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엘릴 왕국 (1)
황금우상 상단은 어디에나 있다.
해골이 덜그럭거리는 흑제국이나, 길을 잘못 들면 일주일은 헤맨다는 만 사하르 평원에도 상인들은 찾아간다. 타국과 자유로운 교역이 금지된 엘릴 왕국에도 왕국 내수 거래를 취급하는 황금우상 상단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곳에서도 캐틀린이 만들어 준 신용증명서는 통했다. 아무리 나라가 틀어막아도 어디든 스며들고 교류하는 황금우상 상단다웠다.
아이작은 여전히 진흙투성이인 율리히를 보면서 말했다.
“우선 먼저 씻고 식사를 하는 게 좋겠군요.”
그 말에 율리히는 처음으로 자기 의견을 강하게 표시했다.
“먼저 먹는 게 좋다.”
“주관이 강하시군요. 그렇게 합시다.”
황금우상 상단의 지부는 숙소와 식당을 겸한다. 귀한 손님에 대한 접대를 겸하기도 하는 이곳에는 제법 고급스러운 식재료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율리히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덥썩덥썩 집어먹기 시작했다.
며칠은 굶주렸던 것처럼 먹어 치우는 모습에 아이작은 식욕이 사라졌다. 사실 종말포식자를 먹은 덕분에 한동안 배를 채울 필요도 없어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맛있습니까?”
“쥐나 생선보다는 낫군.”
‘이게 칭찬이야 욕이야?’
“돈을 가져오시지 그러셨어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게 싫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작이 가지고 있던 신용패를 눈여겨보았다.
“그건 제법 편리해 보이는군. 상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성물인가?”
“……그런 건 아니고, 제가 황금우상 상단에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패입니다. 여기 지부장은 제가 여기서 얼마를 쓰는지 장부에 기록해 뒀다가 그 액수를 본부에 청구하죠. 그러면 본부는 제가 맡긴 돈을 또 차감하구요.”
율리히는 입을 헤 벌린 채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성물이군.”
아이작은 설명을 포기했다.
사실 이건 원리를 알아도 황금우상 상단이 아니고서는 흉내 내기 어려운 제도이긴 했다. 온갖 폐단과 조작이 일어나기 쉬웠으니까.
“여기선 뭐 하고 지내셨습니까?”
“흠. 주로 서 있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었지.”
정말 대화가 안 통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교단에서 보낸 사람이라 하니 아이작은 인내심을 가졌다. 엘릴 왕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실력이 없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들어 보니 빛의 법전 교회에서 머물고 있는 듯한데, 이런 변방 개척교회는 괜한 시비를 거는 놈들도 많을 것이다.
“싸울 일이 많았을 텐데요?”
“왜?”
“시비 거는 놈들 없었습니까?”
솔직히 이런 성격에 말투면 멀쩡하던 사람도 시비를 걸 것 같았다. 그 말에 율리히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이작, 너는 시비를 건다고 싸우나?”
예상치 못한 정상인 같은 말에 아이작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까 돈이 없다고 강도질하려던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인가? 강도질은 괜찮고 시비 걸었다고 싸우는 건 또 안될 일인가?
“시비 거는 놈 있을 때마다 내가 싸웠으면 엘릴 왕국에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런 건 등대지기께서 허락하시지 않겠지.”
아이작은 허세의 스케일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나는 싸우지 않는다. 나는 살인마가 아니니까.”
“……그렇군요.”
아이작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때였다. 아이작의 발치에 고양이 한 마리가 비비적거렸다. 황금우상 상단 지부에서 키우는 고양이 같았다. 아이작은 수도원의 무르지크가 생각나서 반가운 마음에 먹이를 주다가 율리히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 열심히 음식을 먹던 율리히가 의자 위로 올라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양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치워, 그거.”
“예? 고양이 싫어합니까?”
“치…… 워.”
율리히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두면 울 것 같아서 아이작은 서둘러 고양이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내보냈다. 누가 누굴 수행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고양이가 나갈 때까지 율리히는 시야에서 고양이를 놓치지 않았다.
아이작이 자리로 돌아오자 율리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관심한 눈동자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고양이는 왜 무서워하는 겁니까?”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너희들이 더 이상해.”
율리히는 고양이를 언급하는 것조차 거부할 뿐,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
아이작이 알데온에 온 이후로 가졌던 첫인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심지어 황금우상 상단 지부를 방문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촌스럽다고 느낀 부분은 건물이나 기념비, 도로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엘릴 왕국 하면 떠오르는 ‘기사도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현실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와라라라락!
“뭐? 이 반역자 개새끼가 지금 뭐라고 씨부렸냐!”
“허? 뭐야, 네 놈도 알데온 돼지가 친 새끼돼지냐?”
식당 한쪽에서 욕설과 함께 요란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사람들이 으르렁거리면서 일어서고, 식당 점원은 능숙한 듯 의자를 이리저리 밀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엘릴 왕국은 기사도의 나라다.
세상을 호령하던 패왕이 세운 나라답게 강자가 우대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다만 문제는 사람의 심리상 모두가 강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강자임을 증명할 기회를 끊임없이 찾는다는 것이기도 했다.
“알데온 왕가는 유일무이한 엘릴의 왕가이며, 에델레드 폐하는 엘릴 신민들의 위대한 영도자시다! 그런데 게오르크와 그 휘하의 개새끼들은 반역도당 시정잡배에 불과하지!”
“찬탈자 알데온 왕가가 얼어 죽을 영도자? 소드마스터 게오르크 장군이야말로 정정당당한 왕좌의 주인이다! 새끼돼지들은 전부 구워버려!”
대머리 남자와 수염 남자가 서로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대자 주변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만 소리 지르고 칼이나 뽑아!”
“시끄럽게 짖는 개는 닥치게 만들어야지!”
주변의 부추김과 야유 속에서 두 남자는 이를 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칼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이 칼부림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챙, 챙, 카득. 깡.
아이작은 엘릴 왕국에 온 이후로 처음 보는 결투였기에 제법 흥미를 가지고 보았지만, 곧 실망했다. 기대치가 높았던 탓인지 형편없는 싸움이었다. 둘은 상대를 죽이기보다 자신을 살리는 데 더 급급했기 때문에 칼만 요란하게 부딪칠 뿐이었다.
‘그래도 시정잡배들 싸움치고는 괜찮군. 이 정도가 엘릴 왕국의 하한선인가?’
그때 뒤로 밀리던 대머리 남자가 율리히가 앉아 있던 의자에 부딪혔다. 순간적으로 대머리가 균형을 잃자 수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칼을 강하게 휘둘러 대머리의 손목을 내려쳤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대머리가 칼을 떨어뜨렸다. 수염은 대머리의 손목을 벨 생각으로 휘두른 것 같았지만 어설픈 상처만 입혔을 뿐이었다.
“하, 하하! 이겼다! 당장 게오르크 개새끼라고 말해!”
“크윽…… 게오르크 개새끼!”
‘말하라고 했다고 바로 말하네.’
여러 가지로 아이작이 상상했던 기사도의 나라와 거리가 멀었다.
‘애당초 엘릴이 빛의 법전 교단과 갈라서게 되었던 이유가 빛의 법전 교단이 이단을 심판하는데 비겁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아니었던가?’
엘릴은 빛의 법전을 숭배했다.
동시에 그는 명예와 용기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러니 빛의 법전을 세상 만방에 알리는 과정에서 설령 그 적이 고대신이라 해도 명예롭게 적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빛의 법전 교단의 생각은 달랐다. 야만적인 고대신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그렇게 갈등이 쌓이고 쌓이다 터진 것이 엘릴 분파(分派)였다. 이제 막 대륙을 장악해 나가던 빛의 법전에 있어서는 재앙이자 뼈아픈 배교였다. 그때부터 ‘가장 아픈 배교는 가장 신실한 자가 하는 법’이라는 말이 생겼다.
물론 그 일과 교단이 엘릴과 무희의 근친혼을 거절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 비중이 차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엘릴은 여전히 빛의 법전을 숭배한다. 빛의 법전 교단에 거부감을 가질 뿐이다.
아이작은 그 기풍이 백성들에게도 전해졌으리라고 생각했다.
명예롭고 용기 있는 사람들.
하지만 지금 보니 명예와 용맹 같은 건 싹 사라지고 ‘오직 강자만이 규칙을 정한다’는 엉성한규율만 남아 있었다.
게임할 때에는 간편한 시스템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미개하기 짝이 없었다.
대머리가 손목을 감싸 쥔 채 사납게 뒤를 돌아보았다.
율리히는 여전히 음식을 먹는데 정신없었지만 아이작은 쓸데없는 시비가 붙겠다고 직감했다.
대머리는 자신이 부딪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만만한 작은 여자’와 ‘여리여리하게 생긴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놈’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의자를 걷어찼다.
“이 새끼들! 결투를 방해해놓고 뭘 잘했다고 처먹고 있어!”
아이작은 무슨 헛소린가 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의자를 치우고 자리를 비우지 않은 사람은 아이작 일행뿐이었다. 맥 빠지는 결말에 실망하던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열린 판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동네에서는 이게 일상인 듯했다.
‘손목이 아직 덜 부러진 모양이군.’
아이작은 대머리가 계속 시비 걸면 지렁이처럼 집까지 기어가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율리히는 대머리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작은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작, 너는 시비를 건다고 싸우나?’
아이작은 다짜고짜 싸울 생각부터 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율리히가 이 가당찮은 도전을 어떻게 넘길까 기대했다.
과연 현명하게 싸움을 넘기는 모습을 보여 줄까?
“아이작, 이것 좀 치워라.”
“……시비를 건다고 다 싸우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왜? 너는 약하니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워도 된다. 하지만 내가 분노하면 엘릴이라는 나라가 없어질 수도 있다.”
아이작은 이 여자의 허세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스케일이 크기만 한 건가 생각했다.
‘잠깐, 그러면 아까 그 말은 내 폭력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질문이었던 건가?’
“하지만 나는 여기 음식이 마음에 든다.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군.”
“음식 맛은 평범한 편인데…… 어쩔 수 없군요.”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살의를 자제하는 법을 익힐 겸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제가 술이라도 한잔 살 테니…….”
“뭐? 하, 칼도 차고 있는 놈이 혓바닥 미끄러운 거 보소?”
아이작은 대체 율리히가 그동안 이 나라에서 칼을 뽑지 않고 상황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방은 전혀 얌전히 아이작의 말을 따라 줄 의사가 없었다. 그저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을 다른 약자를 꺾어서 주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대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떨어진 자존심을 직접 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
알데온 항구 술집 거리에 소란이 벌어졌다. 왁자지껄한 난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항구 노동자들과 경비대까지 모이면서 소란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뭐야? 무슨 일인데?”
“황금우상 지부 앞에서 결투가 벌어지고 있다는데?”
“그게 왜? 또 취한 놈들끼리 칼부림하는 모양이지.”
“아니, 지금 한 놈이 스무 명째 상대하고 있대. 지금은 왕의 기사들도 끼어들었다나 봐!”
기사들까지 끼어들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며 술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결투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지만, 그 정도로 수준 높은 검객이 대놓고 난장판을 벌이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이거 끝이 없겠는데.’
한편, 아이작은 슬슬 짜증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팔다리 중 어딘가 하나씩 부러진 남녀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여전히 도전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갑옷 차림에 망토까지 두른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에는 드디어 이 난장판을 정리할 사람들이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히 기사일 그치들은 취객들 못지않게 환호성을 내지르며 저들끼리 순서까지 정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겁을 좀 줘야겠군.’
아이작은 저녁의 어둠 속에 저 너머의 색채를 은밀하게 풀기 시작했다.