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발트제메르 황제 (2)
“아, 그렇군요.”
아이작의 담담한 반응에 디트리히는 오히려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리 이름 높은 성배기사라 해도 갑자기 황제를 언급하면 당황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일부러 놀래키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반응이 심심하자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한편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아이작은 디트리히의 반응을 보고 서둘러 변명했다.
“아,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예상이요? 황제 폐하께서 오실 것을 예상하셨단 말입니까?”
“예. 리옹 후작이 와 있었으니까요.”
디트리히는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저 예상했던 수순이었다.
델리아 리옹은 황제파에 목숨을 걸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친황제파이자 중앙 귀족들의 대변자였다. 그녀가 바쁜 일정 와중에 굳이 루주베르크의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아이작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붉은 성배 클럽의 음모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첩자들이 루주베르크에 스며든 것을 보자 생각을 달리했다.
누군가 아주 중요한 사람이 루주베르크에 오고 있다고.
그리고 리옹 후작을 움직일 수 있으며 브란트 공작과 가까운 거물은 발트제메르 황제,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마 저를 부르실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아니, 갑자기 저는 왜 찾으신답니까?”
그제야 디트리히는 기대했던 반응이라는 듯 즐겁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당신의 존재를 재밌게 여기시더군요. 죽음에서 귀환한 성배기사라니, 누가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델리아 리옹 후작도 알고 있는 자신의 귀환 소식을 황제가 모를 리가 없다. 황제가 갑자기 루주베르크를 방문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부활한 성배기사에 대한 소문도 단단히 한몫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비공식 일정이고, 황제 폐하께서도 그다지 격식을 따지지 않으시는 분이니 편한 분위기에서 만나 뵈면 됩니다.”
하지만 갑자기 황제라니.
아니, 언젠가는 만날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아이작이 생각했던 단계를 몇 단계나 한꺼번에 뛰어넘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디트리히가 너무 격 없이 대해서 그렇지, 브란트 공작은 제국에서 가장 황제와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붉은 성배의 첩자들이 아직 득시글거리고 전부 정리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아이작은 일단 걱정부터 앞섰다.
지금 루주베르크에는 연회 때문이든 황제 때문이든 수상한 자들이 급증한 상태다. 대부분 하잘것없는 자들이고 주의할 필요가 있는 자들은 전부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황제가 방문하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황제의 안위야 사실 아이작이 알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루주베르크에서 상처라도 입으면 디트리히는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리라.
“괜찮습니다. 황제 폐하께선 빛의 법전이 내리신 성체이십니다. 거기에 황실 근위 기사단과 신수 할타바가 그분을 늘 호위하고 있지요. 누가 감히 그분을 해하려 들겠습니까?”
아이작은 황제에 대해 다시금 떠올려보고, 애초부터 자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시점에서 발트제메르 황제는 백제국 내 최강자다.
게다가 그가 곁에 거느리고 있는 전력들도 쟁쟁하다.
발트제메르 황제의 손가락이라도 다치게 하고 싶다면 천사 하나로는 모자랄 것이다. 고작 인간사냥꾼 몇 명으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아닙니다. 우리의 적들 또한 함부로 경계를 늦춰선 안 될 존재니까요.”
아이작은 황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걱정부터 먼저 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 폐하께서 저에 대해 어떤 소문을 들으셨을지 걱정입니다.”
그 말에 디트리히는 웃었다.
“별걱정을 다 하시는군요. 성배기사님에 대한 소문 중에 어디 더럽고 탁한 소문이 있겠습니까? 있다 한들 교단 손에 깡그리 지워졌을 겁니다. 성배기사님은 이제 교단의 상징이니까요.”
아이작은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가시겠습니까? 황제 폐하를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물론입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서가는 디트리히를 뒤따라 나섰다. 그리고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소금 의회에서 잘해주었군. 생각보다는 급전개지만, 예상대로 되고 있어.’
죽은 성배기사가 사실 살아서 루주베르크에 머물고 있다.
그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은 바로 아이작 본인이었다.
***
자신이 성자로 등극했고, 여명군을 위한 상징이 되어 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작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의 귀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디트리히의 부탁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디트리히는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보안을 부탁한 것은 이솔데에 대한 추문을 막기 위함이었다. 연회를 통해 이솔데의 건재함을 알린 이상 딱히 보안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작이 소문을 퍼뜨린 가장 큰 첫 번째 이유는 안전을 위해서였다.
죽은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가장 껄끄럽게 여길만한 존재는 빛의 법전 교단이다.
그들은 죽은 성배기사를 ‘명예롭게 순교한 성자’로 다루기 좋게 만들어 휘두르고 있었다. 문제는 아이작이 멀쩡히 잘 살아있다는 점이다. 죽은 영웅은 다루기 쉬워도 산 영웅은 다루기 어려운 법이다.
어쩌면 교단은 부담감을 안는 대신 이 ‘오류’를 정정하려 들 수도 있었다. 그쪽이 훨씬 더 깔끔할 테니까.
물론 교단에서 부활한 성자라면서 극진하게 모실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타인이 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그래서 선택지를 하나로 줄여 주기로 했다.
아이작은 소금 의회를 통해 들르는 모든 항구마다 자신의 귀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죽은 성배기사가 돌아왔다.
그는 붉은 산에서 상처를 추스르며 다시 숭고한 여정을 재개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델리아 리옹이 찾아온 것도 바로 그 소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떡밥에 예상치도 못한 큰 월척, 발트제메르 황제가 낚였다.
아이작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성과였다.
이제 교단은 아이작을 함부로 제거한다는 선택지를 택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들은 이미 관성대로, 아이작을 위한 꽃길을 깔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 스스로 성자로 만들고 떠받든 성배기사니까.
설령 아이작에게서 ‘수상한 이단의 낌새’가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아이작이 대놓고 증거를 드러내지 않는 한 무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혹시 제가 황제 폐하 앞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루주베르크의 은밀한 내실로 향하면서 아이작이 긴장한 부분은 예법이었다.
발트제메르 황제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지만, 예법에 관해서라면 농가의 촌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것이 아이작이었다.
아니, 겸손함이라면 촌부가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황제와 싸우기 위해 찾아가는 중이라면 지금보다는 덜 긴장할 것 같았다.
그 말에 디트리히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저나 주변 사람 중에서 성배기사님께 예의를 요구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이미 성배기사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니 제게 하듯 하시면 됩니다.”
디트리히의 말에 아이작은 대체 자신이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였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최대한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행동했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예의 없는 무뢰한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사실도. 어쩌면 ‘숭고한 여정을 다니느라 미처 문명을 배울 틈이 없었던 성배기사’로 포장되었을지도 모른다.
디트리히가 안내한 곳은 루주베르크의 은밀한 내실이나 귀빈실이 아닌, 도시 한쪽에 있는 작은 저택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 저택이 상당히 고급스럽고 단단하게 지어졌으며, 주변에 있는 집들과 골목이 교묘하게 설계되어 드나드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없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귀한 손님이 올 때 이용하는 안전 가옥인 모양이군.’
문 앞으로 가자 가벼운 차림의 남녀 두 명이 문 앞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목에 흰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창을, 한 사람은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무장이 보이지 않았다.
남녀는 서로 농담 따먹기라도 하는 듯 다가오는 두 사람을 쳐다도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들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디트리히가 의아한 듯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기운이 사방 수십 미터를 향해 덮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그걸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아이작은 마치 찌르는 듯한 기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기세가 닿는 공간이 즉시 그들이 감지하고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간격이라는 것도.
아이작은 칼 앞에 목을 대는 기분으로 그 공간 안에 발을 디뎠다.
그제야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디트리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일어서지도 않고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금방 오셨군요, 공작님. 그쪽이 그 이름 높은 성배기사입니까?”
“그렇네.”
아이작은 그들 앞으로 다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황실 근위 기사시군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아이작이 먼저 고개를 숙이자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허둥지둥 일어나 마주 인사했다.
“아이고, 폐하께서 부른 손님인데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목 떨어지겠습니다. 빨리 드십시오!”
채신머리없는 그들의 호들갑에 아이작은 어이없음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황가의 일원들을 보호하는 황실 근위 기사단의 일원이다.
기사단이라고 부르기엔 수가 적은, 제국 전체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단 다섯 명뿐인 이 기사들을 마주하자마자 아이작은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검술만으로는 불가능하겠군.’
“호승심을 불태우는 것은 좋지만, 성배기사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폐하께서 성배기사님을 꽤 오래 기다리셨으니까요.”
마음이라도 읽은 듯 지적하는 기사의 말에 아이작은 다소 놀랐지만, 그가 마음이 아닌 아이작의 호승심을, 그리고 경계심을 읽었음을 깨달았다. 오직 황가를 위해 목숨을 걸기로 한 이 근위 기사들은 유독 살의나 전투 의지에 대한 감이 좋은 듯했다.
“그리고 저기 지붕 밑에 붙어서 들어갈 틈을 찾고 있는 박쥐 녀석 좀 쫓아주시겠습니까? 좀 신경 쓰이는군요.”
“……물론입니다. 과잉 충성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아이작은 몰래 들어갈 틈을 찾고 있던 헤사벨에게도 물러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잠입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헤사벨은 쓰린 상처를 안고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황실 근위 기사들은 해맑게 감탄할 뿐이었다.
“왈라이카 왕국의 공주를 교화시켰다더니 정말이군요. 저렇게나 순종하다니.”
“아직 가르칠 점이 많습니다.”
아이작은 내심 헤사벨에게 사과하면서 대답했다. 제국 기사단인 벡스터도 알고 있던 사실이니 이미 자신이 헤사벨을 호위 겸 시종으로 부리고 있다는 사실쯤은 널리 퍼진 듯했다.
황실 근위 기사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듯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그는 아이작에게 안내하면서 말했다.
“소문으로 들었을 때에는 굉장히 꽉 막힌 사제님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겸손하고 젊은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
“……과찬입니다.”
“좋은 분이신 듯하니 폐하를 만나 뵐 때 팁 하나를 드리지요.”
황실 근위 기사는 아이작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황제 폐하의 눈을 직접 마주하거나 감정을 읽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그냥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아이작은 이게 무슨 팁이냐며 황실 근위 기사를 보았다. 황제와 함부로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한 예의였다. 하지만 황실 근위 기사는 자신의 팁이 유용할 것이라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작에게 안쪽을 안내했다.
‘아무래도 전투에 관한 것을 빼면 둔감한 모양이군.’
아이작은 저택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아이작은 여름을 느꼈다.
이제 겨울이 깊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여름이 저택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이작의 맞은편에서 머리 위로 태양 같은 빛을 발하는 한 남자가 회랑에 걸린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아이작은 다시 한번 황실 근위 기사를 속으로 욕했다.
‘눈을 보지 말라고? 보고 싶어도 저 빛 때문에 눈부셔서 쳐다보지도 못 하겠구만.’
아무런 소개가 없어도 아이작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형제들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분열한 백제국을 하나로 만든 황제, 발트제메르였다.
이윽고 황제의 첫 마디가 떨어졌다.
“자네가 바로 그 우리 조카사위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