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신앙증명 (2)
다행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속으로 안도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수도원장님.”
예브하르는 겸손하게 대답하는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정말 성체인 걸까? 성체이든 아니든, 범상한 존재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예브하르는 그럴 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아주 교묘한 악마가 수도원에 숨어든 것.
예브하르는 신중한 자였다. 그는 추앙받는 영웅이 사실 사악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례를 얼마든지 보았다.
불사황제 베셰크만 해도 빛의 법전의 주교 중 한 명이었다. 칼센 밀터는 명천사의 위계가 예정된 교단의 영웅이었다. 배교를 대가로 다른 신앙의 명천사가 된 자들도 있었다.
‘빛의 법전이시여, 부디 당신을 시험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예브하르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는 천천히 아이작의 미간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이작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물끄러미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강력하게 경고합니다.]‘뭐?’
아이작은 갑자기 울려 퍼진 경고에 놀라 머리를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예브하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이작의 뒷목을 잡아채고 손가락으로 미간을 찍어눌렀다.
그 순간,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수도원을 뒤덮고도 남는 섬광은 산을 넘어 지평선에서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뻗어나갔다.
빛은 한참 후에야 사그라들었다.
아이작은 뒤로 나동그라진 채 멍한 얼굴로 앞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탄내가 진동했다. 아이작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예브하르가 짚었던 이마를 만졌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거뭇한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아무런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아이작.”
그때 앞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브하르가 피곤한 표정으로 손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의 손목 아래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시커멓게 탄 흔적만 남아있었다.
“내가 과연 너에게 뭔가를 가르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
예브하르는 이내 푹 쓰러지듯 기절했다. 당황하는 아이작 뒤로, 황급히 달려오는 수도사들과 게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예브하르를 침실로 데려간 뒤, 아이작은 게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게벨은 예브하르가 아이작의 미간을 짚은 순간 섬광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짧게 탄식했다.
“믿음의 증명이요?”
“그래. 수도원장님은 너의 믿음이 진심인지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싶으셨던 거다.”
게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믿음의 증명은 천국에 육신을 밀어 넣고 믿음을 확인하는 기적이다. 믿음이 얕은 존재라면 화상을 입지. 그래서 고위 사제와 이단심문관 외에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단다.”
아이작은 손목이 날아간 예브하르의 꼴이 자신에게 적용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했다.
‘그래서 이름 없는 혼돈이 그렇게 경고한 건가?’
아이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도원장님이 절 죽일 뻔한 거예요?”
“수도원장님은 그 기적을 평생 세 번도 쓰지 않으셨다. 그것도 상대방이 크게 다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아예 안 쓰셨지. 네 대답을 듣고 나름의 확신을 가지셨을 거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아이작은 속내를 숨기고 씨근거렸다.
“하지만 결국 저는 무사했고 손목이 날아간 것은 수도원장님이잖아요? 그건 왜 그렇죠?”
게벨도 그 사실이 적잖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게…… 믿음의 증명은 만약 시전자보다 상대의 믿음이 훨씬 크다면, 오히려 시전하는 자가 화상을 입는다. 그 격차만큼 정직하게 돌아오지.”
아이작은 입을 벌리고 당황했다. 그는 그제야 다른 수도사들과 게벨이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수도원장과 신앙심 대결을 벌였더니, 아이작이 압승했다는 뜻이었다.
‘무협지로 따지자면 갓 입문한 문도가 장문인과 내공 대결에서 이긴 수준이군.’
아이작은 이 사실이 어떻게 알려질까 싶어 당혹스러웠지만, 이름 없는 혼돈과의 연결이 들통난 게 아니란 것에 위안을 받았다. 오히려 그의 ‘신앙심’이 공개적으로 알려진 셈이 되었으니, 이제 그를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아. 공식적으로 신앙심을 인증받은 셈이니, 촉수를 들킨다 해도 변명의 여지가 생긴 셈이다.’
아이작은 자신이 수도원장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압승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확인한 대로 빛의 법전이란 결국 물리학의 상식이다. 현대인인 아이작에게 그것은 이미 지구는 둥글고 달이 존재한다는 수준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그 믿음이란 애초에 흔들릴 수가 없는 것이다.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과도 같은 거니까.
반면 예브하르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무수한 전설과 미신들이 뒤얽힌 세계를 살고 있다. 그가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믿음의 강도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사소한 의구심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그 차이는 예브하르의 손목이 날아가는 결과로 돌아왔다.
“손목은 다시 나으시겠죠?”
고위성직자 중에는 잘린 사지를 복구하는 기적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도원장 정도라면 그 정도 기적은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기적을 통해 사라진 손이니 힘들 거다. 빛의 법전께서 앗아가신 손인데, 다시 돌려주실 리가 없지.”
아이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결백이 증명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졸지에 수도원장의 손목을 날려 버린 셈이니 결국 이 일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아이작이 예브하르를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안녕하세요, 수도원장님.”
예브하르는 원장실에서 아이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볕이 들어오는 창문을 등지고 서 있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손목은 치유하지 못한 건지 뭉뚝한 오른손 위로 붕대를 감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수도원장님. 제가…….”
“죄송?”
“손목이…….”
“아아, 이것. 별거 아니다. 나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벌였던 일이니.”
예브하르는 창가에서 걸어 나와 아이작을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아니, 오히려 손목 하나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나는 되려 이것을 빛의 법전께서 내게 할 일이 남아있다는 계시를 남기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단다.”
예브하르는 사실 아이작의 믿음을 시험했을 때, 온몸이 불타서 죽는 것까지도 각오했었다. 아이작이 신이 보낸 사자와 같은 존재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손목 하나만 날아갔다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다.
‘살아서 아이작의 성장을 도우라는 뜻이겠지.’
그런 예브하르의 생각을 모르는 아이작은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일전에 기도문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지.”
“아, 예. 지난 일주일 사이 조금 더 외웠습니다. 그리고…….”
“필요 없다. 외우지 않아도 된다.”
“예?”
예브하르는 달관이라도 한 것처럼 담담히 말을 이었다.
“믿음이 부족한 이들이나 신의 말씀을 찾아 헤매고 세상의 존재 이유를 좇는다. 하지만 너는 이미 그 존재로 신의 말씀을 대행하고 있다. 너의 말이 곧 기도문이 되고, 너의 노래가 곧 찬가가 될 텐데 책을 달달 외우는 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아이작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거지? ‘믿음의 증명’ 때문인가?
하지만 예브하르는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건지 책 몇 권을 꺼내 들었다.
예브하르가 일주일씩이나 걸려서 아이작을 부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성기사가 되고 싶어 한다고 게벨에게 들었다.”
“아, 예.”
“성기사가 되는데 필요한 기적과 기도문, 성가들을 정리한 책이다. 봐두면 참고가 될 거다. 잘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알려주마.”
아이작은 깜짝 놀라서 책들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도서관에서 읽고 쓰는 책들과 달리, 단단하게 양장된 책들에는 빛의 법전 교단에서 쓰이는 기적들과 그 기원을 정리한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아이작이 책에 손을 대자 눈가가 아른거리면서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책: 재와 불씨의 기도서(희귀)] [기적: 불꽃을 배울 수 있다. 작게는 양초부터, 크게는 검에 이르기까지 불꽃을 피워올릴 수 있다.] [악보: 성 아르테 찬가(희귀)] [성가: 용맹찬가를 배울 수 있다. 감정적 동요를 억누르고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다. 성가의 특성으로 다수의 인원이 부를수록 효과가 증대된다.] [악보: 등불과 나방의 성가(희귀)] [성가: 등불을 배울 수 있다.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을 만든다. 어둠에 속한 적들의 방어 능력을 낮춘다. 성가의 특성으로 다수의 인원이 부를수록 효과가 증대된다.]그 외에 자잘한 기도서들이 있었다.
모두 등급은 높지 않았지만, 성기사들이 필수적으로 배우는 것들답게 대단히 실용적이었다. 아이작은 이 설명창이 모든 물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나 마법의 힘이 깃든 물건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게 아직 직위가 없어서 내 마음대로 고위 기적에 관한 내용은 보여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수도원에서 가지고 있는 책들도 많지 않아서…….”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말했다. 예브하르가 그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는 것도 큰 수확이지만, 설마 기적까지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기적을 발휘하는 성가는 오직 교단 안에서만 돌기 때문에 값을 따질 수가 없는 물건이다. 설령 어떻게 획득하더라도 교단의 지위가 없는 사람이라면 획득 경로와 반납하지 않은 이유들을 설명해야 했으니 일반인은 보기도 힘든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브하르는 겸손한 아이작의 모습에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네 믿음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다만, 실제로 기적을 발휘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게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고 차근차근 성자들의 이야기와 가르침을 이해하다 보면 금방 성과를 보일 거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
게벨의 체력단련 방식은 단순했다.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무작정 달리게 하는 것.
사실 기초체력의 대부분은 유산소 운동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이작도 군말 없이 따랐다.
다만 그 ‘무거운 짐’이라는 것이 무거운 참나무 장작을 마당에서 창고까지 옮기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게벨의 실용성을 엿볼 수 있었지만.
하지만 게벨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지 달리는 아이작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수도원장님이 책을 주셨다고?”
“헉, 허억. 예.”
예브하르에게 받은 책들은 전부 도서관에 보관했다. 다른 아이들도 있는 방에다 보관할 수는 없으니까. 수도사 알렉은 미리 언질을 들은 듯 책꽂이 한 칸을 비워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손대지 못하도록 자물쇠까지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슨 책들을 받았지?”
“성가, 헉, 그리고, 기도문들이요. 후욱, 헉.”
아이작은 비지땀을 흘리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뒤뜰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장작 묶음을 끼고 달리니 5바퀴만 돌아도 숨이 차서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만큼 네필림 종족의 저질 체력이 원망스러운 때가 없었다.
이건 촉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이작으로부터 책 목록들을 들은 게벨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수도원장님이 정말 작정하고 널 성기사로 밀어주시려는 모양이구나.”
“그런, 가요?”
“당연하지. 성기사단의 종자도 이 정도 지원을 받기는 힘들다. 돈 좀 있는 귀족가 차남이나 받을 수 있는 대우인데…….”
성기사들 중에서는 장남이 거의 없었다. 가문을 이어받을 수 없는 차남, 삼남들이 주로 방랑기사가 되거나 교단에 투신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차남, 삼남에게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가문들도 있으니, 고아인 아이작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말도 안 되게 큰 혜택이었다.
“다 게벨 씨가, 좋게 이야기해준, 덕분, 헉, 후욱!”
“그만.”
아이작은 비척비척 몇 걸음 더 걷다가 장작 묶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법 체력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밀도가 높은 참나무 장작 묶음은 아이작의 몸무게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무거웠다. 가느다란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지만, 아이작은 오히려 이 신체의 고통이 반가웠다.
‘드디어 운동다운 운동을 하는 기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