되어 있었다.
붉은 살점이 몸 내부에서부터 타들어 가며 전신이 검은 숯덩이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선지자는 그 끔찍한 몰골로도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이건 잠깐의 침묵에 불과하다, 성배기사! 나는 다시 돌아온다! 다시…….”
퍽. 붉은 눈동자가 압력을 이기지 못한 듯 터졌다.
안에서 진물이 새어 나오고, 밖으로 나왔던 수십 쌍의 손들은 마치 조개가 입을 다물 듯 눈꺼풀을 닫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것으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침묵했다.
아이작은 잿더미가 된 가시창들을 털어 내며 선지자에게 다가갔다.
‘성공했군.’
거울 시녀가 붉은 살점을 흡수하라고 말한 시점부터, 이미 아이작은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정말로 호의로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을 한 주체가 붉은 성배 클럽의 천사라면 열 번 스무 번 의심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이작은 예상보다 붉은 살점이 커서 이솔데가 흡수하기 어렵다면 봉인해 버리기로 했다. 그때 이솔데의 자아를 깨우기 위한 신호로 아이작의 하찮고 귀여운 기적을 발동하기로 한 것이다.
찰나의 빛에 불과하지만, 의식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그 결과 이솔데가 이단심문관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봉인 기적을 발동한 것이다.
‘거기에 붉은 살점의 선지자, 본체가 낚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렇다 해도 봉인은 봉인. 완전히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살점은 이제 그냥 숯덩이처럼 보였지만, 그 안엔 여전히 천사가 가진 힘이 맥동하고 있었다. 이미 쇠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이 발휘하는 봉인의 기도문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음모와 계략의 천사라고 해도, 설마 여기서 이솔데가 개입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이미 이솔데와 융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교만한 천사의 최후였다.
당분간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얌전히 이솔데의 체력 배터리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기어 나와 발악할지도 모르지만, 그땐 지금보다도 더 대비가 잘 되어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돌아보았다.
봉인 기도문을 외운 이솔데는 멍하니 주저앉아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고는 해도, 이솔데는 졸지에 다른 신앙의 천사를 몸에 봉인한 셈이 되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을 수반한 것이다.
“이단심문관님, 괜찮으십니까?”
“…….”
문득 아이작은 지금 이곳이 이솔데의 꿈속 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전 교육을 통해 본능적으로 봉인 기도문을 외우게 시키기는 했지만, 그녀가 제대로 된 자아와 생각을 가지고 움직일 리가 없었다.
꿈속처럼 움직이겠지.
심상 세계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아이작은 의식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이솔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는 현실이 아니죠?”
“예? 아, 뭐. 그렇지요.”
“그럼…… 이건 꿈이죠?”
이솔데는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아이작을 향해 몸을 포개 왔다. 아이작은 당황하며 밀어내려 했지만 어쩐지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상대할 때보다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달콤한 향기가 풍겨 왔다.
‘갈애의 교리가 아직 남아 있나? 선지자를 봉인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
복잡한 생각을 하던 아이작의 입술 위로 이솔데의 입술이 포개졌다.
아이작의 머리에서 생각이 사라졌다. 대신 강력한 유혹이 그 자리를 메웠다.
성배기사는 유혹을 뿌리칠 기회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