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발트제메르 황제 (3)
“비슷한 농담을 이미 공작이 했습니다, 황제 폐하. 아이작 이사크레아입니다.”
아이작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발트제메르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농담?”
‘……농담을 꽤나 진지하게 하는 타입이군.’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낮췄다. 그때 황제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발견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이솔데가 발트제메르 곁에 있었다.
“농담이라니, 무슨 말인가? 디트리히.”
디트리히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을 듣지 않으신 건 폐하시죠.”
“하지만 누가 우리 귀여운 조카를 거절하겠나?”
아이작은 이솔데의 표정을 살짝 보았다.
사실 이솔데는 황제고 뭐고 패 죽이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발트제메르에겐 그것도 귀여워 보였던 모양이다.
발트제메르는 허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눈부셔서 저쪽도 곤란하겠군. 이솔데, 부탁한다.”
“예, 폐하.”
이솔데는 자신 앞에 고개 숙인 황제의 머리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제국에서 교황을 제외하면 황제를 고개 숙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솔데 뿐이지 않을까.
아이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까다로운 의전관도, 위엄 좀 차리라는 재상도, 내가 조금만 풀어지면 얕보는 귀족들도 없으니 그대도 편하게 행동해도 좋네. 이사크레아 경.”
“어찌 만인의 아버지 앞에서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부디 낮은 위치에서 겸허히 행동하게 해 주십시오.”
디트리히는 아이작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의 지위도 만만찮은데 아이작이 이만큼이나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발트제메르는 웃으며 말했다.
“듣던 것보다 예의 바르지 않나, 디트리히. 하지만 아이작 자네도 곧 편하게 행동하게 될 걸세. 나는 궁전에서 점잔을 떨기보단 전장에서 날뛰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좋아하지 않아.”
“다 끝났습니다. 황제 폐하.”
이솔데가 발트제메르의 뿔을 모두 붕대로 감고서야 아이작은 황제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이작이 알기로 발트제메르의 나이가 대략 50대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대략 30대 초반 정도의 굉장히 젊은 모습이었다. 무인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는데, 세월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검은 수염이 길게 자라있었는데, 일부러 위엄을 갖추기 위해 기른 것 같았다. 복장은 밖에 있던 근위 기사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검소한 복장이었다.
하지만 위엄을 위한 왕관이나 망토, 왕홀, 수염 따위는 애시당초 필요 없었다. 그가 황제임을 증명하는 가장 크고 뚜렷한 특징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으니까.
머리 하나만큼 솟은 사슴뿔이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는 세상 어떤 왕관도 따라 할 수 없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뿜어져 나오는 빛을 전부 숨기지 못했다.
실로 신이 지상에 내려보낸 기적, 의지의 대행자라 일컫는 성체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다만 한가지 그 위엄을 해치는 점이 있다면, 뿔과 뿔 사이를 잇는 붕대로 된 나비매듭 리본이었다.
이솔데의 소심한 복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깜찍한 리본 매듭을 단 황제는 위엄에 찬 모습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디트리히는 웃음을 참기 힘든 표정이었으나 침묵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걸으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
네 사람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작은 저택 같았는데, 집 안쪽에 숨겨진 공간이 있었는지 회랑은 제법 넓고 길었다. 중앙에 놓인 작은 정원은 관리가 잘된 듯 잘 꾸며져 있었다.
발트제메르는 아이작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허, 이사크레아 경도 나만큼이나 잘난 얼굴이군.”
“양심 챙기십시오, 폐하.”
디트리히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외모가 아니라 관상을 말하는 것일세, 디트리히. 비범함이란 감출 수 없는 것이거든. 저 얼굴이 평민의 얼굴은 아니지 않나?”
아이작은 평민이나 귀족이나 얼굴이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솔직히 현대인인 그의 심정으로는 귀족이란 그저 일찌감치 칼 쥐고 살인 좀 하다가 어느새 지배계층이 된 사람들 아닌가 싶었다.
만약 지구에서 귀족의 관상을 찾는다면, 살인자들의 얼굴을 살펴야 할 것이다.
“어떤가, 이사크레아 경. 조카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근본 없는 성이 아니라 역사 깊은 귀족의 성과 이름을 가져볼 생각은 없는가?”
발트제메르는 웃음 지으며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발트제메르가 가진 성체의 특징은 뿔만이 아니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 역시도 태양처럼 타는 듯이 밝았다.
“이를테면 브란트라든가?”
“황제 폐하!?”
듣고 있던 이솔데가 놀란 듯 외쳤다. 하지만 디트리히가 놀라지 않는 모습을 보아 공작은 이미 언질을 들은 듯했다.
“어디까지나 의견이네, 의견. 하지만 아이작 이사크레아보다는 아이작 브란트가 훨씬 더 이름값이 있겠지. 뿌리를 이식하려면 서사도 만들어야겠군. 디트리히, 자네가 12차 여명군 때 뿌린 씨였다고 하면 어떤가?”
“프리야가 저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이솔데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황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에 대해 추측하고 있었다.
“어떤가, 성배기사. 아이작 브란트라는 이름은.”
아이작은 생각을 마치고 결론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황제 폐하, 브란트는 제게 어울리는 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런 식이 아니어도 황제 폐하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결론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트리히와 발트제메르, 둘 모두 침묵에 빠졌다.
발트제메르는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웃었다. 평화로운 분위기였으나 사실 지금 아이작은 자신이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루앗딘 열쇠를 빼들 수 있는 위치로 손이 내려갔지만, 솔직히 칼을 뺀다고 발트제메르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말빨로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영특한 성배기사는 내가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구먼?”
“제가 성을 바꾸고, 성배기사라는 지위도 포기한다면 교단도 만족하면서 제 귀환을 무시하겠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 아니다.
사실 아이작의 귀환을 껄끄러워하는 것은 교단만큼이나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교단 이상으로 부담스러워한다고 봐야 정상이었다.
어쨌거나 아이작은 새로 일어날 여명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활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고 돌아온 성배기사가 적극적으로 여명군을 지지한다면 이제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될 것이다.
결국 교단도, 황제도 부활한 성배기사 아이작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트제메르는 아이작에게 ‘성을 바꾸면 살려는 주겠다’라는 선택지를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방금 그걸 거절했고.
“이유를 물어도 될까?”
“저는 제 영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발트제메르는 ‘그깟 쥐꼬리만 한 영지’라며 비웃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쟁취한 남자에게 손에 넣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태도였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이사크레아 영지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했었지? 한번 말해보게.”
“황제 폐하께서 여명군을 바라지 않으시는 것을 압니다.”
여명군이 시작되면 게르토니아 제국의 국력은 전부 성지를 향한 원정으로 빨려 들어간다. 자원도, 인재도, 시간도 모두 그곳으로 쏠리게 된다.
사실 발트제메르 이전의 게르토니아 제국이 사분오열한 채로 제대로 응집되지 못하고 있던 것도 수차례 일어난 여명군 때문이었다.
“제국은 이제야 몸을 추스르고 숨을 고르고 있지요. 지금 여기서 또 여명군을 일으킬 여력 따윈 없을 겁니다. 12차 여명군 때처럼 민간 자원병들 주도로 일어난다면 모르겠지만, 빛의 법전이 주도해서 전원 동참을 요구한다면 게르토니아 제국은 다시 찢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발트제메르는 미소 지었다.
“황무지를 떠도는 성배기사도 아는 바를 교단의 주교들이 모르다니.”
“모르는 게 아니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요.”
“그들이 제국의 분열을 바란다고?”
“지금 게르토니아 제국은 발트제메르 황제 폐하께서 통일하신 덕분에 전에 없이 귀족 계층의 힘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옛날과 달리 교단과 균형을 대등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정도지요. 사실, 교단은 이 상황이 못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배경에는 발트제메르가 신에게서 사명을 받은 성체라는 점이 크게 한몫한다.
발트제메르가 성체가 아니었다면 교단이 상황을 이렇게 흘러가게까지 두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소극적으로 원래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게르토니아 제국이 산산조각 나 있고 교단이 그 조각들을 총괄하는 주체였던 시절로.
“교단이 일부러 원정 실패를 주도한단 말이지?”
“아니오. 교단은 성지 수복 자체에는 진심일 겁니다. 성지 수복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신앙의 목표이고, 점령만 한다면 교단의 권위는 지금 이상으로 더 강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실패해도 그들은 잃는 게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전장에서 죽어도 상관없다. 막판에 죽음의 공포에 질려 배교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당당하게 천국으로 입성할 테니까.
성지 수복을 위한 원정에서 전사했다. 이보다 더한 천국 입장 티켓이 더 있단 말인가?
아이작의 설명을 들은 발트제메르의 입가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져갔다.
“그래. 그래서 나는 당장 여명군을 원하지 않는다. 물론 빛의 법전께서 내게 내리신 소명을 잊고 있진 않아. 성지는 반드시 수복해야 할 목표고, 불사 교단은 쳐 죽여야 할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지.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라는 거다.”
발트제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표정으로 아이작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명군을 중단할 방법을 알고 있나?”
“아니오. 여명군은 막을 수 없습니다.”
***
아이작의 단호한 말에 발트제메르의 얼굴이 다시 사나워졌다. 그의 눈동자가 타는 듯이 밝아졌다.
아이작은 그의 감정과 속내를 읽기 위해 혼돈의 눈을 발동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근위 기사가 그에게 했던 경고를 지금에서야 이해했다.
신이 선물한 저 눈동자 너머에는 우르반수스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은 스스로의 영혼을 그을리게 하는 짓이었다. 혼돈의 눈이라면 더더욱 직접적으로 불꽃이 닿을 것이다.
아이작은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여명군은 막을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를 역이용하셔야 합니다.”
“역이용?”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종교적 광기에 교단으로 힘이 넘어갈 겁니다. 이는 막을 수 없습니다. 여명군을 저지하려 한다는 것은 황제 폐하께서 빛의 법전의 의무를 버린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지금 이게 황제가 가진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는 여명군을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명군을 훼방 놓거나 그에 불참하면 교단에게 비난, 매도, 심하면 파문 조치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백제국의 황제가 강제로 바르바리가 되는 것이다.
성체를 파문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 싶겠지만, 초대 교황이었던 루앗딘에게도 그런 권한이 있었다.
“여명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십시오. 이번에 정말로 성지를 수복하겠다는 각오로 힘을 모으십시오.”
“그렇게 몇 번이나 실패를…….”
“그리고 엘릴 교단과 세상의 화로의 협조도 얻으셔야 합니다.”
발트제메르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빛의 법전을 따르는 백제국과 그에 반대되는 흑제국으로 구분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 잘 협조하고 행동하는 일은 손에 꼽는다.
여명군은 초반을 제외하면 사실상 게르토니아 제국 홀로 이끌어왔다.
“초창기를 제외하고 엘릴이나 세상의 화로는 제대로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교단의 오만하고 교조적인 행동 때문이었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빛의 법전만을 대표하는 자여서는 안 됩니다. 백제국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들을 이끄셔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나?”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허나 만약 그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13차 여명군도 지난 여명군이 그랬던 것처럼 실패할 뿐입니다.”
아이작은 그러면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무인이십니다. 폐하께서 활약하실 수 있는 자리는 궁전이나 신전이 아니라 전장입니다. 전장을 피하지 마십시오. 친구의 손을 잡고 적들을 물리치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지상의 권력이 폐하께 돌아올 겁니다.”
발트제메르는 아이작의 의견을 흥미롭게 들었다.
그는 이미 조각나 있던 게르토니아 제국을 하나로 통일시킨 황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빛의 법전을 따르는 엘릴 교단과 세상의 화로를 품어, ‘진정한 백제국의 황제’가 된다면?
그는 빛의 법전 교황을 넘어선 권위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