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종말처리자 (4)
‘시험 삼아 확인해볼까.’
마침 혼돈의 짐승이 가진 적지 않은 양의 신앙이 아이작의 몸 안으로 스며든 상황이었다.
아이작은 손안에 흐르는 색채를 뭉쳐 액체처럼 흐르게 해 보았다. 색채가 종말처리자의 육신을 휘감아 돌기 시작하자 아이작은 다시 고체로 바꾸었다.
그때, 종말처리자의 파편에 숨어 있던 다면거미 몇 마리가 스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면거미들은 아이작의 뒤쪽을 노리고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종말처리자의 사체 주변에 고여 있던 색채에서 날카로운 가시들이 튀어나와 다면거미들을 꿰뚫었다.
퍼버버버벅! 다면거미의 몸에 구멍을 낸 색채들은 액체처럼 다시 녹아내리고, 기체처럼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쓸 만은 하지만 더 단단하게 만들거나 정교하게 만들려면 신성력을 많이 써야 할 것 같군.’
그래도 이 정도면 여러 가지 상황에서 상당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뭣보다 ‘저 너머의 색채’의 장점은 적당히 어둡기만 하다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다.
“아이작!”
아이작은 빠르게 저 너머의 색채를 기체처럼 흩어지게 만들었다.
색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종말처리자의 잔해라고 생각한 건지 바슐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대신 어이없다는 듯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니, 성배기사님. 괜찮습니까?”
“뭐가…… 아.”
아까 종말처리자의 몸에 닿은 생명체들은 모조리 녹아서 흡수당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었다. 바슐 역시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그을린 듯한 상처가 보였다. 특히 발등을 꿰뚫은 상처가 심각한지 쩔뚝거리고 있었다.
“아마 그 기체 같은 덩어리가 사실은 밀도가 낮은 벌레들의 군체인 것 같습니다. 주변 생명체들에게 적대적이라 다가오면 무작정 물어뜯고 삼켜버리는데, 머리가 죽으니 적대 의식도 잃은 모양이지요.”
“아…… 과연.”
미리 떨어져 자기 나름대로 조잡한 사고회로를 만든 다면거미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런 존재들은 스스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저 너머의 색채로 자잘한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아이작도 몇 번 해 봤기 때문에 아는 사실이었다. 이사크레아 영지에서도 이걸로 델리아 리옹을 깜짝 놀라게 한 적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타격을 입히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종말처리자는 역시 사후 세계의 괴물다웠다.
***
“황제 폐하는 괜찮으십니까?”
“예. 그런데…….”
바슐은 착잡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 옆에서 르네가 마차에 등을 기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가 격하게 기침을 하자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며 갑옷을 적셨다.
아이작은 놀라 다가갔다.
“아니, 아까는 멀쩡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일단 사제를 부르러 갔습니다.”
병사 한 명이 르네의 상태를 끊임없이 살피고, 황제는 뿔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더욱 환하게 밝혀 르네를 비춰 주었다. 어지간한 저주 따위는 타서 없어질 정도로 강력한 정화의 불빛이었지만 르네의 상태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은 서둘러 칼라일 성해포를 꺼내 들었다.
발트제메르가 물었다.
“그건?”
“피를 소모해서 상처를 치유하는 성물입니다. 붉은 성배의 성물입니다만, 고결한 기사를 살리기 위함이니 빛의 법전께서도 용서하실 겁니다!”
다행히 트집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작은 칼라일 성해포를 르네의 몸통에 둘둘 말아 감고 손에 상처를 내 흘려보냈다. 성해포가 더욱 진한 핏빛으로 물들며 활성화되었지만 르네의 안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주도,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르네 로메르크 경이 뭔가 이상 징후를 보인 적이 있습니까?”
“아까 저 괴물을 상대로 상급 검술을 썼을 때 격한 기침을 했던 것 말고는…….”
바슐의 말에 아이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때, 르네가 내장을 토해 낼 듯한 기침을 터뜨리며 또 한 번 피를 왈칵 쏟아냈다. 핏속에 내장 조각과 시커먼 다리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주변의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파리해진 르네는 입을 뻐끔거리며 자신의 입안을 더듬었다.
“이거…….”
그녀의 입안에서 시커먼 다리들이 꿀렁이면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종말처리자의 몸통에 칼을 꽂는 순간, 호흡 조절을 잘못하면서 놈의 체액을 마셔버린 것이다. 격한 기침은 처음부터 그것 때문에 나왔던 것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르네의 눈에 공포가 가득 담겼다. 그녀는 황급히 갑옷을 벗고 칼을 집어 들려고 했다. 그 순간 발트제메르가 창을 들었다.
“폐하!”
콰득. 아이작이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발트제메르의 창끝은 르네의 가슴을 관통한 뒤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가 느리게 탁해졌다.
창끝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르네의 몸을 속에서부터 태웠다. 몸속에 있던 다면거미를 비롯한 괴물들은 불꽃 속에서 불타 버렸고, 이내 르네의 몸까지 태워 버렸다.
순식간에 르네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새하얀 유골과 타다남은 갑옷만이 남았다.
발트제메르는 그녀의 유해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짐을 지키려다 전사한 자다. 최대한 융숭히 대접하라.”
바슐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이작 역시 착잡한 얼굴로 르네의 유해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방법을 찾지 않은 황제에게 서운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순간 르네는 스스로 배를 가르려 했다. 공포에 빠져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한 것이다.
황제의 창은 그녀의 고통을 좀 더 빠르게 끝내준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이작은 만약 자신이 힘을 드러냈다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쨌든 저것들도 혼돈의 권속. 그가 통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
그때 발트제메르가 그의 어깨를 짚고 일으켜 세웠다. 아이작이 고개를 들자 웅성웅성 몰려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괴물의 습격에 놀라 집 안으로 숨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고개를 들고 저들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라. 네가 구한 사람들이다.”
뒤늦게 경비대원들을 이끌며 혼란을 수습하던 이솔데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태양처럼 빛나는 황제의 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명징한 표식에 백성들은 탄성을 흘리다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께서 괴물을 퇴치하셨다.”
누군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속삭임은 곧 들불처럼 번졌다.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황제 폐하 만세!”
곧 황제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울고 흐느끼는 찬양의 목소리들이 무릎 꿇고 엎드린 백성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쏟아졌다. 신이 내려보낸 기적을 담은 성체가 나타나 그들을 구원한 것이다.
물론 그 괴물은 처음부터 황제를 노리고 나타난 것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들어라!”
그러나 그때 황제가 크게 소리쳤다. 조용히 들어왔다가 조용히 돌아간다는 계획은 이제 소용없었다. 병사들 역시 사열하여 황제의 후광을 빛내 주었다.
“너희를 구원한 것은 내가 아니다. 바로 여기 있는 성배기사, 아이작 이사크레아다!”
아이작은 놀라서 발트제메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이작의 어깨를 툭 치면서 앞을 보라고 지시했다.
“나 또한 성배기사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사악한 이교도들이 우리 백성들을 공격했으나, 우리는 신실한 신의 백성! 빛의 법전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대리할 성배 기사를 부활시키신 것이다!”
지나치게 띄워주는 황제의 말에 아이작은 거부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공격해온 것이 혼돈의 권속이며, 자신이 방치하고 있던 붉은 성배의 첩자가 이 음모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적지 않은 사람과 르네조차 눈앞에서 죽지 않았나.
“자네에게 찬사와 감사를 보내네. 아이작 이사크레아.”
하지만 백성들의 시선이 아이작을 향해 쏠리기 시작하자 막대한 신앙심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슴을 충만하게 하는, 찬양과 감사,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담겨있는 신앙심이었다.
아이작은 그 ‘압력’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우리 곁에 성배기사가 돌아왔다!”
발트제메르가 아이작의 손을 쥐고 들어 올리며 외치자 백성들도 앞다퉈 소리쳤다.
무수한 인파 너머에서 이솔데가 생소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성배기사가 돌아왔다!”
“우리 곁에는 성배기사 아이작이 있다!”
눈이 멀 것 같은 아득한 찬사의 홍수였다.
***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황제는 다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비밀스러운 이동을 위해 호위 병력도 많이 데려오지 않은데다, 암살자들에게 동선이 노출되었으니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디트리히가 호위 병력을 보충해 주기로 했지만, 최선은 소문이 퍼지기 전에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왜 백성들에게 제가 그들을 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나?”
“……황제 폐하의 빛이 없었으면 더 많은 희생자들이 생겼을 겁니다. 할타바의 뇌전이 없었다면 괴물의 빈틈이 생기지 않았을 테고, 바슐과 르네 두 기사가 아니었다면 괴물을 쓰러뜨릴 틈을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마지막 일격만 가했을 뿐입니다.”
발트제메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차 안에서 한참을 웃던 그는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정말 사랑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자로군.”
“무슨 뜻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자, 생각해보게. 제일 먼저 음모를 알아차리고 움직인 건 누구지?”
“저군요.”
“가장 먼저 소환사를 찾아 죽여서 소환을 중단한 사람은?”
“……저군요.”
“배후에 불사 교단이 있다는 정황 증거를 확보한 사람은?”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트제메르는 ‘근위 기사들조차 당한 시점에 괴물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해서 끝장낸 사람은 누구냐’라고까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이작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부담스러워하는 건 이해하네. 그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데 영광을 독차지하는 기분이겠지. 하지만 그건 앞으로도 무수하게 있을 일이야. 영웅이란 수많은 시체를 쌓아 만든 왕좌에 혼자 앉는 사람이지.”
아이작은 발트제메르가 무수한 내전 끝에 승리한 전쟁영웅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의 발밑에는 적뿐만이 아니라 많은 동료와 친구, 아군의 시체가 쌓여 있다.
여명군을 일으켜 공을 쌓으려 하는 아이작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기도 했다.
황제는 마차를 둘러싸고 여전히 환호를 던지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눈짓했다.
“두렵고 지친 저들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네. 자네는 희망의 상징이 되는 거야. 그리고 조만간 디트리히가 자네와 이솔데의 약혼을 발표할걸세. 이 정도 이벤트면 루주베르크의 시민들은 확실히 두려운 기억을 잊겠지.”
“……황제 폐하께서 영웅이 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 경험도 있으실 텐데.”
아이작의 못마땅한 말투에 황제는 낮게 웃었다.
“자네의 귀환 무대에 내가 끼어들면 주책없는 노인네가 과욕을 부린다고 흉볼걸.”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야 한다. 아이작도 그런 황제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미를 토해 내던 르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아, 그리고 자네가 처치한 소환사의 소지품 중에 이걸 발견했네.”
황제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씹힌 자국으로 흉하게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앙크(Ankh)였다. 하지만 원래 빛의 법전 표식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건……?”
“확인해보니 원래 사제였던 자로 추정되더군. 기도문을 새긴 문신이 확인됐고, 소속됐던 수도원도 알아냈네. 다만 아직 자세한 건 확인하지 못했지.”
아이작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닫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살기가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맞아. 이 음모의 배후에 빛의 법전 교단이 있을 확률이 높네.”
“교단이 왜…….”
“그걸 말이라고 묻나? 놈들에게는 내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야. 감히 지상의 권력이 천상의 권세를 나눠 가지려 하다니! 하면서 말야. 하지만 이 뿔 때문에 대놓고 나를 어쩌지도 못하지.”
발트제메르는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적당히 도발해서 나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일 수도 있지. 사건의 배후를 불사 교단으로 정해놓고,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거냐’ 하면서.”
“하지만 정말로 불사 교단이 개입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교단 안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사 교단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자네도, 나도, 바슐도 알고 있지.”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발트제메르는 바슐이 엘릴의 신도이며 교단에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인 것이다.
“놈들이 르네를 죽였어. 당장은 드러낼 수 없겠지만 나는 이 일을 잊지 않을걸세. 반드시 그 배신자들의 목을 꺾어버릴 거야.”
그는 시선을 돌려 아이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려면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아이작은 발트제메르가 생각보다 야망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야망은 백제국의 황제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역사상 그 이상의 권력을 노렸던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패왕 엘릴.
발트제메르는 엘릴이 되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을 얻을 방법은 없었다.
사실 황제의 야심 따위보다 더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앙크를, 황제는 어떻게 찾아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