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화제의 영애 (2)
디트리히가 말릴 새도 없이 아이작은 성큼성큼 볼리벤을 향해 걸어갔다. 디트리히는 어쩔 수 없이 연회를 도우러 온 사제에게 불빛을 조금 낮추고, 연주곡을 바꾸도록 지시했다.
볼리벤은 처음에는 당황한 듯했다가 이내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 앞에 섰다. 굳이 혼돈의 눈을 발동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볼리벤은 아이작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서 춤추시겠습니까, 아니면 방으로 가서 격하게……?”
아이작은 미소 지으면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사실 손끝도 닿고 싶지 않았지만, 짐승 가죽을 벗길 때 더럽다고 피를 안 묻힐 수는 없는 법이다.
손가락들이 교차하자 볼리벤은 히죽 웃었지만, 그 표정이 굳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볼리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가, 이내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 핏줄이 섰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손깍지를 낀 채 마주 보고만 서 있자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볼리벤의 손가락이 거의 뒤로 접히고 있다는 것은 알아보지 못했다.
볼리벤은 당장 비명 지르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력을 다해도 아이작의 손아귀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네필림의 체력이 아무리 약하다 해도 온갖 축복으로 무장한 아이작은 이미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을 넘어선 상태였다. 물론 포만감은 소비했지만, 이깟 손아귀 힘 정도야 전투할 때에 비하면 티끌만 한 수준이었다.
“너, 으, 어, 무슨.”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춤을 추기 위한 사전 동작이었지만, 간신히 서 있던 볼리벤은 당연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그제야 아이작은 손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디트리히가 나섰다.
“취한 모양이군. 객실로 보내게.”
경비병 몇이 볼리벤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때 볼리벤은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조소하고 조롱하는 눈빛.
볼리벤은 자신도 모르게 격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감히 다른 귀족들 앞에서 자신을 망신 준 계집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브란트 공작가의 딸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되게끔 아이작에게 충동질 당하고 있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아이작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볼리벤을 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네필림의 매력은 단순히 호감을 사고 인기를 얻는 데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위기를 장악하고 상대의 감정을 유도하는 능력이기도 했다.
극도의 호감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극도의 증오를 유도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이년!!”
순간 아이작은 손을 휘둘러 볼리벤의 뺨을 후려갈겼다.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으로.
쾅! 볼리벤은 순간 목이 꺾일 듯한 기세로 얼굴을 계단에 처박혔다.
굉음과 함께 쓰러진 그의 모습에 연회장은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디트리히마저도 당황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둘러 사제가 달려가 볼리벤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 살아는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뜸 살아 있는지부터 확인한 것을 보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제야 디트리히도 안심하면서 분노를 토해냈다.
“감히 내 집, 내 영지에서 내 딸을 공격하려고 해? 이런 미친 자식! 당장 이 자식을 루주베르크 밖으로 쫓아내라! 트레치아 가문은 충분한 대가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디트리히가 보여 주는 분노에는 이솔데 때문에 생긴 마음고생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봐도 잘못한 것은 볼리벤이었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도 호응하며 끌려 나가는 그를 경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제의 치료를 받은 볼리벤은 경비병들 손에 끌려갔다. 멍한 표정으로 눈은 떴지만 정신은 못 차렸다. 그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아이작이 왼손의 촉수로 찢어발긴 상처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저 너머의 기생충이 숨어 있었다.
기생충들은 빠르게 볼리벤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앞으로 트레치아 영지는 저능아 영주를 모시고 살든가, 좀 더 상식적인 새 영주를 모시는 편이 좋을 것이다.
디트리히는 상황을 수습한 다음 아이작에게 와서 속삭였다.
“앞으로는 미리 좀 말해 주고 사고를 치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좋았죠?”
디트리히는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훼방꾼이 사라지자 다시 연회가 이어졌다. 하지만 방금 전 일어난 일은 귀족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었다.
아이작이 쌓아 올렸던 ‘우아하고 정숙한 이솔데 공녀’에 대한 호평은 사라지고, ‘한방에 곰 같은 덩치를 쓰러뜨리는 괴력’에 대한 소문이 새롭게 돌았다.
***
연회가 시작된 지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아이작의 요청에 따라 연회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마침 이제 초겨울이었기 때문에 할 일이 많이 없어진 귀족들은 느긋하게 연회를 즐겼다. 그동안 아이작은 귀족들을 조사하면서 제법 적지 않은 정보들을 알 수 있었다.
이솔데에게 접근하는 귀족들은 대개 세 가지 부류였다.
첫째로 이솔데를 어떻게 꼬셔서 팔자를 고쳐 보려는 가난한 영주나 유망한 귀족 가문의 차남,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싶어 하는 야심가들.
이 부류가 가장 많았다.
이들은 계산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면 바로 물러났다.
두 번째는 정말로 아이작에게 반한 사람들.
이들은 결혼은 꿈도 안 꾸고 그저 ‘낭만’을 꿈꾸고 있었다. 당연히 아이작은 남자라면 말도 섞지 않고 쫓아냈지만, 문제는 여자였다. 네필림의 매력은 남녀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였다면 칼 맞을 짓도 여자가 하면 용서됐기 때문에 아이작은 굉장히 어렵게 이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다행히 이솔데의 모친인 프리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의심스러운 부류였다. 그들은 아이작에게 접근하지도, 대화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연회를 즐기며 아이작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이작은 그들이 자신의 동선을 확인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오늘은 몇 명?’
‘다섯 명이요. 점점 많아지는군요.’
동시에 루주베르크 성안에 수상한 자들도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브란트 공작가의 보안이 허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부러 만든 틈새이자 함정이었다. 덕분에 아이작은 헤사벨을 통해 이들을 감시할 수 있었다.
‘잘하고 있어. 일단 내버려 두고 지켜봐.’
‘넵.’
이들이 이솔데에게 붉은 살점을 먹인 자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바로 그들을 잡는 대신 지켜보았다. 지금 괜히 놈들을 건드리면 나머지가 도망갈 수도 있다. 확실하게 기회가 될 때 뿌리를 뽑아야 했다.
그러나 복병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연회가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연회라면 당연히 그 소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부러 발표를 뒤로 미루시는 걸까요?”
귀족들은 이 연회에서 무언가 발표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바로 브란트 가의 새 사위에 대해서.
디트리히도 이미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연회라면 결혼이나 약혼 정도 아니면 벌이지 않지요. 사교계에서는 모든 게 다 정치고 음모입니다. ‘브란트 공작이 아무 생각 없이 음주가무를 즐기고 싶어서 연회를 열었다’ 같은 말은 안 통합니다.”
“……뭐라도 발표해야 한다는 거군요.”
디트리히의 속삭임에 아이작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이작은 연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명색이 ‘이솔데 퇴직 기념’인데 주인공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주인공은 탑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미안할 따름이었다.
“맞습니다. 게다가 이솔데는 혼기가 꽉 찼지요. 그 아이 또래 애들은 이미 다 결혼한 상태입니다. 지금까지는 교단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더 미루면 무언가 하자가 있다는 추문이 돌 수도 있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만약 제 딸이 시집 못 가게 되면 누군가는 책임져야겠지요?”
“그걸 왜 제가 책임집니까?”
“성배기사님더러 책임지라고는 안 했습니다. 다만, 흠. 묘한 소문이 돌더군요.”
“어떤 소문 말입니까?”
“브란트 공작가의 딸과 결혼하려면 뺨을 얻어맞아도 목이 부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애초부터 이솔데가 자신을 꺾을 수 있는 강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거나 그런 소문 말입니다.”
“…….”
소문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모르는 척 침묵할 뿐이었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이솔데에 관한 소문을 잠재우려면 서둘러 약혼을 발표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중매라도 서야 했다. 그리고 브란트 공작가라면 상대가 줄을 서면 줄을 섰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즉, 디트리히의 말은 일종의 경고였다.
만약 아이작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면 정략결혼이라도 시키겠다는.
그리고 이솔데는 의무와 가문에 충실한 사람이다. 낭만적인 감정에 빠져 가문의 의무를 거절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브란트 공작도 딸에게 내조나 시킬 생각으로 공부를 가르치진 않은 것처럼 보이니 데릴사위를 염두에 두고 있을 테고.
***
“아, 디트리히 브란트!”
한참 생각이 복잡해져 있던 아이작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트리히 브란트를 이렇게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계급도 나이도 사회적 존중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했다.
혹은 그냥 좀 막 나가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거나.
“델리아 리옹 후작.”
디트리히는 애써 웃으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델리아에게 인사했다. 다부진 몸을 흔들며 다가오는 인물은 아이작도 이미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만나본 적 있는 델리아 리옹 후작이었다.
그녀는 연회장 건너편에서도 들릴 것 같은 커다란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디트리히는 동년배인 그녀를 노골적으로 껄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델리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바쁘다고 들었는데?”
“루주베르크에서 큰 파티가 열린다는데 참여하지 않을 수가 있나! 너무 싫은 티는 내지 말게, 그쪽은 그 미모에 대한 명성이 자자한 딸인가?”
델리아는 아이작의 손을 덥석 움켜쥐면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듣던 대로 대단한 미모긴 한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던가?”
아이작은 바싹 긴장했지만, 그녀는 이내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아, 아! 그래, 맞아!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거기 찾아왔던 이단심문관들 중 한 명이 자네였지. 디트리히, 알고 있었나? 자네 딸과 나는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마주친 적 있다는 걸!”
“몰랐군.”
“그래. 그때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군. 이렇게 보니 아주 정숙하고 참한 아가씨인데. 그때 그 친구랑 참 잘 어울렸을 텐데 말이지…….”
아이작은 이제 디트리히와 동질감을 느꼈다. 델리아의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좀 쫓아내고 싶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의 마음과는 반대로 이제 디트리히는 델리아의 말에 호기심을 느낀 듯했다.
“그 친구?”
“이사크레아 경 말일세. 북해에서 순교했다는.”
“아아, 그 성배기사 말이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성배기사와 나는 참으로 우애 깊은 사이였지. 그가 크게 될 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서 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네…….”
델리아는 그 자리에서 아이작을 얼마나 존경했고 아꼈으며, 아이작 역시도 자신을 얼마나 존경하고 따랐는지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정면에서 듣고 있는 아이작 입장에서는 고역이었으나 애써 웃으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바쁜 공작님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아가씨를 힐끔거리는 총각들도 많은데 내가 계속 붙들어둘 수는 없지. 나는 이만 파티 음식을 축내러 가 보겠네. 요리사 솜씨가 좋더군. 아 참, 물어볼 게 있는데.”
델리아는 한참 혼자 떠들다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디트리히에게 물었다. 디트리히는 또 무슨 헛소리를 떠들 생각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델리아에게서 나온 말에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방금 말한 그 성배기사 말이지. 사실 살아 있다던데, 사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